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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나랑 맞춰 볼래요?-85화 (85/110)
  • 15.

    “똑바로 안 닦을 거야?”

    심술궂게 생긴 영애가 힐다에게 소리쳤다.

    “제, 제대로 닦을게요.”

    힐다는 소리 지른 영애의 눈치를 살피며 열심히 구두를 닦았다.

    뾰족구두로 얼마나 발에 치였던지 그녀의 몸은 온통 멍투성이였다.

    ‘언제까지 이 일을 해야 해?’

    봉사 300시간은 힐다에게 너무 길었다. 하루 10시간씩 구두를 닦아야 했으니 그녀는 대략 30일 동안 이 짓을 계속해야 했다.

    더 황당한 건 성직자라는 사람들이 그녀의 상처를 모른 척한다는 것이었다.

    매일 늘어나는 멍을 보면 이유를 물어볼 만도 한데 사제나 기사 그 누구도 그녀에게 멍이 왜 생기고,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지 물어보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성녀였을 때 그렇게 잘해줬던 대신관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더 이상은 못 참아.”

    리첼은 구두를 닦으러 오는 사람이 없자 들고 있던 수건을 바닥에 내던졌다.

    매일매일 영애들의 괴롭힘에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그녀는 그 스트레스를 풀 곳이 없었다.

    카일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마주한다면 스트레스가 풀릴 것도 같았지만 그의 얼굴을 도통 볼 수 없으니 지금의 생활을 견디기 너무 힘들었다.

    신전 밖으로 도망가고 싶었지만, 그녀가 만든 구멍은 걸리자마자 그날 바로 막혀버렸다.

    그래서 힐다가 신전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은 딱 한 가지, 봉사 시간을 모두 채우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이젠 힐다에겐 그때까지 버틸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또다시 어릴 적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해야만 했다.

    다만 약 사건은 비밀로 하라고 그렇게 당부했건만 그가 공녀에게 폭로한 것이 마음에 걸렀다.

    증거는 없지만, 힐다의 촉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일이 잘못되었다간 또다시 입을 가벼이 놀릴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믿어야 해? 말아야 해?”

    힐다는 잠시 고민했지만 어쩔 수 없이 친구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녀는 그 말고는 부탁할 사람이 없었다.

    쉬는 시간에 잠시 힐다는 신전을 둘러보았다.

    성기사가 그녀를 감시하느라 따라붙어서 자유롭진 않았지만 친구를 만나기엔 최악의 조건은 아니었다.

    워낙 신전에 드나드는 사람이 많으니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 행동하면 되었다.

    게다가 돈 걱정도 아직 할 필요는 없었다. 다행히 힐다가 이전에 신전 기부금에 손대고 있던 사실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이젠 성녀가 아니라서 힘들어졌지만 이전에 빼돌린 금액이 꽤 많아서 괜찮았다.

    멀리서 친구의 얼굴이 보이자 스쳐 지나가는 척하며 그의 손에 돈과 쪽지 하나를 건넸다.

    <신전 안에 소란을 피울 것> 힐다가 원하는 건 이것 하나였다.

    “설마 임신한 건 아니겠지?”

    오랜만에 만나서 건넨 첫마디는 여전히 신경을 거슬렸지만 지금은 그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인성은 좋지 않더라도 그는 돈만 있으면 들어줄 것이다. 그러니 힐다는 친구를 믿고 기다려야 했다.

    며칠 뒤 신전 안에 연기가 나는 걸 봤다. 성녀로 들어온 후 한 번도 본 적 없기에 힐다는 친구가 신전 안으로 불씨를 던진 것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신전 안에서 큰불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계획은 실패했다.

    며칠 뒤 힐다의 친구는 또다시 신전 안으로 불씨를 던졌다. 하지만 역시나 큰불로 이어지지 않았다.

    ‘설마 카일 님이 마법으로 뭔가를 한 걸까?’

    힐다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아! 그 사람을 만나야 해.’

    힐다는 자신의 친구에게 얼마 전 신전 앞에서 우연히 마주친 그 사람을 찾아내라고 시켰다.

    친구는 다행히 그 사람을 찾았는지 세 번째 시도엔 신전 안에 빛이 번쩍이며 불이 붙었다.

    ‘성공이야.’

    큰불은 아니었지만 시선 끌 정도는 되었다.

    곳곳에 연기가 나자 힐다를 감시하던 기사들이 불씨를 끄러 갔고, 힐다는 그들의 눈을 피해 도망갈 수 있었다.

