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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나랑 맞춰 볼래요?-97화 (97/110)
  • 17.

    “자네에게 어떤 벌을 내릴까 고민 중이네. 자네가 판 물건으로 인해 리첼이 목숨을 잃을 뻔했으니 난 그냥 넘어갈 수 없네만.”

    노인의 애원에도 레녹스 공작의 붉은 눈이 섬뜩할 정도로 번뜩였다.

    “히이익, 살려주게. 제발!”

    카일의 스승이 레녹스 공작의 바지를 붙잡으며 엎드리려 했지만 레녹스 공작은 한 발 뒤로 물러나며 그를 피했다.

    “조만간 솔로이 제국에선 최초의 궁정 마법사가 탄생할 걸세. 자넨 그 옆에서 1년간 보좌해야 하면 어떤가? 무료로 말일세. 물론 힐다 양에게 팔아서 번 돈은 압수하겠네.”

    “무료라니? 나보고 공짜로 일하란 소리인가? 게다가 제국 내에서 번 돈도 빼앗는다고?”

    “그렇네. 솔로이 제국 내에서 상업적인 활동도 제한될 걸세.”

    “마… 말도 안 돼. 나보고 돈도 빼앗긴 후 내 돈으로 생활하란 말인가?”

    룩스 대륙에 비해 솔로이 제국의 물가가 비쌌기에 그에겐 큰 부담일 수 있었다.

    “그럼 다른 처벌을 해야 하나? 솔로이 제국의 레녹스 가문을 건드린 자네를 문제 삼아 룩스 대륙에 항의 서신이라도 보내도 괜찮겠는가? 불명예스러운 추방을 한 다음 자네를 핑계 삼아 전쟁을 하는 것도 나쁘진 않네만. 삶이 지루하지 않겠군.”

    “내, 내가 뭐라고 항의 서신을 보내고 전쟁을 일으킨단 말인가?”

    레녹스 공작의 말에 노인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아하하. 농담일세.”

    레녹스 공작이 호탕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의 웃음이 커질수록 노인의 얼굴은 점차 굳어졌다.

    “아버지. 농담 좀 그만하세요. 저러다 정말 기절하겠어요.”

    스승의 얼굴이 숨넘어가기 직전까지 점점 하얘지자 보다 못한 리첼이 자신의 아버지를 나무랐다.

    “1년간 솔로이 제국에서 무…료 봉사하겠네.”

    카일의 스승은 무료라는 말을 할 때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레녹스 공작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돈만 밝히는 그의 입장에선 레녹스 공작의 제안은 청천벽력 같은 소리일 터였다.

    “내… 돈….”

    노인은 허탈한 얼굴과 함께 혼자 중얼거렸다.

    “아. 잠자리는 걱정하지 말게. 그것만은 내가 제공해 주겠네.”

    “지, 진짜인가?”

    레녹스 공작의 말을 들자 그의 얼굴에 잠시 화색이 돌았다. 잠자리만 제공해도 아낄 수 있는 돈이 꽤 클 테니 말이다.

    “그렇다네. 황궁 내에 자네의 거처를 마련하겠네.”

    “화… 황궁이라고?”

    말이 잠자리 제공이지 도망가지 못하게 황궁 내에서 감시한다는 말이었다.

    공작의 말을 듣자마자 카일의 스승은 모든 걸 내려놓은 듯 절망의 한숨을 쉬었다.

    * * *

    “하필이면 건드려도 레녹스 공작가를 건드리다니….”

    힐다는 레녹스 저택 안 감옥에 갇혀 있었고 그녀는 호위병들의 대화 소리를 들으며 눈을 떴다. 빛을 잃은 줄 알았더니 다행히 눈앞이 보였다.

    “무식한 자가 용감하다고 하더니. 귀족들도 함부로 못 건드는데 역시나 평민이니 레녹스 공작님의 무서움을 모르는 모양이야.”

    힐다는 철창 밖에서 들리는 호위병들의 대화에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어디서 들어본 이야기 같다는 기분이 들은 건 착각일까?

    “지금 당신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힐다는 철창을 두 손으로 잡으며 대화를 하는 두 명의 호위병에게 물었다.

    “힐다 양. 당신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남자들은 귀찮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내 미래라뇨? 나 같은 일반인을 이렇게 감옥에 가둬도 되는 건가요? 여긴 어디죠? 나를 꺼내줘요. 난 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 왜 감옥 안에 있어야 하죠?”

    힐다는 갑자기 두려움이 밀려왔다. 어둡고 추운 감옥 안에서 계속 있을 자신이 없었다.

    “아무 잘못도 하지 않다니? 정말 몰라서 그런 말 하는 건 아니겠죠?”

    힐다의 말에 호위병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네. 난 아무 잘못도 없어요. 잘 생각해 보세요. 난 갑자기 정신을 잃었고, 일어났더니 감옥에 갇혀 있었어요. 난 피해자라고요! 그러니 날 여기서 꺼내줘요.”

    힐다는 철창을 흔들며 소리쳤다. 생각할수록 억울해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갑자기 빛이 나타나서 그녀의 눈을 잠시 멀게 하고 정신까지 잃게 만들다니…. 말이 되지 않았다.

