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그게 너의 선택이라면 존중하마. 더 넓은 세상을 보고 느끼고 돌아와 네 형을 도와주려무나.”
카일의 완고한 고집을 못 꺾은 스펜서 후작은 결국 그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후작도 그동안 제 아들의 고통을 어느 정도 알았기에 그의 선택을 이해해주었다.
카일은 제일 먼저 룩스 대륙으로 갔다. 솔로이 제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시작해서 점점 제국에 가까운 곳으로 여행을 다니다가 다시 솔로이 제국으로 돌아올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곧 달라졌다.
“어허 자네. 내 밑에서 마법을 배워보지 않겠는가?”
배가 고파 아무 곳이나 들어간 음식점에서 어떤 노인이 그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헛소리할 거면 딴 데 가서 하십시오.”
별 미친 영감이라는 생각이 들어 카일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 거는 척하며 소매치기라도 할 생각으로 들러붙는다고 여겼기에 그 노인을 쫓아내려 했다.
“자네 몸엔 마법을 쓸 수 있는 재능이 숨겨져 있어.”
아무리 무시하려고 해도, 모진 소리를 해도 그 노인은 끈질기게 달라붙으며 마법 이야기를 꺼냈다.
룩스 대륙에 존재한다는 소문을 듣긴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의 본 적도 없는 마법사가 눈앞에 이렇게 쉽게 나타났다고?
노인의 말을 믿을 수 없어서 카일은 결국 그 자리를 뜨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즉시 놀란 눈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이제 믿겠나? 내가 마법으로 자네 발을 묶어놓았다네.”
노인은 당연하다는 듯 껄껄 거리며 웃었다. 그제야 카일은 그 노인과 마주 보며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왜 하필 저를?”
“말하지 않았나. 재능이 있다고. 내가 이것저것 실험하는 걸 좋아하는데 혼자서는 역부족이라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었네.”
노인은 조수를 구하는 중인 것 같았다.
“그런데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은 거의 드물다네. 마법도 재능이 있는 사람만 쓸 수 있어서 아무나 마법을 사용하는 건 아니라네.”
“그러면 저는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네. 자네는 잠재능력을 가지고 있네. 자네처럼 몸 안에 힘이 숨겨져 있는 사람을 찾기 어렵다 보니 보자마자 반가워 말을 걸었네. 보아하니 유랑자 같아서 머물 곳도 없어 보이고 말일세. 자네 내 집에서 머물면서 나 좀 돕는 건 어떻겠나?”
노인은 대놓고 노예로 부려 먹을 조수를 구한다고 말했지만 카일은 그 말에 그다지 신경 쓰진 않았다. ‘마법’이라는 단어가 카일의 흥미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노인을 따라 도시에서 먼 외진 숲속에 있는 통나무집으로 향했다.
처음 1년 동안은 아무런 가르침이 없었다. 카일은 집안일을 했고, 연구를 도왔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불만은 없었다. 스승의 말대로 자신에게 마법에 재능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방법을 몰랐을 뿐 옆에서 스승이 마법을 쓰는 걸 곁눈질로 배우다 보니 어느 순간 마법을 쓸 수 있었다.
스승은 직접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카일은 성향이 달랐다.
그는 직접 마법을 쓸 수 있는 능력은 한계가 있었다. 대신 물건에 마법을 부여할 수 있는 능력은 무궁무진했다.
그래서 자신의 능력을 깨달은 후 카일은 마법이 깃든 물건 만들기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가 연구에만 몰두한 지 3년이 되던 해, 스승이 걱정하듯 물었다.
“발명은 이제 그만하고 다른 사람도 만나고 다니는 건 어떻겠느냐? 이러다 연구만 하다 나처럼 늙은이가 될 것이 뻔한데.”
“괜찮습니다. 저는 평생 연구만 해도 좋습니다.”
매번 여성들에게 시달리던 삶을 살던 카일에겐 스승을 제외하곤 아무에게도 얽매이지 않고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좋았다.
처음엔 마법을 배우는 게 신기해서 몰두했다면, 이제는 마법이 깃든 상품을 만들 수 있다는데 희열을 느꼈다.
그가 만든 물품을 스승이 시장에 내다 판 후 벌어들이는 액수가 얼마인지 따윈 관심 없었다.
“연구도 좋지만, 세상에 얼마나 재미난 것들이 많은데 왜 이렇게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하느냐? 참으로 네 외모가 아깝구나. 쯧.”
