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조만간 사제 일도 그만두고자 합니다.”
예상치도 못한 말에 놀랐는지 공작의 눈썹 한쪽이 올라갔다.
“아직 일이 진행되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하는데 자네의 입에서 먼저 그 말이 나올 줄 몰랐네. 여자들이 싫어서 임시로 사제가 된 건 아니었나?”
“공작님 말씀이 맞습니다.”
“그만둔다고 알려진 순간 또다시 괴로운 일을 겪을 텐데 괜찮겠나?”
공작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카일을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괜찮습니다.”
“자네의 생각이 갑자기 변한 이유가 뭔가?”
레녹스 공작이 호기심에 가득 찬 눈빛으로 물었다.
“드디어 제게 잘 맞는 여인을 찾았습니다.”
“…혹시 궁합을 알려주는 목걸이가 또 있었나?”
카일은 돌려 말했으나 그는 바로 알아들은 것 같았다.
“공작님께서 떠나신 후 하나 더 만들었습니다.”
“하긴 자네가 만든 목걸이니 언제든 만들 수 있겠지. 어쨌든 축하하네. 드디어 자네도 제 짝을 찾은 모양이군. 다행이야. 그 상대가 누군지 물어봐도 되겠나?”
제 일처럼 기뻐하며 레녹스 공작이 미소 지으며 물었다. 다른 건 관심이 없어 보이던 그도 이번엔 궁금했던 모양이다.
조만간 그 웃음이 사라질 것이란 생각에 카일은 조심스레 대답했다.
“리첼 레녹스 양입니다.”
“…내 딸이라고?”
역시나 입가에 걸린 웃음은 어느새 사라지며 반 박자 늦게 공작은 되물었다. 묻고 있는 중에도 그의 붉은 눈동자는 살짝 흔들렸다.
“…네.”
카일은 레녹스 공작의 눈치를 보며 짧게 대답했다.
“….”
공작은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보였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진짜인가?”
한참 말이 없던 공작이 다시 한번 되물었다.
“네.”
“아하하하하하하!”
그러자 공작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그 안에는 어이없다는 감정과 재밌다는 감정이 섞여 있었다.
“가까이 있어도 못 알아본다는 말이 있더니 딱 자네와 나를 두고 하는 말이었네.”
“저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이해하네. 자네가 여인들을 좀 싫어했나. 그런데 갑자기 사제를 그만두겠다는 건…. 혹시 목걸이 색이 변한 순간 자네의 마음이 변하기라도 했나?”
“이상하게도 자꾸 신경이 쓰였습니다.”
“그렇다면 자네가 우리 리첼을 마음에 두고 있다고 생각해도 되겠나?”
“그렇습니다.”
“….”
그러자 레녹스 공작은 대답 없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마음에 드는 건지 안 드는 건지 표정만으로는 공작의 속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내가 듣기론 목걸이가 변한 이가 다른 한 명이 더 있다고 들었네만.”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카일을 떠보듯 입을 열었다. 역시나 공작도 펠릭스에 대해 알고 있는 눈치였다. 리첼에게 두 명의 남자가 접근했기에 공작이 잠시 생각에 잠겼던 모양이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도움을 청하고자 먼저 말씀드린 겁니다.”
“역시 마법사는 다르군. 그 사실까지 알고 있을 줄이야. 하하. 내가 도움 줄 만한 것이 있나? 다만 리첼이 내 말을 들을 리도 없다는 걸 명심해두게. 아마도 자기 마음이 이끄는 대로 행동할 걸세.”
“알고 있습니다. 공작님께선 공녀님과 제가 만날 계기만 만들어주시면 됩니다.”
“만날 계기라…. 하긴 나도 이제 자네와 앞으로의 일 얘기에 대해 조만간 할 생각이었네. 황제께서 드디어 자네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으니 말일세.”
레녹스 공작은 재밌다는 눈빛으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앞으로의 일 기대하겠네.”
그를 응원하겠다는 말이 아니었다. 그냥 그는 이 상황 자체에 흥미를 느낄 뿐이었다.
그 후로 카일은 교육을 핑계로 레녹스 가를 3일에 한 번 드나들게 되었다.
펠릭스에게 흘러간 리첼의 마음을 제 쪽으로 넘어오게 하기 위해 카일이 첫발을 내디딘 셈이다.
* * *
카일이 신전으로 돌아오자 사제들이 안심한 표정으로 그에게 달려왔다.
