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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나랑 맞춰 볼래요?-80화 (80/110)
  • 13.

    소식을 들은 스펜서 후작이 카일을 불렀다.

    “네가 성녀와 엮이는 걸 죽어도 싫어하니 내가 대신 죽여도 되겠느냐?”

    후작도 분노하며 치를 떨었다. 스펜서가에 불명예를 안겨주려는 성녀를 그냥 둘 순 없을 터였다.

    “그녀가 죽어도 이미 퍼진 소문은 잠재울 수 없습니다. 일단 그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는 걸 밝히는 것이 먼저입니다.”

    “마법을 배워왔다더니 대체 이럴 땐 도움이 되지 않는 게냐?”

    후작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이미 자백하는 약은 만들었습니다. 다만 그녀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몰라서 조심스럽게 지켜보고 있을 뿐입니다.”

    “혹시 그녀에게 약점이라도 잡힌 것이 있느냐?”

    “….”

    후작의 물음에 카일은 대답할 수 없었다. 성녀가 자신에 대해 어떤 말을 떠벌리고 다녀도 괜찮았다.

    다만 성녀의 입에서 리첼의 이름이 나올까 봐 걱정이었다. 괜히 그 때문에 그녀가 피해를 보는 것 같았다.

    이미 여러 가지 소문으로 리첼이 많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린 걸 카일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만이라도 엮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약점이 있기는 한 모양이구나. 일단 그 일은 네게 맡기마. 하지만 신전엔 성녀의 교육 부족에 대해, 그리고 우리 가문의 명예를 실추한 것에 대해선 항의 서신을 보낼 게야.”

    “그렇게 하십시오.”

    “기부금을 줄이든지 해야지 나, 원 참.”

    카일은 겉으론 무덤덤한 표정을 지으며 후작의 혼잣말을 무시한 채 서재에서 나왔다.

    성녀의 교육 담당은 카일이었다. 결국 그의 능력 부족 때문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 같았다.

    ‘모든 걸 안일하게 생각한 내 탓인가?’

    성녀가 평소 헛소리를 했지만 이렇게까지 심한 정신병 환자일 줄 꿈에도 몰랐다.

    이 또한 성녀에 대한 그의 무관심 때문에 더 커진 셈이었다.

    ‘타인에 대한 무관심 때문이라…. 결국 난 자업자득인 건가?’

    그는 큰 한숨을 내쉬었다.

    이후 상황은 더욱 최악으로 치달을 뻔했으나, 일단 리첼 덕분에 그럭저럭 넘어가긴 했다. 다만 그녀에 대한 소문은 멀리멀리 퍼져나갔다.

    사건 이후 매번 신도들에게서 리첼의 이름이 강제로 들려왔다. 가끔 리첼과 어떤 관계냐고 카일에게 직접 묻는 영애들도 있었지만,

    “제게 도움을 주신 고마우신 분입니다.”

    카일은 이렇게밖에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입을 잘못 놀렸다간 더 큰 소문이 퍼질 것 같아서였다.

    * * *

    “여기가 자네의 방인가?”

    갑자기 레녹스 공작이 카일을 만나기 위해 신전에 직접 찾아왔다.

    “그렇습니다.”

    그는 카일의 방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여기 자네가 만든 물품들이 많구만. 자네의 물품을 받았으니 신전은 내 덕을 많이 봤어. 횡재했군그래.”

    “저도 신전에서 많은 도움을 받아서 괜찮습니다.

    “그래. 내가 갑자기 찾아온 이유는 대충 예상하고 있겠지?”

    레녹스 공작이 곁눈질로 바라보며 물었다.

    “네. 생각했던 것보다 일이 빨리 진행되고 있나 봅니다.”

    “그래. 황제 폐하께서도 갑자기 자네에게 큰 관심을 보이시기 시작했네. 예상보다 일이 더 빨리 진행될 줄 몰랐네. 적절한 시기에 사제를 그만두다니 자네 혹시 예지력도 있나?”

    “그런 능력까진 없습니다.”

    “아쉽군.”

    레녹스 공작은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아쉬운 눈치였다. 그런 능력이 있다면 또 어떤 이상한 의뢰를 했을지…. 카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앞으론 레녹스가로 오게나. 자네의 힘이 되어줄 자들과 앞으로의 일을 의논하는 게 좋을 듯싶네. 아직까진 반대하는 자들이 많아서 힘들 테지만 황제 폐하께서 마법에 대한 경계심이 줄었으니 자네를 궁정 마법사로서 인정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을 걸세.”

    “네. 알겠습니다.”

    카일은 레녹스 공작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어느덧 사제로서 있는 마지막 날이 되었다.

    “정말 아쉽습니다. 조금 더 사제로서 신전에 도움이 되면 좋았을 것을.”

    대신관은 섭섭한 눈빛으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저도 아쉽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도 도움 드릴 수 있는 건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렇다면 저희야 감사할 따름입니다.”

    카일이 신전에 사제로 머무는 동안 그는 마법이 깃든 물건들을 신전에 기부했고, 신전에서 요긴하게 쓰였다.

