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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나랑 맞춰 볼래요?-95화 (95/110)
  • 16.

    레녹스가로 돌아오자마자 카일은 리첼을 방 안 침대 위에 살포시 앉힌 다음 그녀의 신발을 조심스레 벗겼다.

    그녀의 발은 살가죽이 살짝 벗겨지고 퉁퉁 부어있었다.

    안타까운 눈빛으로 그녀의 발을 바라보던 카일은 발등에 짧게 입을 맞췄다.

    “더, 더러울 텐데요.”

    리첼이 부끄러워 발을 빼려 했지만 카일의 손이 그녀의 발을 놔주지 않았다. 또다시 그의 입술이 닿았고,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 * *

    “제가 그 자리에 있었어야 했는데.”

    리첼의 상처를 치료해주면서 카일이 아쉬움이 남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신 목걸이가 저를 구해줬잖아요.”

    카일의 눈빛이 슬퍼 보여 리첼을 일부러 환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녀의 미소에도 여전히 그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리리스와 레이나에게도 같은 목걸이를 주셨던데 셋 다 방어 마법이 걸려있나요?”

    화제도 돌릴 겸 슬픈 표정도 바꿀 겸 리첼은 이제야 궁금했던 걸 물어보았다.

    “네. 제가 사제를 그만두고 나서 레녹스가에 방문하면서 제일 먼저 만든 마법 도구입니다. 공작님의 부탁을 받아 목걸이에 방어 마법을 걸어두었습니다.”

    그동안 카일이 레녹스가를 자주 방문한 이유를 몰랐는데 이제 보니 아버지가 그에게 연구할 수 있는 공간을 저택 내에 마련했던 모양이다.

    “아! 그러고 보니 힐다 양도 마법 도구를 가지고 있더라고요.”

    그러자 카일의 낯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화가 났는지 그의 주먹엔 조금 힘이 들어갔다.

    “제 불찰이었습니다. 설마 힐다 양이 신전에서 도망 나와 스승님을 만날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신전에서 분명히 힐다 양을 잘 감시하겠다고 해서 믿었건만….”

    화가 났는지 말을 하다가 멈추었다. 보아하니 그 역시 스승이 솔로이 제국에 온 걸 아는 눈치였다.

    “혹시 그 노… 아니, 스승님과 만난 적 있어요?”

    자신을 버리고 도망간 카일의 스승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기에 리첼은 노친네라는 말이 나오려다가 급하게 스승으로 수정했다.

    “저를 몇 번 찾아오셔서 다시 룩스 대륙으로 가자고 설득하셨기에 거절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힐다와 그 노인의 대화를 떠올렸다. 말이 통하지 않자 화가 난 그가 힐다를 이용해 카일을 약점을 잡으려 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달리 힐다가 귀족을 납치하는 바람에 노인도 당황스러워 그대로 도망간 것 같았다.

    “그 스승이라는 분은 카일 님께서 말씀하셨던 그대로더라고요. 위험한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는 것 같아요. 겁도 많고요.”

    “비겁하신 분이시죠. 스승님은 제가 곧바로 룩스 제국으로 돌려보내겠습니다.”

    카일은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지금 레녹스가의 기사들이 붙잡으러 갔어요. 아마도 아버지가 알아서 처리해 주실 거예요.”

    “…그렇군요.”

    한 박자 늦게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 짧은 사이에 그는 많은 생각을 하는 듯 보였다.

    스승 이야기에 다소 불편함을 보이는 카일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리첼은 또다시 화제를 바꿨다.

    “어쨌든 목걸이 덕분에 살았어요. 정말 감사해요. 아깐 급한 상황이라 감사 인사도 드리지 못했어요.”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여 착용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드린 건데, 매일 제 생각하셨다고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어두웠던 표정을 언제 지었냐는 듯 카일은 흡족한 미소로 리첼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이 달라진 것 같아 다행이지만 얼굴이 달아오를 것만 같았다.

    “네. 당연하죠.”

    예전 같았으면 또 놀린다고 화를 냈겠지만 이젠 아니었다.

    서로의 마음을 알았으니 리첼은 대답을 머뭇거릴 필요도, 그녀의 마음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

    “이번엔 벌이 아니라 칭찬해 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리첼은 어깨를 으쓱으쓱 올리며 자랑스럽다는 듯 말했다. 그러자 카일은 성큼 다가왔고, 그녀는 순식간에 카일의 품 안으로 들어갔다.

    ‘어?’

    평소대로 카일은 여유로운 미소로 대답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리첼이 붙잡힌 시간 동안 불안했었는지 그의 몸은 살짝 떨리고 있었다.

    “난 괜찮아요. 보다시피 아무렇지도 않아요.”

    리첼은 카일을 더욱 꼬옥 안으며 오히려 그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다급한 일을 겪은 건 그녀인데 오히려 카일이 겁을 먹은 것 같았다.

    그녀의 어깨에 카일의 이마가 살포시 내려앉았다.

    “공녀님께 무슨 일이라도 있을까 봐 두…려웠습니다.”

    평상시 장난기 많은 모습은 사라지고 지금 리첼의 눈앞엔 겁에 질린 어린 양이 한 마리 있는 것 같았다.

    감정을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기에 그의 낯선 모습은 생소했다. 그만큼 자신을 걱정한 것 같자 리첼의 입가에선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목걸이 덕분에 아무 일도 없었어요. 오히려 내가 활약한 일이 없어서 아쉬울 정도인데요. 뭘.”

    리첼은 카일을 다독이듯 더욱 그를 끌어안았다.

    맞닿은 단단한 가슴팍에선 거칠게 뛰는 심장 고동 소리가 그녀에게까지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나 진짜 괜찮다니까요? 그러니 지금 이렇게 포옹할 수 있잖아요.”

    카일을 안심시키려고 괜찮다는 말만 반복했다. 리첼의 고요한 심장 소리에 맞춰 빠르게 뛰던 카일의 심장 소리도 점차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카일의 새로운 모습을 보자 리첼은 힐다에게 납치당했던 일을 잊을 만큼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가끔 위험에 처한 상황이 오는 것도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위험 속에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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