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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나랑 맞춰 볼래요?-79화 (79/110)
  • 13.

    방에 들어오자마자 카일은 리첼에게 심심할 때 만들어 둔 해독제를 먹이려 했다. 하지만.

    “죄송합니다. 해독제가 보이지 않는군요.”

    손안에 해독제가 있는데도 저도 모르게 없다는 말이 입에서 나왔다.

    존재하지 않던 감각이 끄물끄물 올라오는 것을 느꼈기에 자신의 본능적인 감각을 믿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리첼에게 약을 먹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직감을 따른 결과 그동안 반응이 없던 그의 몸이 그녀에겐 반응했다. 카일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리첼의 앞에서 그는 새로운 자아를 발견했다.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는 신체적인 변화를 처음으로 알았다. 생전 처음 겪는 일이었다.

    처음 느낀 감각은 그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처음이라 조심하려 했건만 그럴 수 없었다.

    그날 카일은 그동안 쌓여있던 그의 욕망을 밤새도록 리첼에게 풀었고, 놀랍게도 그녀는 그 모든 것을 받아냈다.

    ‘궁합이 맞다는 건 이런 걸 의미했던 걸까?’

    카일은 일단 바지만 먼저 입은 후 자신의 옆에서 잠이 든 리첼을 바라보았다.

    그동안은 이런 감정까진 들지 않았는데 품고 나선 어쩐지 리첼이 더욱 사랑스러워 보였다.

    그의 손이 리첼의 어깨의 닿자 액으로 더러워졌던 그녀의 몸이 깨끗해졌다.

    마법을 써서 지난밤에 리첼의 몸에 남긴 흔적을 모두 지운 후 그녀에게 얇은 옷만 입힌 후 그는 다시 잠깐의 잠을 청했다.

    약 사건 이후로 카일을 향한 성녀의 시선은 더욱 노골적으로 변했고 그를 향한 신체 접촉도 더욱 심해졌다.

    그의 팔을 잡는 척하며 제 몸을 일부러 들이밀거나 책을 읽고 있으면 그의 귓가에 괜히 작은 바람을 불어넣는 등 점점 불쾌한 행동이 늘어만 갔다.

    “이제 그런 행동 그만하십시오.”

    참다못한 카일이 성녀에게 직접 말했다.

    “무슨 행동 말인가요? 전 평소랑 다를 바가 없는데요?”

    성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갑자기 손뼉을 쳤다.

    “어머나! 이젠 카일 사제님께서 저를 의식하기 시작했나 봐요. 그렇게나 신경 쓰였어요? 아이 좋아라.”

    그녀는 순진한 아이 같은 표정을 지으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

    말이 통하지 않자 카일은 작은 한숨만 내쉬었다.

    그 순간 성녀의 드레스 안에서 언뜻 보이는 그의 목걸이가 눈에 들어왔다. 옷 안으로 숨겼지만 카일은 알 수 있었다.

    “제 목걸이 돌려주십시오.”

    “무슨 목걸이요? 아, 이거요? 사제님께서 제게 직접 주셨잖아요.”

    “….”

    뻔뻔한 성녀의 대답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혼자만의 망상에 빠져있는 성녀를 보자 그는 이젠 그녀가 무서워졌다.

    목걸이야 또 만들면 되기에 성녀와 말을 섞느니 차라리 목걸이를 포기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이거 그 목걸이죠? 궁합을 알려준다는 그 목걸이?”

    그녀를 피해 걸음을 재촉하려던 카일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어떻게 알았지?’

    성녀가 목걸이의 용도를 사실을 알았다는 것 자체가 섬뜩했다.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말아요. 룩스 대륙에서 우연히 알게 되었는걸요?”

    그리고 우연라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더욱 소름이 돋았다. 분명 목걸이에 관한 건 스승과 그, 그리고 레녹스 공작만이 알고 있었다.

    가끔 누군가 집에 몰래 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긴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건만.

    카일은 성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확 잡아채곤 손바닥을 확인했다. 희미하지만 화상자국이 있었다.

    가끔 스승의 집에 수상한 인기척이 느껴지기에 집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마법을 걸어둔 적이 있었다.

    특정 시간에 울타리를 넘어 몰래 들어올 경우 손에서 불이 나는 마법이었다.

