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도 나랑 맞춰 볼래요?-91화 (91/110)
  • 16.

    “원하는 게 뭐야?”

    일단 리첼은 힐다의 비위를 거스르는 일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시는 카일 님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고 솔레아 신께 맹세를 드려.”

    ‘싫은데….’

    하필 리첼이 들어주기 곤란한 걸 힐다가 요구했다. 신께 맹세했다간 약속을 어길 수도 없었다.

    잠시 머뭇거리자 힐다가 또다시 칼을 얼굴 가까이에 들이밀었다.

    “어서 맹세해!”

    들어줄 수 없는 요구였기에 리첼은 일단 시간을 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기사들이 그녀를 찾을 수 있을 때까지만이라도.

    “카일 님은 바쁘셔서 요새 얼굴 보지도 못하는데 내가 카일 님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맹세한다고 달라질까? 어차피 바빠서 네 얼굴도 못 볼 텐데?”

    리첼은 힐다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녀도 요새 카일의 얼굴을 제대로 본 지 꽤 되었기에 거짓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힐다는 더욱 화가 난 것 같았다.

    “카일 님이 바쁘다는 거 네가 어떻게 알아?”

    “시, 신전에 있을 때도 느꼈을 거 아냐. 카일 님의 얼굴을 보러오는 여인들이 많다는 걸 말이야. 그러니 지금도 많겠지. 요새 다들 카일 님의 얼굴을 볼 수 없다고 연회장에서 하소연하는 소리를 들었어.”

    리첼은 그녀가 실제 연회장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대충 핑계를 댔다. 말 실수를 했으니 잘 넘어가야 했다.

    “사실이야?”

    힐다가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물었다. 리첼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는 잠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진짜로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카일 님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고?”

    힐다는 고개를 갸웃하며 재차 물었다. 리첼은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힐다의 입가에 미소가 살짝 걸렸다.

    조금은 넘어간 것 같아 안심하려 했지만 입가의 미소는 어느새 사라졌고, 또다시 싸늘한 시선이 느껴졌다.

    “시간 끌려는 수작인 거 누가 모를 줄 알아?”

    그동안 바보 같은 짓을 많이 했기에 말만 잘하면 넘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보아하니 목숨까지 위협할 것 같았다. 계획이 실패한 것 같자 등줄기에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오두막 문이 열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는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혹시 노인이 마음을 다시 바꾸고 돌아와서 자신을 풀어주려고 왔다고 생각했지만, 눈앞에 보이는 건 의외의 인물이었다.

    “페, 펠릭스 님?”

    리첼은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소리쳤다. 반가움을 느끼면서도 의아함을 느꼈다.

    어떻게 그가 레녹스 기사단보다 빨리 그녀가 있는 곳을 찾아올 수 있단 말인가? 눈앞에 펠릭스의 모습을 보면서도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리첼 양! 괜찮아요?”

    “가까이 오지 마!”

    펠릭스가 걱정스러운 발걸음으로 리첼에게 다가오려다 이내 멈칫했다. 힐다의 싸늘한 시선이 그를 향했다.

    “여, 여길 어떻게 왔어요?”

    힐다의 눈치를 보며 리첼이 물었다.

    “우리가 자주 마주치는 디저트 가게 앞에서 우연히 리첼 양을 업고 가는 힐다 양의 모습이 목격했는데 너무 이상해 보여서 그래서 따라와 봤어요.”

    이 상황에서조차 마주치다니…. 펠릭스의 얼굴을 보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간에 길이 험해서 놓칠 뻔했는데, 갑자기 어떤 노인이 급하게 달려가는 모습을 보곤 혹시나 해서 그가 왔던 방향을 따라왔어요.”

    펠릭스는 때마침 카일의 스승이 도망가는 모습을 본 듯했다.

    얼마 전 그에게 상처를 주어 미안했건만 그녀가 위험한 것을 눈치채곤 이렇게 달려와 준 걸 보니 고마움이 느껴져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만 같았다.

    “대화는 그쯤 하시지?”

    대화가 오고가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여전히 리첼의 목에 위협을 가하며 힐다가 소리쳤다.

    “힐다 양! 지금 당신이 하는 행동은 옳지 않아요. 그러니 얼른 그 칼을 손에서 내려놔요.”

    “시끄러워!”

    펠릭스는 설득하려 소리쳤지만 그녀는 그의 말을 듣기 귀찮다는 듯 짜증을 냈다.