    잘만 하면 그 계집애의 숨통을 끊을 수 있었기에 아깝기도 했다.

    “하아. 자신이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모르나 본데. 당신은 레녹스 공작가의 공녀님을 납치했고, 해치려 했어요. 알아요?”

    “….”

    힐다는 리첼을 건드리면 큰일 난다는 말을 들었던 것을 기억해냈다. 리첼, 그 여자가 뭐라고 그런 비리비리하게 생기고 약해 보이는 여자에게 다들 쩔쩔매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성녀까지 했으면서 몰라요? 레녹스 공작님은 황제 폐하의 동생이자 그분의 오른팔입니다. 당신은 지금 황제 폐하의 조카를 위험에 빠뜨릴 뻔했어요. 알아요?”

    “화… 황제 폐하라니요?”

    황제란 말에 힐다의 심장은 ‘쿵’하고 내려앉았다.

    “하아. 공작이란 말은 몰라도 황제라는 단어는 알아듣는군요. 그 정도로 무식할 줄은 몰랐네요.”

    힐다는 그제야 자신이 처한 상황을 깨달았다. 리첼과 그녀의 격차를 인정하지 않으려 그동안 애써 부정했건만 이제야 현실적으로 그 차이를 맞닥뜨린 기분이었다.

    그리고 호위병들의 대화는 기시감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들이 알려준 건 펠릭스와 리첼이 수없이 그녀에게 외친 말과 동일했다.

    갑자기 온몸에 오싹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막연한 두려움이 밀려왔다.

    “저를… 죽여주세요.”

    힐다는 손을 벌벌 떨며 엎드렸다. 감당하기 어려운 미래가 다가올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리첼이 말한 것도 같았다. 차라리 죽는 게 편할 수도 있다고 말이다. 그녀의 말이 떠오르자 갑자기 힐다의 몸이 덜덜 떨려왔다.

    “그건 안 되지.”

    그 순간 멀리서 차디찬 목소리가 감옥 안에 울렸다.

    힐다는 목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곳에선 그녀를 바라보던 싸늘한 눈빛을 느껴졌다.

    리첼과 같은 분홍색 머리였지만 그녀와 달리 냉혹한 붉은 눈빛이 힐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만 마주쳐도 몸이 벌벌 떨릴 정도의 위압감이 느껴졌다.

    힐다는 그를 처음 보지만 누군지 알 것 같았다. 남자는 리첼의 아버지 레녹스 공작이었다.

    “제발… 저를 죽…여주세요.”

    힐다는 엎드려서 싹싹 빌었다. 그러자 레녹스 공작이 몸을 숙여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사형은… 재미없지 않은가? 너무 빨리 끝나는 것 같군.”

    재미라니. 힐다는 이 상황에서 재미라는 말을 꺼내는 레녹스 공작이 이상하면서도 무서웠다.

    힐다를 매섭게 바라보던 공작의 입꼬리가 갑자기 살며시 올라갔다.

    “리첼이 자네를 불쌍히 여기고 있으니 사형만은 면하겠네. 대신 다른 벌을 줄까 하는데 어떤가?”

    힐다는 그 말이 가장 잔인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다.

    리첼이 그녀를 불쌍히 여길 리 없었다. 사형을 시키기 싫은 핑계일 뿐이었다.

    “아… 아니요. 그… 그냥 죽여주십시오.”

    차라리 리첼의 말처럼 죽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러자 웃고 있던 레녹스 공작의 표정이 굳었다.

    “내가 분명히 사형은 면하겠다고 했는데? 내 말이 우스운가?”

    갑자기 레녹스 공작은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꺼냈고 철창 사이로 그녀를 향해 천천히 내리쳤다.

    힐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살기가 느껴졌기에 이제 죽는다는 것을 직감했다. 하지만.

    “히익. 사, 살려주십시오.”

    소름 끼치는 섬뜩한 눈빛과 살을 천천히 파고드는 검의 차가운 감촉에 힐다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죽는 게 편할 것 같았지만 막상 죽으려니 너무나 무서웠다.

    차라리 빠르게 칼을 내리치면 몸이 베였다고 인지하지 못한 채 죽을 수 있으니 괜찮았겠지만, 생각할 시간을 줄 정도로 천천히 움직이는 칼날은 그녀에게 정신적인 고통을 안겨주었다.

    칼이 그녀의 목을 벨 때까지의 시간이 너무 느리게 갔다. 그 짧은 순간 느끼는 죽음의 공포는 상상 이상이었다. 그래서 갑자기 살고 싶어졌다.

    “어, 어떠한 버,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사, 살려주세요.”

    힐다는 자신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레녹스 공작의 위엄에 눌려 아무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지금은 그저 레녹스 공작이 그녀의 눈앞에서 사라졌으면 하는 바람만 있을 뿐이었다.

    “내가 사형만은 면한다고 하지 않았나? 처벌은 내가 정하지.”

    레녹스 공작은 만족스러운 답변을 들었는지 갑자기 굳어있던 표정이 풀어지며 재미난 일을 기대하는 표정으로 ‘앞으로 기대하겠네.’ 이 말만을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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