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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나랑 맞춰 볼래요?-77화 (77/110)
  • 13.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리첼이 신전에 들락거리는 횟수가 줄었고, 그녀가 신전에 오지 않으면 얼굴 보기 힘들었다.

    날이 지날수록 카일의 마음은 초조해져만 갔다.

    ‘이러다 그 자식에게 마음이 완전히 넘어가면….’

    카일은 리첼, 펠릭스 두 사람에 대해 상상하기 싫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매일매일 리첼이 신전에 왔는지 살펴보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 기간이 길어지자 카일의 마음은 점점 조급해져만 갔다.

    불안한 감정만 커지던 그때였다.

    그의 마음이 그녀에게 닿았는지 오랜만에 리첼의 얼굴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먼저 말을 건넸지만 그녀의 표정은 어딘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그녀는 성녀과 머리채를 잡고 다투는 일이 발생했다.

    ‘그와 무슨 일이라도 있던 걸까.’

    평소에는 성녀의 무례를 참아내던 그녀가 평소와 달리 행동한 건 펠릭스, 그와 관련이 있을 것 같았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있는지 몰랐지만 카일은 괜히 불쾌감을 느꼈다. 그래서 성녀와 리첼의 다툼을 끝까지 보기 싫어 그 장소에서 잠시 머물다 기도실로 갔다.

    [똑똑]

    불쾌한 마음을 잠재우며 기도를 드리던 카일을 누군가 찾아왔다. 어린 사제였다.

    오갈 데 없이 고아가 된 아이들을 신전에선 견습 사제로서 그들을 받아들이곤 하는데, 그중 한 아이였다.

    ‘이름이 행크라고 했던가?’

    “카일 사제님, 저를 도와주실 수 있나요?”

    행크는 울먹거리는 얼굴로 카일에게 말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어린 사제들이 그에게 무언가를 부탁하는 건 처음이라 카일은 의아했지만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까 쉬는 시간에 가지고 놀던 공이 나무 위에 걸려서 빠지지 않아요. 오늘 할 일을 모두 마친 후 공을 찾으려고 했지만 어두워져서 꺼낼 수가 없어요. 도와주세요.”

    카일은 그제야 밖이 어두워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알겠습니다. 어느 나무에 공이 있습니까?”

    쌀쌀한 날씨이기에 그는 신전에 마련된 자신의 겉옷과 행크의 겉옷을 들고 밖으로 나온 후 행크에게 물었다.

    “저쪽이요 저쪽. 사제님께서 키가 크고 몸이 좋으셔서 부탁드리는 거예요.”

    행크는 문 쪽에 가까운 나무를 가리키며 묻지도 않는 말을 하며 그를 데려갔다.

    그다지 높지도 않은 위치에 공이 걸려있었다. 카일이 손을 뻗으면 닿을만한 거리였다. 그래서 그는 쉽게 공을 꺼낼 수 있었다.

    “자. 여기 있습니다.”

    공을 건네주자 어린 사제는 공을 받으며 좋아했다. 그리곤 생각났다는 듯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더니 그에게 건네주었다. 자줏빛을 내는 액체가 든 병이었다.

    “드세요. 고마워서 드리는 거예요.”

    카일은 행크가 건네주는 병을 받았다.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그를 방으로 보내려 했으나 어린 사제는 움직이지 않았다.

    “왜 그러십니까?”

    혹시라도 또 다른 부탁이라도 있을지도 모르기에 물어보았다.

    “사제님께서 제가 드린 음료를 마시는 모습을 보고 가려고요.”

    이상한 요구였지만 행크는 그가 마시는 것을 확인할 때까지 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카일은 아이를 보내기 위해 그 즉시 병을 따서 음료를 마셨다. 마시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아이는 제 방으로 돌아갔다.

    음료의 맛은 독특했다. 씁쓸하면서도 끝맛이 떫었다.

    ‘이상한데?’

    마신 음료가 무엇인지 확인하려던 그 순간이었다.

    “쿨럭.”

    쓴맛과 함께 뜨거운 기운이 몸 안에서 밖으로 나오려 했다.

    카일은 참지 못하고 결국 그것을 뱉어냈다. 피였다.

    “꺄아악!”

    그러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갑자기 성녀가 소리를 지르며 그에게 다가왔다.

    “괘, 괜찮으세요? 대, 대체 왜? 마, 말도 안 돼. 그, 그럴 리 없는데. 왜?”

    그녀는 말을 버벅거리며 횡설수설했다.

    이상한 성녀의 반응, 의아했던 아이의 태도. 카일은 그제야 이 모든 건 성녀가 꾸민 짓임을 알았다.