    실제로 범인은 상처를 입었고 그 뒤로 집에 몰래 온 흔적이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 일을 잊고 있었는데 그때 그 범인은 힐다였던 모양이다.

    “혹시 제 스승님 집에도 몰래 들어와 엿듣기라도 한 겁니까?”

    성녀는 그에게서 냉큼 손을 뺐고 그를 향하던 시선은 어느새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룩스 대륙에서 카일이 힐다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졌더라면 그녀의 의심스러운 행동들을 금방 눈치챘을 텐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힐다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기에 이 모든 사실을 지금 깨닫고 말았다.

    “아니에요. 전 정말 우연히 알게 된 거예요. 이 목걸이가 어떤 식으로 쓰일지는 최근에 알았는걸요?”

    ‘아차.’

    성녀의 말을 듣자 카일은 그제야 그가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지난번 카일이 리첼과 펠릭스를 알아볼 때 그 방법을 몰래 훔쳐본 것 같았다.

    “그런데 공녀님에게 왜 비슷하게 생긴 목걸이가 있는 거죠?”

    그나마 다행인 건 리첼이 가진 목걸이도 궁합을 알려주는 목걸이라는 사실까지는 알아내지 못한 듯 보였다.

    “성녀님과는 관계없는 일입니다.”

    “왜요? 왜 숨기려 하세요? 아니면 이 목걸이에 관한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도 돼요?”

    성녀는 또다시 카일을 협박했다. 지난번 협박이 통했으니 이번에도 통하리라 여긴 것 같았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 말만 남긴 후 그녀에게서 벗어나려 빠른 걸음을 옮겼다. 어느 정도 거리감이 생기자, 카일은 오른쪽 엄지손가락과 중지를 튕겼다.

    “꺄아아!”

    ‘딱’ 소리가 나는 동시에 멀리서 성녀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그녀의 목에 차고 있던 목걸이에 갑자기 불이 붙더니 목걸이만 재가 되었다.

    카일이 목걸이만 불타 없애는 마법을 썼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성녀님 괜찮으십니까?”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성녀의 비명소리를 듣고 놀란 사제들이 그녀에게 다가갔지만 카일은 가지 않았다.

    그녀의 연결고리라 생각한 물건이 없애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기에 홀로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나선 곧바로 대신관을 찾아뵌 후 독과 약 사건을 빼고 그가 겪은 일을 고했다. 더 이상 그녀를 담당하고 싶지 않다는 말과 함께.

    “그동안 고생 많았습니다. 미안하고 고맙군요. 성녀님은 제가 더욱 교육할 테니 다음 후임이 정해질 때까지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성직자들의 성격이 모질지 못하기에 성녀를 함부로 내치지 못해서 아쉽긴 했지만 카일은 사제를 그만두는 그 날까지 일단 참아보기로 했다.

    하지만 그날부터 그의 악몽이 시작되었다. 성녀에게 시달리는 꿈이었다.

    매일 밤 그녀는 그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나타나 괴롭혔다. 어느 날은 침실이었다가 또 어느 날은 예배당이었다.

    피하려 했지만 그녀는 끝까지 쫓아와 그의 곁을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헉!”

    매번 놀란 채 이른 새벽에 눈이 번쩍 뜨이곤 했다.

    ‘불길해.’

    카일은 그가 성녀의 눈앞에서 사라질 때까지 아무 일이 없기를 빌었다. 마법으로 악몽은 잠재울 순 있었지만 그의 불안한 마음은 잠재울 수 없었다.

    ‘악몽에 시달릴 바엔 그 시간에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약을 만드는 편이 낫겠어.’

    어느덧 카일은 성녀의 정신병을 고치는 약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악몽이라고 생각했던 꿈은 예지몽이라도 되었던 걸까.

    불안한 마음이 기우라면 좋으련만 아니었다. 밤에 그의 방까지 몰래 찾아온 성녀를 냉정하게 내쳤더니 그녀는 결국 사고를 치고 말았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니….’

    그보다 끔찍한 말은 없었다. 카일은 차라리 아무도 모르게 이번엔 목걸이가 아닌 성녀 그 자체를 불태워버리고 싶었다.

    그의 능력으론 가능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엮이기 싫었다.

    그가 모르는 사이 그녀가 어딘가로 사라지길 원했으나, 카일에겐 그런 마법의 능력까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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