    신전 안에 불이 나자 순식간에 혼잡해졌다.

    그녀는 손으로 입을 막으며 출구를 찾기 시작했다. 신전 안에 혼란을 주는 건 괜찮은데 연기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는 것도 문제였다.

    여기저기 헤매던 중 힐다는 얼굴을 본 적은 없지만 누군지는 알 것 같은 붉은 머리색의 남자를 마주쳤다.

    처음엔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계속 뚫어지게 쳐다보니 그가 누군지 떠올랐고, 곧바로 그를 붙잡았다.

    계획은 모두 어긋났지만 카일과 리첼의 사이에 작은 금이라도 만들 수 있는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모든 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에게 주문의 말을 알려주었다. 리첼과 카일의 사이가 멀어지길 바라면서 말이다.

    힐다는 그에게 몇 가지 사실을 알려주며 유유히 신전을 빠져나갔다.

    * * *

    펠릭스가 오랜만에 비장한 표정으로 리첼을 찾아왔다.

    그제야 아직 펠릭스와의 일이 완전히 마무리되지 않은 걸 깨달았다.

    요즘 행복에 겨워 펠릭스에 대한 일은 완전히 까먹은 탓이었다.

    “미쳤나 봐.”

    펠릭스의 방문 소식에 리첼은 자신의 머리를 콩콩 때렸다.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아가씨는 정리하려는데 상대가 질척거리는 것이니까요.”

    다행히 비아가 리첼의 편을 들어주었다. 펠릭스에게 질척이란 단어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어쨌든 이번에야말로 펠릭스를 완전히 정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왔어요? 앉으세요.”

    리첼은 어색한 미소와 함께 응접실에 온 펠릭스를 반겼다. 그녀의 미소를 보자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젠 제게 환한 미소도 보이지 않으시는군요.”

    펠릭스는 이미 리첼의 마음을 눈치챈 듯했다. 하긴. 여러 번 말했는데 모를 리는 없었다.

    “저에 대한 마음은 정말 고마운데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당신의 마음을 받을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렇군요.”

    단호한 말에 상처받을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그의 반응은 담담했다. 울거나 상처 입은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감에 차 있는 표정이었다.

    비아가 차를 따르고 방을 나간 후 문을 닫았고, 펠릭스는 문이 완전히 닫히는지 확인한 후 깊은 숨을 내쉬었다. 마치 비장한 각오를 한 사람 같았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리 뜸을 들이지?’

    리첼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그의 입에선 예상치도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나랑 한번 자는 건 어때요?”

    “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리첼은 사고회로가 마비된 것 같았다. 순간 그녀가 잘못 들었을 거란 생각을 했다.

    “내게 하룻밤의 시간을 내줘요. 그러면 당신에게 황홀한 밤을 보내게 해줄게요.”

    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펠릭스는 또다시 말했다.

    “….”

    리첼은 대답할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그녀에게 함부로 대한 적이 없는데 갑자기 저런 말을 하니 예전의 바람둥이 기질이 돌아온 건가 싶기도 했다.

    “그동안 아쉬워했었잖아요. 그러니 나랑 한번 하자고요. 그럼 마음이 바뀔 테니까요.”

    하지만 펠릭스는 그녀가 그의 말을 들어줄 거란 확신에 차 있었다.

    ‘아쉬워했다니.’

    리첼이 솔직히 그런 감정을 느낀 적도 있었다. 사실 지금도 카일과 펠릭스 두 사람이 뭐가 다를지, 그리고 누가 더 짜릿한 감각을 줄지 궁금하긴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미 마음이 카일에게 기운 이상 흔들릴 수 없었다.

    “그럴 수 없어요.”

    리첼이 단호히 말했다.

    확실히 선을 그어야만 했다. 정리하지 않는다면 그에게 자꾸 끌려다닐 것이다. 그러니 이대로 흐지부지 넘어갈 순 없었다.

    “아뇨. 나랑 진짜 한 번만 한다면 생각이 달라질 거예요.”

    리첼은 그를 피해 문밖으로 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녀보단 펠릭스의 손이 빨랐다. 순식간에 손목이 붙잡혔다.

    “나 그거 잘해요. 우린 환상의 궁합일 거예요. 제가 확신하죠.”

    “네?”

    “나 잘한다고요. 그러니 나만 믿고 내 말대로 해줘요. 당신을 만족시켜줄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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