    아마도 행크는 아무것도 모르고 성녀가 시킨 대로 행동했을 것이다.

    ‘젠장.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이를 이용하다니!’

    카일은 손이 으스러질 만큼 주먹을 꽉 쥐었다.

    성녀가 왜 그를 죽이려고 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카일은 지금 그걸 따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몸 안에 들어온 순간 독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한시라도 빨리 해독제를 먹어야 했다.

    하필이면 무방비한 상태로 당할 줄 꿈에도 몰랐다.

    “저… 저는 그러려고 한 거 아… 아니에요. 당신의 병을 고쳐주고 싶어서…. 당신 몸에 반…응이 생기게 하려고 구…해온 약이에요.”

    성녀가 변명했지만 카일의 귀엔 아무 말도 들어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성녀의 비명을 듣고 온 성기사들이 놀란 눈으로 카일에게 다가왔다.

    대략적으로라도 상황을 설명해야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또한 평소라면 스스로 해독할 수 있었지만, 지금 상태로는 불가능했다.

    독이 상당히 독했기에 회복 마법을 썼다간 마법이 발동하자마자 탈진해서 쓰러질 것만 같았다.

    회복되기도 전에 죽을 순 없었다.

    그의 방 안에 있는 해독제를 먹거나 신전 밖 숲속에 해독 약초를 찾아야만 했다.

    하지만 둘 다 시간이 촉박할 것 같았다. 그보단 잡초들 사이에 숨어있는 임시 약초라도 찾아서 먹는 편이 빠를 것도 같았다.

    몸에 조금이라도 힘이 난다면 회복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해…독…제….”

    점점 굳어가는 혀를 겨우 움직여 그 한마디를 하자 성기사들이 신전 안으로 해독제를 찾으러 들어갔고, 카일은 신전 밖으로 나갔다.

    누군가의 눈에 띄었다간 문제가 더 커질 수도 있기에 망토를 쓰며 일단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다행히 성녀는 뒤따라오지 않았다. 그가 피를 토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그 자리에 멈춰선 듯 보였다.

    카일은 신전 밖으로 겨우 나왔지만 몇 걸음 걷지 못했고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이대로 죽는 건가?’

    생각보다 위급한 상황이었기에 성기사 한 명이라도 같이 나올 걸 후회하는 그 순간,

    “괜찮으세요?”

    멀리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죽을 목숨은 아니었나 보다.’

    피식 웃음이 나오는 동시에 입안에서 피가 한 줄기 쏟아졌다.

    상대방의 얼굴을 미처 확인하지 못한 채 그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레녹스 공작가에서 눈을 뜬 카일은 의아했다. 왜 그가 그곳에 있는지, 그리고 하필이면 리첼의 방 안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일단 몸 상태가 좋아졌기에 카일은 회복 마법을 써서 자신의 몸을 회복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손을 내렸고, 다 나을 때까지 레녹스가에 머무는 것을 택했다.

    리첼과 가까워질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에.

    * * *

    저택 내 시종들은 대부분 카일을 보고도 못 본 척했다. 아마도 공작이 함구 명령을 내린 것 같았다.

    그래서 몸이 거의 다 나은 후 공작을 찾아뵈었다. 떠나기 전 감사 인사도 할 겸 그에게 할 말도 있어서였다.

    레녹스 가에 머문 잠깐의 시간 동안 마음에 조그마한 변화가 생겼기에 레녹스 공작에게 그가 결심한 바를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 나아서 떠난다니 다행이네. 어떤 일 때문에 다쳤는지는 모르겠으나 앞으로는 몸조심하게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저를 보살펴 준 것도, 그리고 제가 이곳에 머문 사실을 비밀로 해두신 것도 모두 감사드립니다.”

    리첼과 마찬가지로 레녹스 공작 역시 아무것도 묻지 않았기에 카일은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드렸다.

    “내가 뭘 했다고 그러나. 리첼이 구해주고 돌봐줬으니 그 애에게만 인사해도 충분하네.”

    레녹스 공작은 쑥스러웠는지 손사래를 쳤다.

    “공녀님께는 따로 감사 인사드렸습니다.”

    “운 좋은 줄 알게나. 리첼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지? 내가 어떻게 모셔온 마법사인데… 자네의 모습을 보자 나도 식겁했다네. 다음부터는 몸조심하게나.”

    “걱정을 끼쳐 죄송합니다.”

    모든 인사가 끝났지만 카일이 나가지 않자 공작이 고개를 갸웃했다.

    “뭔데 그러나? 나한테 더 할 말 있어 보이는데?”

    카일이 말하기를 망설이자 공작이 먼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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