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도 나랑 맞춰 볼래요?-92화 (92/110)
  • 16.

    칼이 목에서 살짝 멀어지는 걸 포착하자마자 재빨리 칼을 잡고 있던 힐다의 손을 이로 세게 깨물었다.

    “꺄아아악!”

    고통스러웠는지 손에서 칼을 놓쳤고, 그 순간 펠릭스가 재빨리 다가와 힐다의 목 뒤를 치곤 기절시켰다. 그리곤 떨어진 칼을 주워 리첼의 몸에 묶인 밧줄을 잘랐다.

    몸이 자유로워지자마자 리첼은 곧바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힐다의 몸을 수색했다.

    혹시라도 또 다른 마법 도구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기에 빼앗아야만 했다. 하지만 이리저리 뒤져보아도 그녀의 몸에선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없어.’

    그렇다면 집 어딘가에 숨겨놨을 가능성도 있었다.

    찾아야 했지만, 그보단 힐다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빨리 도망가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리첼은 펠릭스에게 다급히 말했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해요.”

    고개를 끄덕인 후 그는 리첼의 손목을 잡고 오두막집을 나왔다.

    도망치기 전에 힐다를 끈으로 묶으려 했지만 여유분의 끈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그냥 나와야만 했다. 조금 찜찜한 기분이 들었지만 도망치는 것이 우선이었다.

    숲길은 험했다. 리첼은 치마를 살짝 들어 올려 울퉁불퉁한 길을 얼른 벗어나고자 애를 썼지만, 뾰족한 구두를 신었던 탓에 속도가 나질 않았다.

    신발이라도 벗을까 생각했지만, 나뭇가지와 뿌리들이 어느 곳에 튀어나와 있을지 예상할 수 없기에 다칠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뾰족구두를 신고 최대한 빨리 달려야만 했다.

    “이쪽인 것 같아요. 빨리요!”

    펠릭스가 리첼에게 닦달하듯 다급히 외쳤지만, 그녀의 느린 발걸음때문에 그는 결국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리첼이 그의 손을 잡자마자 갑자기 그들이 지나온 길바닥에 떨어진 나뭇잎 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상함을 느껴 뒤를 돌아본 그 순간 어느새 정신을 차린 힐다가 그들에게 마법 도구를 던지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질 때 노란빛이 나는 것을 보니 지금 던지고 있는 마법 도구는 비아에게 던졌던 연기가 나는 그것 같았다. 마법 도구가 보이지 않아서 찜찜함을 느꼈는데 역시나 오두막집 어딘가에 몰래 마법 도구를 숨겨두었던 모양이다.

    “많이도 준비해 놨네.”

    보아하니 사람의 손길이 닿아야 마법이 작동하는 것 같았다. 줍지 않으면 그 효과는 무용지물이었다.

    리첼은 펠릭스에게 손에 이끌려 최대한 빨리 달려갔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문제가 발생했다. 리첼과 펠릭스 둘 다 돌아가는 길을 몰랐기에 직감에 맡겨 달리다 보니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두 사람보다 길을 잘 알고 있는 힐다가 어느새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

    힐다가 가지고 있던 보석을 그들 앞에 내밀자 빛이 났고, 그 순간 리첼은 강한 빛에 눌려 눈을 뜰 수 없었다.

    어디에서 나타날지는 알 수 없으니 다가오는 그림자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이곳저곳에 팔을 휘둘렀지만 잡히는 건 없었다. 그저 빈 허공을 휘저을 뿐이었다.

    그러다 힐다가 뒤에서 리첼의 목을 붙잡았기에 또다시 붙잡히고 말았다.

    “감히 날 속이고 도망가려 했어?”

    힐다의 손이 리첼의 목을 조르며 분노 섞인 말투로 소리쳤다. 하지만 여리여리한 몸매를 가진 그녀는 리첼보다 힘이 약했다.

    리첼이 몸부림치자 힐다의 몸이 덩달아 흔들렸다.

    ‘지금이야!’

    리첼은 뒤통수로 힐다의 얼굴을 박았다. 상당히 고통을 느꼈는지 리첼의 목을 붙잡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제야 빛 때문에 시야가 가려졌던 눈이 흐릿하게나마 앞이 보였다.

    힐다에게서 벗어난 후 리첼은 흐린 눈으로 펠릭스에게로 달려갔다.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힐다가 또 무슨 짓을 저지르기 전에 얼른 가요.”

    “그래요.”

    힐다 자체는 무섭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가지고 있는 마법 도구가 문제였다.

    하필이면 카일의 스승이 솔로이 제국에까지 와서 힐다에게 도움을 주는 바람에 일이 더 커지고 말았다.

    펠릭스가 검이라도 쓸 줄 알았다면 나았을 텐데 그는 누군가와 싸우는 일에 경험이 많아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지금으로선 도망이 최선이었다.

