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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나랑 맞춰 볼래요?-93화 (93/110)
  • 16.

    리첼은 바닥에 떨어진 칼을 재빨리 발로 차서 멀리 보내려 했지만, 힐다의 손이 더 빨랐다.

    리첼의 발이 그녀의 얼굴을 찼지만 그녀는 손에서 칼을 놓지 않았다. 멍이 들 정도로 가격했으나 끝까지 칼을 놓지 않은 채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칼을 놓치고 나니 리첼은 머릿속이 하얘졌다. 독이 묻은 칼이 조금이라도 살갗을 스친다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공포가 밀려왔다. 당장 도망가야 했다.

    하지만 혼자서 도망갈 수는 없었다. 이대로 두었다간 펠릭스가 진짜 죽을 것만 같았다.

    리첼은 쓰러진 펠릭스의 겨드랑이에 양팔을 끼고 들어 올리려 했지만 그의 묵직한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다. 또다시 있는 힘껏 힘을 냈지만 힘이 빠져 축 처진 남자를 들어 올릴 수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내려다보자 펠릭스의 얼굴이 점점 하얘지고 있었다. 이대로 두었다간 그가 진짜로 죽을 것만 같았다.

    “펠릭스!”

    리첼은 도망가는 대신 펠릭스를 품에 안는 것을 택했다.

    “얼…른 도망…가세요. 쿨럭.”

    펠릭스는 또다시 기침을 하며 피를 토해냈다.

    “저를 대신해 다친 당신을 두고 어떻게 도망가요?”

    “그…럼 제가 당…신을 대신해 다친 의미가 없잖아요.”

    “어차피 도망가더라도 마법 도구가 있는 한 다시 붙잡혔을 거예요.”

    리첼은 반쯤 체념했다. 그에게 말했다시피 힐다에게 마법 도구가 있는 한 도망가도 소용이 없었다.

    “죽더…라도 이…렇게 당신 품 안에서 죽…는 것도 나쁘진 않…네요.”

    피를 흘리는 와중에 펠릭스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 그런 농담하지 마세요.”

    리첼의 눈엔 눈물이 차올랐지만 빠르게 눈을 깜빡이며 눈물을 삼켰다. 재빨리 옷을 찢어 펠릭스가 상처 입은 부위의 상부를 세게 묶었다.

    힐다가 리첼은 죽이더라도 펠릭스는 죽일 것 같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이 죽더라도 레녹스 기사들이 펠릭스를 발견한다면 그는 살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펠릭스에게 어느 정도의 응급 처치가 끝나자 날카로운 칼이 자신의 목 근처에서 번뜩이는 걸 느꼈다.

    “작별 인사는 이제 끝마친 건가? 마지막 배려는 했어. 인사할 시간은 줬으니 고맙게 여기라고.”

    칼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더욱 공포가 밀려왔다. 몸이 떨렸고, 머리가 멍해지는 것만 같았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카일 님과 만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면 살려준다더니 왜 갑자기 나를 죽이려 하지?”

    하지만 리첼은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고 애썼고, 목소리가 나오지 않지만 겨우 입을 벌려 힐다에게 물어보았다.

    지금 죽더라도 갑자기 그녀의 마음이 바뀐 이유와 그렇게 협박을 해도 먹히지 않을 정도로 자신을 죽이려는 이유가 궁금했다.

    “맞아. 죽일 생각은 없었어. 그런데 날 회유하는 척하면서 뒤통수를 쳐? 내가 기절했다 깨어난 순간 결심했어. 두 사람도 죽여버리겠다고 말이야.”

    힐다는 그녀의 기분이 상했다는 이유만으로 리첼뿐만 아니라 펠릭스도 죽이려 하고 있었다.

    ‘레녹스 가문과 메리오너스 가문을 적으로 돌리려 하다니. 무서운 줄도 모르고.’

    리첼은 자신이 죽더라도 레녹스 가문에서 대신 힐다에게 복수를 해줄 거란 생각으로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는 중이었다. 하지만 펠릭스도 죽인다는 힐다의 말 한마디에 두려움은 사라졌다.

    아무 상관 없는 펠릭스마저 죽게 내버려둘 순 없었다.

    ‘혼자 죽진 않을 거야. 같이 죽거나 치명타를 입혀야지 펠릭스 님이 살 확률이 있어.’

    이젠 두려움 대신 오기로 버텼다. 힐다와 함께 죽으면 죽었지 혼자 죽지 않겠다는 각오와 함께 말이다.

    칼에 찔리기 전에 리첼은 반격할 무언가를 찾아야 했다. 힐다에게 부상을 입힌 다음 틈이 생긴 사이 칼을 빼앗아야만 했다.