다친 상태로 신전 밖을 나간 사람이 행방불명되었다가 일주일이 지나 돌아왔으니 다들 많이 걱정한 눈치였다.
“걱정했습니다만 이렇게 무사한 모습을 보니 다행입니다.”
주교와 사제들이 그에게 다가와 걱정스레 안위를 물었다.
“저는 이제 괜찮습니다.”
카일은 그들에게 건강하다는 듯 싱긋 웃어 보였다.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성기사님들 말씀으론 피를 흘리며 나가셨다고 하시던데요.”
“대신관님께 미리 서신을 드렸다시피 실수로 독초를 먹고 몸을 회복하느라 늦어졌습니다.”
카일은 얼른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지만, 그동안의 행방이 궁금했는지 사제들은 궁금증이 풀릴 때까지 그를 놓아줄 눈치가 아니었다.
그래서 이런저런 상황을 설명해야 했지만 그의 부상이 성녀와 관련 있다는 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때였다.
“카일 사제님!”
성녀가 울먹거리는 소리와 함께 주위에 사람들을 억지로 밀치며 달려왔다.
그녀는 카일을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얼마나 걱정했던지. 엉엉.”
“….”
보통 때라면 예의상 등이라도 가볍게 토닥일 수 있지만, 그러기 싫었다.
자신을 죽이려 했던 범인이 제일 슬프게 울고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제 몸은 진짜 괜찮습니다. 그러니 놓아주십시오. 아니면 그날 일에 대해 여기서 자세히 말씀드려야 할까요?”
카일은 온화한 미소와 다정한 말투로 성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의 말에 성녀가 잠시 놀란 듯하더니 이내 카일에게서 떨어졌다.
그녀의 몸이 바들바들 떨리는 것을 느꼈지만 일부러 무시했다.
“저는 대신관님 먼저 찾아봬야 할 것 같아서 이만 먼저 가겠습니다.”
그리곤 대신관 핑계를 대며 얼른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를 걱정하는 척하는 성녀의 태도가 몹시나 메스꺼웠기 때문이었다.
성녀는 진심으로 걱정한 것처럼 보이긴 했다. 하지만 실수였더라도 사람을 죽일 뻔 해놓곤 본인만 상처받고 힘든 척하는 그녀의 태도를 참고 볼 수가 없었다.
입 밖으로라도 그녀의 이름을 꺼내기도 싫었고, 어떠한 것에도 엮이기 싫었다.
게다가 행크 사제가 나중에라도 자신이 저지른 일을 짐작이라도 했다간 어린 나이에 상처를 받을 것이 뻔했다.
그래서 카일은 어쩔 수 없이 대신관에게조차 거짓 보고를 해야만 했다.
그리곤 독약 사건 이후로 얼굴 보기 껄끄러워 되도록 성녀를 멀리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의 행동이 그녀를 더욱 자극할 줄은 그는 꿈에도 몰랐다.
기어이 성녀는 일을 치르고 말았다.
약이라니.
사실 성녀가 약을 써도 카일에겐 효과가 없었다. 성욕이 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한 번도 반응한 적 없는 그의 물건이 약 하나로 움직일 리 없었다.
하지만.
리첼이 카일을 도와주겠다고 하다가 결국 일을 더 키웠다. 그녀는 쓸데없이 그를 도우려다 오히려 약에 당하고 만 것이다.
“….”
카일은 기도실 앞에서 쓰러져있는 성녀와 리첼을 발견하곤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신이시여. 왜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 겁니까.
한숨을 푹 쉬며 성녀를 외면한 채 리첼을 품에 안았다.
그리곤 일을 벌일 때마다 성녀를 꾸짖지 않은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엮이기 싫었다는 이유로 그녀의 잘못된 행동을 보고도 그냥 넘어가곤 했다. 여성 신도들을 괴롭혀도 모른 척했고, 목걸이를 훔쳐간 걸 알았어도 모른 척했다. 그래서 벌을 받은 것만 같았다.
게다가 리첼도 그 피해를 입고 말았다.
카일은 자신의 품 안에서 고통스러워하는 리첼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나른한 표정을 계속 바라보니 몸 안에 무언가 꿈틀거리는 것만 같았다.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입술을 내리려다 서로의 입술이 닿기 직전 고개를 저었다. 누군가와 닿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건 처음이었지만 카일은 자신의 감정을 부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