    도망가려던 그 순간 이번엔 자욱한 연기가 그들 사이를 덮치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눈이 회복되지 않는 상태에서 연기까지 가득하니 리첼은 또다시 앞을 볼 수가 없었다.

    “펠릭스 님 괜…찮아요?”

    “콜록 콜록.”

    대답 대신 펠릭스의 기침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순간 그가 리첼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위험해요!”

    “꺄아아아!”

    펠릭스의 외침과 함께 힐다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리첼은 앞이 보일 때까지 눈을 비볐고, 흐릿한 눈으로 방금 일어난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오두막집에서 칼을 빼앗았다고 생각했는데 힐다의 손엔 또 다른 칼이 들려 있었고, 자욱한 연기가 걷히자마자 펠릭스가 재빨리 힐다의 손목을 쳐서 칼을 떨어뜨린 것 같았다.

    반항했지만 펠릭스의 악력이 더 셌기에 힐다는 계속 그의 손에 붙들린 상태였다.

    리첼이 그들에게 가다가 재빨리 칼을 집으려 했지만, 갑자기 힐다의 손에서 또 다른 빛이 뿜어져 나왔다.

    “으윽.”

    곧이어 펠릭스의 신음 소리가 들려왔고 동시에 리첼은 등 뒤에서 다가오는 힐다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도대체 마법 도구가 몇 개야?”

    아직도 마법 도구가 남았다고 생각하니 이젠 짜증이 밀려왔다.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마법 도구가 남아있는 한 모두 말짱 꽝이었다.

    리첼은 힐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흐릿한 시야에 의존하며 빨리 걸으려고 애썼지만 귓가에 바스락거리는 낙엽이 밟히는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렸다. 힐다가 거리를 좁혀 오는 것 같았다.

    “네가 뭐라고. 감히!”

    뒤를 돌아보니 조금만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힐다가 칼을 쥐고 다가오고 있었다.

    “나를 죽이는 건 괜찮은데 이건 알아둬. 내가 죽으면 네가 죽는다고 모든 게 끝나는 게 아니야.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받을 수도 있어. 네가 지금 저지른 일에 대한 책임을 질 각오를 해야 할 거야.”

    더 이상의 회유는 안 통한 것을 알기에 리첼은 어쩔 수 없이 힐다에게 최후의 협박을 해야만 했다.

    “상관없어. 어차피 네가 죽으면 모든 게 끝날 텐데.”

    하지만 힐다에겐 이마저도 통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내가 죽으면 넌 곱게 죽지 못할 거야. 그거 하난 명심해둬. 레녹스가에서 네가 편히 죽는 걸 지켜볼 것만 같아? 날 죽이고 네가 바로 그 옆에서 죽어야 네 삶이 가장 편안한 죽음이라고 생각하면 될 거야.”

    그래도 리첼은 마지막까지 협박했다. 힐다가 레녹스가의 무서움을 알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말이다.

    “까짓것 못 죽을 것 같아? 내가 너 때문에 어떤 지옥 속에서 살아왔는데? 내가 신전에서 어떤 꼴을 당했는지 알아?”

    여전히 힐다는 리첼이 말하는 협박의 의미를 모르는 눈치였다.

    신전에서 봉사 300시간이 무슨 지옥이라고…. 그녀는 진짜 지옥을 모르는 것 같았다.

    결국 리첼은 힐다에게 손목을 붙잡히고 말았다. 하필이면 붙잡히고 나서야 시력이 제대로 돌아왔다.

    앞이 뚜렷이 보이자마자 리첼의 시야엔 제 분에 못이긴 힐다가 그녀를 향해 칼을 내리치려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를 발로 차려는 순간 그 뒤에 그림자가 드리워지더니 펠릭스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힐다의 손목을 또다시 내리쳤다. 탁, 소리를 내며 칼이 바닥에 떨어졌다.

    다행히 리첼에게 맞지 않았으나 칼은 펠릭스의 다리에 닿고 떨어지고 말았다.

    “괜찮아요?”

    리첼이 다리에 흐르는 피를 확인하곤 걱정스러운 마음에서 물었다.

    “괜찮아요. 살짝 스친 것뿐이에요.”

    스쳤다고 하기엔 상당히 깊이 베였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힐다의 두 손을 잡아 그녀가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하려 했다.

    “!”

    하지만 갑자기 펠릭스의 눈동자에 초점이 흐려지더니 잠시 후 입안에서 무언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힘이 빠졌는지 힐다를 잡은 손을 놓고 그대로 입안에서 올라오는 것을 쏟아냈다. 피였다.

    “에이. 튀었잖아.”

    힐다의 머리카락에도 피가 묻자 그녀는 짜증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깊은 상처가 아니었는데 입에서 피가 나다니…?

    “서, 설마 칼에 독을 묻힌 거야?”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힐다가 진짜로 그녀를 죽이려 했다는 두려움과 펠릭스가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가 밀려들었다.

    “아깝네.”

    그러자 힐다는 정말로 아쉬운 듯한 눈길을 보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