    리첼은 펠릭스의 몸 아래로 그녀의 손을 숨겼고, 바닥을 이곳저곳 짚으며 날카로운 돌을 찾으려 더듬었다.

    다행히 힐다는 다 잡은 먹이라 생각을 했는지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손에 날카로운 무언가가 잡히자마자 있는 힘껏 힐다의 다리를 향해 찍어 내렸다.

    “꺄아악!”

    갑자기 밀려든 고통에 힐다는 비명을 질렀다.

    리첼은 재빨리 그녀의 눈을 공격하려 했으나 힐다의 손이 빨랐다.

    “주, 죽어!”

    찌른 상처가 깊지 않았는지 힐다는 몸을 순식간에 일으킨 후 리첼을 향해 칼을 내리치려 했다.

    ‘이제 끝이구나.’

    리첼은 그녀를 향해 다가오는 칼을 피할 수 없었기에 모든 걸 내려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두 사람 사이에 커다란 빛이 번뜩였다. 곧이어 힐다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아악. 내 눈!”

    힐다는 괴로운 듯 그녀의 눈을 감싸며 소리치다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

    리첼은 지금 그녀의 눈앞에 일어난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몸이 후들후들 떨리지만 팔을 바닥에 집으며 굳은 몸을 겨우 움직였다. 그런 다음 힐다의 옆으로 기어가 손으로 살짝 그녀의 몸을 흔들어보았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정신을 잃은 건가?”

    리첼은 이번엔 그녀의 발로 힐다의 몸을 마구 흔들어보았다.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다. 역시나 기절한 것 같았다.

    힐다가 눈을 뜨지 못한다는 것을 확인하자 미친 듯이 뛰던 리첼의 심장은 조금씩 안정을 찾기 시작했고, 그제야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리첼의 머리는 갑자기 일어난 상황을 따라가질 못했다. 의아해하며 주변에 번쩍거리는 빛을 바라보자 빛은 점점 작아지더니 그대로 목걸이 안으로 스며들었다. 카일이 그녀에게 준 목걸이였다.

    리첼은 목걸이를 살짝 들어 올려 그 안을 살펴보았다. 그러자 투명하던 보석의 색이 살짝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설마 마법이 걸려있던 목걸이였나?”

    리첼은 카일이 제게 목걸이를 주면서 건넨 말을 떠올렸다.

    ―제 생각이 날 때마다 착용해주십시오

    반농담으로 한 말인지 알았다. 그래서 그냥 우스갯소리로 넘겼는데 목걸이에 방어용 마법이 걸려있을 줄이야.

    ‘중요한 사실을 말해주지도 않고 왜 저렇게 말했던 건지….’

    리첼은 카일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방어 마법이 걸린 목걸이라고 하면 차고 다니지 말라고 해도 알아서 착용하고 다녔을 것이다.

    게다가 진작에 방어용 마법 도구를 가진 걸 알았으면 펠릭스가 다칠 필요도 없었을 것 같았다. 그냥 놔뒀어도 위험한 상황이 발생하면 마법이 알아서 작동할 테니 말이다.

    게다가 여유로운 마음으로 힐다의 말을 받아칠 수도 있을 테고, 목숨이냐 카일이냐 무엇을 선택할지 고민할 필요도 없을 테고, 힐다를 설득시키려 비굴하게 행동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즉, 이렇게까지 상황이 악화되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녀가 매일 목걸이를 차고 다닐 거라고 예상한 것 같았다. 그러자 왠지 모르게 분했다.

    리첼은 잠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견뎌냈다. 카일은 이 모든 상황을 예측하고 목걸이를 건넸을 것 같았다.

    일단은 그 덕분에 일단 목숨을 건질 수 있었으니 고마운 마음으로 분노를 상쇄시키고자 노력했다.

    “하아.”

    마음이 완전히 진정되고 난 후 리첼은 다시 힐다에게로 다가갔다. 눈을 뜨면 큰일이니 확인해야 했다.

    발로 툭툭 건드렸지만 힐다는 깨어나지 못했다. 그만큼 마법의 효과가 강력했던 모양이다.

    리첼은 이때다 싶어 그녀의 몸을 수색했다. 차고 있던 주머니에선 작은 칼 한 자루와 함께 마법 도구 3개가 숨겨져 있었다.

    “역시 도망 안 가길 잘했네. 도망갔다간 또다시 이 도구로 내 시야를 막았을 거 아냐.”

    리첼은 한숨을 쉬며 궁시렁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숲 안에 커다란 빛이 났으니 아마도 그녀를 찾는 레녹스가의 기사들이 이곳으로 찾아올 것 같았다.

    이젠 움직이기도 지쳤고, 힐다를 묶을 끈도 없으니, 기사들이 찾으러 올 때까지 리첼은 힐다의 허리에 앉아 그들을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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