평생 연구하는 데 인생을 보낼 것 같자 보다 못한 스승이 말을 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동안 아무 말 없다가 갑자기 저런 말을 꺼내는 스승의 행동이 수상했지만 카일은 그마저도 관심이 없었다.
“물건을 사러 오는 아가씨들이 네 얼굴을 얼마나 힐끔힐끔 쳐다보는지 아느냐? 망토를 써도 네 외모가 보이는 거겠지만 말이다. 그 아가씨 중에서 만나보는 건 어떻겠느냐?”
스승이 뭘 하든 관심은 없었지만, 그는 스승이 만족할만한 돈을 모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관심 없습니다.”
“설마 그 얼굴에 고자는 아니겠지?”
스승의 말에 카일은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사실 그에겐 은밀한 비밀이 있었다. 바로 여성들을 보아도 성적인 욕구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 어렸을 때 여성 혐오가 트라우마가 되었던가 서질 않았다.
“…비슷합니다.”
“….”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몇 분간의 침묵 후에 어색한 공기를 바꾸고자 스승은 ‘흠흠’ 하며 일부러 헛기침 소리를 냈다.
“그럼 무성애자?”
“…비슷합니다.”
“농담으로 던진 말인데 진짜일 줄이야. 쯧쯧… 어쩌다 저리됐을꼬.”
스승은 카일의 하반신을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찼다. 그러다 갑자기 불안한 눈빛으로 물었다.
“서… 설마… 남자에게?”
“아닙니다.”
카일은 스승의 엉뚱한 소리를 단칼에 부정했다.
“아까워. 아까워.”
그리곤 그동안 카일의 인간관계에 관심도 없던 스승이 갑자기 이상한 오지랖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의 행동이 수상했지만 카일은 여전히 관심 없었다.
“너를 위한 약을 발명해주마.”
“필요 없습니다.”
“아니. 내가 만들어주고 싶구나.”
필요 없다고 한사코 말렸지만 스승은 그를 위한 약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스승에겐 그저 심심한 삶에 활력을 조금 불어넣는 요깃거리였을 것이다. 역시나 스승은 말만 앞세웠을 뿐 상품 개발은 카일의 몫이었다.
* * *
“하아.”
연구에 매진한다는 핑계로 스승은 갑자기 카일에게 마법이 깃든 물건을 팔고 오라며 시장으로 내보냈다.
스승이 시장에 갈 때 가끔 따라가긴 했지만 이렇게 혼자서 가는 건 처음이었다.
연구를 계속하고 싶은 카일에겐 시장에 가서 물건 파는 그 시간이 고역이었다.
망토로 얼굴을 가리며 억지로 시장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장사를 할 준비를 하고 있던 중.
“어? 매번 팔던 할아버지는요?”
아직 개시도 안 했는데 한 여인이 그에게 다가와 물었다. 매번 같은 자리에 다른 사람이 와서 놀란 모양이었다.
“오늘은 제가 대신 나왔습니다. 어떤 물건을 원하십니까?”
“평소에 사던 불면증을 치료해주는 약과 마음을 진정시켜주는 구슬 각각 10개씩 주세요.”
저렴한 금액도 아닌데 20개나 사다니. 평소 단골이란 생각에 별생각 없이 서비스 상품을 하나 주었다.
“이건 연구 중인데 한번 써보시고 효과가 괜찮은지 말씀해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
카일은 열이 나오는 구슬을 서비스로 주었다. 공짜로 준 상품을 받은 후 여인이 잠시 그를 바라보다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 자리를 떠났다.
그 뒤로도 많은 사람들이 와서 물건을 사 갔기에 정신없는 하루를 보냈다.
그동안 관심 없어서 몰랐는데 그가 만든 물건들은 가격이 비싼데도 불티나게 팔렸다.
“이러니 돈을 많이 벌지.”
카일은 한숨을 내쉬며 물건들을 정리하며 떠날 채비를 했다.
“저기….”
떠나려는 순간 누군가 그를 불렀다. 아까 처음 왔던 그 여자 손님이었다.
“혹시 내일도 물건 팔러 오시나요?”
“아…니요? 아마도 3~4일 후쯤에 올 것 같습니다?”
오늘 상당한 금액을 쓴 것 같은데도 또 물건이 필요한가?
다음엔 스승이 물건을 팔러올 테니 애매한 답변을 했다. 그러자 여자의 표정은 서운한 듯 보였다.
“아… 그러면 그때 뵈어요.”
“…?”
카일은 의아하게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3~4일 후에 그가 왜 그녀를 만나야 하는지 이해할 수도 없었지만 그다지 신경 쓸 사항은 아니기에 카일은 그 일을 잊고 연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