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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나랑 맞춰 볼래요?-88화 (88/110)
  • 15.

    그는 리첼의 팔을 붙잡고 그대로 자신의 방향으로 끌어당겼다.

    “미친 새끼! 역시 소문과는 다른 남자였어. 내 생각이 맞았어.”

    펠릭스는 카일을 노려보았다.

    “뭐? 상냥하고, 다정하고, 예의 바르다고? 다 거짓말이에요. 리첼 양. 당신은 속고 있다고요. 저 남자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남자가 아니란 말이에요. 지금도 보세요. 당신의 감정과 상관없이 제멋대로 행동하려고 하잖아요.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지려면 뭐든 할 남자라고요!”

    펠릭스는 카일의 자존심을 긁는 모욕적인 말을 했으나 카일의 입가엔 여전히 여유 있는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는 경고하듯이 당신에게 키스 마크까지 남긴 자란 말이에요! 남의 시선 따윈 중요하지도 않다는 이기적인 남자라고요!”

    아무리 펠릭스가 카일을 깎아내리려고 해도 이미 승부는 결정이 나 있었다. 승자는 카일이었고, 패자는 펠릭스였다.

    “당신이 상관할 바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지금 내 여자를 뺏기게 생겼는데 상관 안 하게 생겼어요? 지금도 보세요. 제 말에 부정하지 않잖아요. 그러니 리첼 양 다시 잘 생각해 보세요. 네?”

    펠릭스가 애절한 눈빛으로 리첼을 바라보며 말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죄송해요. 전 다 알고 있어요.”

    힐다의 말에 희망을 품고 레녹스가를 찾아온 남자는 리첼에게 마지막으로 매달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을 돌리는 건 부질없는 소망일 뿐이었다. 리첼의 한마디에 그의 마지막 발악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다.

    펠릭스는 억장이 무너지는 듯 보였다. 다리에 힘이 풀린 그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역시 나와 먼저 잤으면 당신의 마음이 달라졌을까요?”

    펠릭스의 입에선 아쉬운 탄식조의 한탄이 흘러나왔다.

    “그랬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지금은 제 마음이 확고해서 변할 것 같지 않아요.”

    사실 리첼은 아까 펠릭스와 닿았을 때 느꼈다. 그와 먼저 잤어도 마음이 달라지지 않았을 거라고. 하지만 그에게 거짓말했다.

    “당신은 잔인한 사람이에요.”

    거짓말을 눈치챘는지 펠릭스는 씁쓸한 미소와 함께 그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 순간 주머니에 안에서 빠져나와 그 끝에 걸려있던 목걸이가 그만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로켓 목걸이였다.

    목걸이가 바닥에 떨어지며 그 문이 열렸고, 겉 문양이 보이는 방향으로 바닥에 떨어졌다. 리첼은 떨어진 목걸이를 집으려 몸을 숙였다.

    “그, 그대로 내버려 두세요!”

    그 순간 펠릭스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행동이 뭔가 수상했다. 꼭 리첼이 봐선 안 될 것 같은 뉘앙스였다.

    ‘대체 뭐가 있길래?’

    리첼은 펠릭스의 목소리에 잠시 멈칫했지만, 그 순간 그의 부탁보다 그녀의 궁금증이 더 컸다.

    리첼이 목걸이를 잡으려던 순간 펠릭스가 손을 뻗었다. 그래서 목걸이 안을 확인하지 못할 것 같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카일의 손이 제일 빨랐다.

    카일은 목걸이를 들고 뒤집었고, 먼저 그림을 보았다. 잘 정돈된 검은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무덤덤한 표정일 줄 알았는데 그의 표정 변화에 리첼의 호기심이 발동했다. 리첼은 카일의 손에 있는 목걸이를 낚아채고 그 안을 확인했고, 놀랐다.

    “!”

    사진 속엔 파란 머리에 보랏빛 눈동자를 지닌 여성의 그림이 들어 있었다. 리첼과 닮은, 그리고 리첼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베스 언니?”

    리첼이 소리친 그 순간 이번엔 펠릭스가 그녀의 손에 있는 목걸이를 재빠르게 낚아챘다.

    “보지 말라고 외쳤건만 결국 보셨네요.”

    펠릭스에게선 딱딱한 목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달라진 말투와 목소리에 리첼은 당황했다.

    그녀는 지금 상황을 되짚어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3년 전에 사망한 친척이었다.

    그러고 보니 신전에서 들은 적이 있었다. 펠릭스가 잊지 못할 만큼 사랑했던 여인이 있었다고. 그래서 그 여인을 잊기 위해 이 여자 저 여자 방황하며 만났다는 사실을 말이다.

    목걸이 속에 그녀의 그림을 넣고 매일 가지고 다닐 만큼 펠릭스에게 특별한 여인.

    순간 리첼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렸다. 엘리자베스와 리첼은 친자매라 할 정도로 똑 닮았다는 이야기를 듣곤 했다. 그녀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에 가문 사람들이 리첼을 보며 위로로 삼을 정도였다.

    리첼은 처음에 펠릭스가 그녀를 무시했던 일을 떠올렸다. 비밀 클럽에서 그에게 다가가던 그녀를 무시하고 다른 여인에게 갔었다.