    “리첼 양의 몸에 상처라도 났다간 당신은 무사하지 못할 거예요. 내 말 듣고 부디 생각을 바꿔요. 당신이 생각을 바꾼다면 리첼 양도 이 이상 책임을 물지 않을 거예요. 그렇죠?”

    하지만 펠릭스는 힐다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게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그는 그녀에게 손바닥을 뻗어 보이며 천천히 리첼이 있는 방향으로 한 걸음씩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맞…아.”

    리첼은 일단 가볍게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힐다가 그녀에게 무례하게 대한 건 용서할 생각은 없었지만, 지금 당장 풀어만 준다면 협박한 죄를 묻지 않을 생각은 있었다.

    힐다는 흐린 눈으로 리첼을 흘겨보더니 이내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힐다 양이 귀족들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은데, 레녹스가를 적으로 돌려선 안 돼요. 귀족들도 건들 수 없는 가문이에요. 그러니 제발 리첼 양을 풀어줘요.”

    “내가 왜 그래야 하는 거죠?”

    힐다는 펠릭스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짜증을 냈다.

    “이건 다 힐다 양을 위해서 하는 소리예요.”

    “나를 위해서라고요?”

    힐다는 잠시 아무 말 없이 리첼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바라보았고, 그들 사이에 긴장된 침묵이 흘렀다.

    “…알았어. 그렇다면 내가 아까 말한 카일 님을 앞으로 만나지 않겠다는 맹세만 해준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풀어주지.”

    잠시 생각하던 힐다는 한 발 양보했다.

    싫은데.

    하필이면 가장 곤란한 걸 자꾸만 조건으로 내밀었다. 대답을 잘못했다간 칼이 목을 그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리첼은 지금 이 자리에서 목숨이냐, 맹세냐 결정해야 했다. 입안이 바짝 말라오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난….”

    입술을 꽉 깨문 후 입을 열려던 그 순간 펠릭스가 리첼의 말을 가로챘다.

    “힐다 양. 카일 영식의 마음을 얻고 싶어서 지금 이런 짓을 벌이는 건 잘 알겠어요. 하지만 내가 볼 땐 리첼 양에게 무언가 요구하기보다는 힐다 양이 그를 만나는 게 먼저인 것 같아요.”

    그의 말을 들은 힐다의 눈동자가 잠시 떨렸다.

    “…카일 님이 신전을 나가고 난 후 얼…굴을 본 적이 없는 걸요….”

    잠시 망설이던 그녀의 말투가 갑자기 조심스러워졌다. 펠릭스의 부드럽고도 상냥한 말투에 잠시 마음이 약해진 모양이다.

    “당연하죠. 그는 요새 바쁘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다른 영애들도 그의 얼굴을 보기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걸 들었거든요.”

    좀 전에 리첼이 한 말과 펠릭스의 말이 일치하자 힐다의 눈동자가 또다시 흔들렸다.

    “지… 진짜로 바쁘다고요? 카일 님이요?”

    그러더니 힐다의 눈시울이 갑자기 촉촉해졌다.

    카일이 그녀를 피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것 같았다. 그건 사실이지만 리첼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네. 내가 그를 만나게 해줄게요. 약속해요.”

    “정말 만나게 해줄 수 있어요? 얼굴 못 본 지 너무 오래되었단 말이에요.”

    힐다의 눈에선 눈물이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솔레아 신께 맹세하라면 지금 당장 맹세할게요. 그러니 그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분풀이를 관계도 없는 사람에게 하지 말고 직접 그와 만나요. 만나서 당신의 마음을 말해요.”

    “아뇨. 그는 내가 마음을 밝힐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어도 끝내 그의 마음을 모두 앞에서 말하지 않았어요!”

    펠릭스의 말 중에 기분을 상하게 하는 무언가를 건드렸는지, 잠시 슬픔이 깃든 힐다의 눈동자 속엔 갑자기 분노가 차올랐다.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면 진심으로 다가가야 해요. 힐다 양. 당신은 상대방의 감정을 생각도 하지 않고 너무 자신의 감정만 강요하고 있어요.”

    “입 닥쳐요. 당신이 뭔데 내게 그런 소리를 하죠? 당신이나 잘해요. 여자 마음 하나 빼앗지도 못한 주제에 누가 누구에게 훈계질이에요?”

    “당신과 나는 같은 입장이니깐 나는 당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요.”

    리첼은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격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당신은 짝사랑이고 난 아니에요.”

    곁눈질로 힐다를 바라보니 살짝 동요한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발견했다. 시야가 흐려진 것 같았다.

    ‘지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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