    룩스 대륙에선 스승이 돈 받고 팔던 것들이지만 그에겐 큰 금액이 아니었기에 기부형식으로 신전에 기증한 것이다.

    “제가 성녀를 잘못 택해 카일 사제님에게 피해만 입혔습니다.”

    “괜찮습니다. 대신관님의 믿음을 저버린 건 힐다 양이지 대신관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제가 더 미안하군요.”

    대신관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제 물품을 모두 정리하고 내일 아침에 일찍 떠나겠습니다. 힐다 양을 제 시야에서 보이지 않게 한 점 감사드립니다.”

    사건 이후부터 카일이 신전을 떠나는 날까지 근처에 힐다가 다가오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한 상태였다. 대신관의 마지막 배려였다.

    “제가 사제님께 해드릴 수 있는 마지막 사죄였습니다.”

    대신관은 미안한 마음이 가득해 보였지만 힐다가 보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카일은 숨통이 트이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신전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 리첼을 초대했다. 그가 힘들 때마다 바라보았던 아름다운 밤하늘을 함께 보고 싶어서였다.

    하늘도 그를 도왔는지 마지막으로 사제로 있던 날 하늘의 별은 유난히도 밝고 아름다웠다.

    앞으로 레녹스가에서 리첼을 자주 볼 수 있을 것 같지만 카일은 일부러 내색하지 않았다. 아쉬운 듯한 리첼의 표정을 보면서 그는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아야만 했다. 그녀가 또 어떤 엉뚱한 행동을 할지 기대가 되기도 했다.

    “글쎄요?”

    그래서 카일은 리첼에게 다음 기약은 없이 애매한 답변만 했다.

    점점 울 것 같은 표정이 자꾸 그의 눈에 들어왔기에 미안한 감정이 들다가도 내일이면 어떤 얼굴로 마주칠지 궁금했다.

    그녀의 엉뚱한 행동이 카일에게 또 다른 기대감을 주었다.

    바로 다음 날 카일의 애매한 말에 상처 입은 리첼이 밤새 술을 마신 후 취기가 남은 채 그의 앞에서 넘어졌을 땐,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리첼은 실수한 모습을 보였다는 것 자체에 부끄럼을 느낀 것 같았으나 카일은 그런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럽게 보였다. 하지만 그런 그의 태도가 레녹스 공작의 눈엔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리첼을 너무 놀리지 말게나!”

    레녹스 공작을 따라 서재에 들어가자마자 공작이 못마땅한 듯 말했다.

    “알겠습니다. 조심하겠습니다.”

    카일은 공작에게 조심하겠다는 말을 했지만 짓궂은 장난을 멈출 생각은 없었다. 장난칠 때마다 나오는 리첼의 섭섭하고 아쉬운 표정에 중독될 것만 같았다.

    말로는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은 없지만 그에게 안달 난 리첼의 표정을 보면 그녀의 고백을 받는 기분이었다.

    “앞으로 주시하겠네.”

    그의 속마음을 눈치챘는지 레녹스 공작은 경고의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레녹스 공작도 카일이 앞으로 자주 방문할 거라고 알리지 않는 것을 보니 그 역시도 리첼의 반응을 즐기는 듯 보였다.

    조금 전에 앞에선 리첼에게 화냈지만 뒤에선 몰래 미소 짓고 있는 공작의 눈빛엔 장난기가 서려 있었다.

    “자꾸만 놀린다면 나는 리첼을 자네에게 보낼 수 없다네. 여전히 펠릭스 영식이 레녹스가를 찾아온다는 건 알고 있나? 자네 긴장해야 할 걸세.”

    본인은 놀리는 걸 즐기면서 정작 카일이 리첼을 놀리는 모습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공작은 그가 들으라는 듯 펠릭스라는 이름을 강조하며 으름장을 놓았다. 일부러 그를 자극하는 말을 한 것이 틀림없었다.

    “명심하겠습니다.”

    공작의 의도를 알면서도 펠릭스의 이름이 들리자 카일의 기분이 썩 좋지 않았고, 초조한 마음도 들었다.

    ‘이 마음은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질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질투를 느낄수록 카일은 리첼을 더욱 놀려 주고 싶었다.

    자신에게 안달 나고 조급한 그 모습들을 조금 더 보고 싶었다. 펠릭스 그자는 보지 못할 그 표정을 독점하고 싶었다.

    다만 레녹스 공작도 그녀의 그런 표정을 좋아하는 것 같아 경쟁자라는 기분이 들긴 했지만 가족이니 그 정도는 이해할 순 있었다.

    하지만 장난도 도가 지나치면 안 되기에 레녹스 공작의 충고대로 이제 장난은 그만하고 리첼에게 자신의 마음을 말해야겠다고 생각했건만, 그녀가 먼저 카일을 불러내 예상치도 못한 말을 했다.

    “누군가 그러더라고요. 카일, 당신이 여성들과 사랑할 수 없는 몸이라고 말이에요.”

    그동안 숨겼 왔던 사실이 그녀의 입에서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자존심이 걸린 문제니 한 때는 숨기고 싶은 비밀이었다. 하지만 이젠 별 상관없었다. 그녀 앞에선 모두 고쳐졌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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