    그때 펠릭스가 그녀의 얼굴을 보고 놀라 잠시 멈칫하기도 했던 것 같았다.

    “혹시 비밀 클럽에서 제 얼굴을 보곤 일부러 무시한 일 기억나세요?”

    “…네. 사실 베스와 닮은 얼굴을 보곤 당신을 피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자주 마주쳤기에 운명이라고 느꼈지요.”

    펠릭스는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그의 눈빛이 가끔은 먼 곳을 바라보는 것을 느끼긴 했다. 리첼은 그럴 때마다 자신의 착각이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건 그녀의 착각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일단 내 말 좀 들어봐요.”

    펠릭스는 억울하다는 듯 리첼에게 매달렸다.

    “설마 제게서 베스 언니의 모습을 겹쳐 보았던 건가요? 당신이 사랑하는 여인을 잃고 바람둥이가 되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어요. 그 사랑하는 여인이 베스 언니 맞나요?”

    리첼은 찝찝한 기분을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제가 정말로 사랑했던 여인은 베스가 맞습니다. 하지만 그녀와는 별도로 제가 당신에게 끌렸다는 그 사실만은 부정하지 말아 주세요.”

    펠릭스가 애원하듯 말했다.

    * * *

    펠릭스가 돌아가고 나서도 리첼의 마음속에서는 계속 불편한 감정이 파도쳤다.

    처음에 펠릭스와 함께 있을 때, 목걸이의 색이 변한 걸 알았을 때 들었던 들떴던 마음이 부질없어진 것만 같았다.

    그와 함께 했던 기억들이 거짓 같아졌다. 리첼을 향한 미소와 달콤한 말들은 모두 그녀가 아닌 베스 언니에게 한 것만 같았다.

    목걸이를 핑계로 그에게 이끌렸던 그녀가 어쩐지 바보 같아졌다.

    ‘그래. 그래서 내가 펠릭스 님에게 덜 끌렸던 걸지도 모르지.’

    동시에 목걸이 색이 변한 건 두 사람인데 왜 카일에게 더 끌렸는지 이제야 알 것도 같았다.

    몸에서 아무리 끌려도 마음이 뒤따르지 않으면 그 관계가 오래 지속되기 어려우니 말이다.

    다만 그래도 여전히 리첼의 마음속엔 찜찜함이 남았다. 그녀가 처음엔 펠릭스를 싫어했을지 몰라도 지금까진 그녀에게 좋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녀에게 좋은 사람이라고 기억하고 싶었으나 이젠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앞으로 종종 마주칠 텐데 껄끄러운 기분으로 그를 보긴 싫었다. 하지만 펠릭스의 입장에서도 리첼은 그를 찬 여자이기에 얼굴 보기 껄끄러울 것이다.

    ‘인간관계란 참 어렵구나.’

    누군가에게 나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서로가 껄끄러운 건 피차일반일 테니 찜찜한 기분을 떨쳐내야 해.’

    리첼은 이미 카일을 선택했기에 펠릭스에게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져선 안 된다. 그에게 신경 쓰이는 것 자체가 카일에겐 실례였다.

    ‘이렇게 정리하는 게 맞겠지?’

    어차피 끝이 아름다울 거라 생각하지 않았기에 리첼은 이대로 펠릭스와 끝내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언제까지 과거에 얽매여 사는 남자에 대한 생각을 하실 겁니까?”

    목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소파에 앉아있던 카일은 언짢은 듯한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펠릭스 님과 진작 정리했어야 했는데 질질 끌어서 괜히 당신에게 안 좋은 모습만 보인 것 같아요. 미안해요.”

    리첼은 펠릭스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현재 카일이 함께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걸 깨닫자 그에게 미안함을 느껴졌다.

    “그 정도야 저는 괜찮습니다. 다만 그 흔적은 마음에 들지 않는군요.”

    그의 시선은 리첼의 쇄골 바로 밑에 있는 키스 마크에 멈춰있었다.

    카일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는 리첼의 손을 잡고 가까이로 끌어당겼고, 리첼은 어느새 그의 품 안에 안겨 있었다.

    카일은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두른 후 그녀의 등을 그의 가슴 안으로 포근히 감싸 안았다.

    그대로 그녀의 몸을 맡기자 그의 입술이 펠릭스가 남겼던 흔적에 닿았다.

    펠릭스의 흔적을 없애고 다시 그의 것으로 뒤덮는 것처럼 거세게 빨자 펠릭스에겐 느끼지 못한 미묘한 떨림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질투가 섞인 그의 강한 입술은 달콤한 말보다 더한 감미로운 전율이 온몸에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카일의 입술이 떨어진 후 리첼은 곧장 서랍장 안에 있는 거울을 꺼내 흔적이 남은 목 주변을 살펴보았다. 쇄골 부위엔 붉다 못해 퍼레진 장미가 피어 있었다.

    ‘어떻게 가리고 다녀야 하지?’

    오늘 남긴 흔적이 사라지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만 같았다. 리첼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카일에게 눈을 흘겼다.

    “전 더 마음에 듭니다만?”

    하지만 그는 그녀의 시선을 모르는 체하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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