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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나랑 맞춰 볼래요?-71화 (71/110)
  • 12.

    “그래서 얼굴을 보자마자 저를 덮치셨군요. 만족하셨습니까?”

    리첼은 카일의 가슴에 팔꿈치를 올리고 양손을 겹쳐 턱을 괸 채 그의 검은 눈동자를 내려다보았다.

    “당연하죠.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내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알아요?”

    카일이 고개를 느릿하게 저었다.

    “당신에게 고백받는 기분이었어요. 아하하. 얼마나 가슴이 떨리던지. 나에게만 반응하는 남자. 꼭 운명 같잖아요. 난 사실 당신과 나는 운명이 아닐 거란 생각이 종종 들었거든요.”

    “왜 운명이 아닐 거라고 생각을 하신 겁니까?”

    “만나고 싶을 땐 만나지 못하면서, 만나기 싫을 땐 꼭 나타나는, 나는 우리가 그런 관계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마음을 접을까 몇 번이나 망설였어요.”

    그동안 마음속에서만 꽁꽁 담아두곤 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말이 입에서 술술 나왔다.

    말로 사랑 고백을 한 적이 없지만 카일의 몸에서 느껴지는 사랑에 대한 확신과 그토록 원하던 그의 표정을 봤다는 만족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포기하려고 하면 당신이 꼭 나를 유혹하려는 듯한 기분이 들었어요. 나 이상하죠? 하하. 혼자서만 착각하고, 안달 나고, 허둥대는 것만 같아서 스스로 바보 같다고 생각했어요.”

    리첼은 어이없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맞습니다.”

    “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른 대답이 들려오자 리첼은 웃음을 멈추고 카일을 바라보았다.

    “유혹한 것 맞습니다. 전 덫을 놓았고 공녀님께선 지금 그 덫에 걸리셨습니다.”

    그의 말에 리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동안 혼자 수없이 고민했었는데…. 혹시 혼자만의 망상이 아닐까, 수십 번 생각하며 고민했는데 그가 유혹한 것이 맞다니. 귀로 직접 듣고도 믿을 수 없었다.

    “말도 안 돼요. 처음엔 저를 차디찬 시선으로 바라보았잖아요.”

    “그것도 맞습니다.”

    “….”

    혼란스러웠다. 카일에게서 느꼈던 감정들이 혼자만의 착각이라 생각했는데 아니라니. 그렇다면 혹시….

    “설마. 그러면 제 목덜미에 있던 키스 마크도 카일 님이 남긴 것 맞나요?”

    리첼은 계속 물어보고 싶었으나 물어볼 수 없었던, 마음속에만 고이 담아두었던 질문을 꺼냈다.

    “공녀님께서는 제가 흔적을 남겼다는 걸 모르셨습니까?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쉽군요.”

    반쯤 감은 눈으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범인이 그가 아닐까 추측은 했지만 막상 그의 입에서 그 말을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차라리 대놓고 남겼다면 좋으련만 몰래 왜 그런 흔적을 남겼던 건지.

    “겉으로 아무 내색 없었잖아요. 그런데 저 몰래 대체 왜 그런 흔적을 남기신 거예요?”

    “경고였습니다.”

    “경고라니요? 누구에게 경고한 거죠?”

    대답 대신 카일의 입술은 매끄러운 호선을 그렸다. 그가 말하지 않아도 누굴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펠릭스. 아마 그를 말할 것 같았다. 그때 그녀의 흔적을 보곤 격한 반응을 보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카일이 리첼과 펠릭스와의 일을 알 리가 없었다. 그 앞에서 그녀는 펠릭스와 만난 적이 없었다.

    리첼이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았지만 카일은 더 이상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대답을 회피하려는 듯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

    “그럼 제가 아무런 관심도 없는 여인에게 손을 댔을 거라고 생각하신 겁니까?”

    “….”

    그땐 그렇게 생각했기에 리첼은 그의 말에 부정할 수 없었다.

    “실망입니다. 저를 그런 파렴치한이라 생각하셨다니….”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제가 몇 번이나 말렸잖아요.”

    ‘계속했다간 내가 덮칠 것 같아서요.’란 말까지 하고 싶었지만 이 말은 턱 밑까지 올라왔다가 순식간에 내려갔다.

    “제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어떻게 해결하려고 하셨습니까? 꽤 독한 약이었습니다.”

    리첼을 바라보는 카일의 시선이 갑자기 차가워졌다.

    “왜요? 또 벌주시려고요?”

    요즘은 한동안 보이지 않던 냉랭한 시선은 왠지 모르게 가슴 속을 파고들어 상처를 주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혹시 지난번처럼 거칠게 행동하지 않을까 기대도 하고 있었다.

    거칠고 난폭한 행동은 저항할 힘을 빼앗기는 것 같아 싫었으면서도 왠지 모르게 도취감을 느끼게 했다. 그래서 그날 끝까지 가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남았었다.

    “…벌 받기를 원합니까?”

    하지만 반 박자 늦은 대답을 보니 카일은 그럴 생각이 없었던 것 같았다. 혼자만 괜히 이상한 생각을 한 것 같아 민망해지려는 그때였다.

    “!”

    카일이 갑자기 몰아치듯 움직였다. 갑작스러운 그의 공격에 리첼은 저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냈다.

    “이걸 원하신 겁니까?”

    “그… 그건 아니지만…!”

    대답하기도 전에 그가 또다시 그녀를 자극했다.

    예상치도 못한 그의 공격에 리첼의 몸은 뒤틀리듯 경련이 일어났다.

    “저는 우리 두 사람도 운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공녀님껜 그렇지 않은가 봅니다. 이거 섭섭하군요.”

    말과 달리 카일은 섭섭한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를 유혹하는 관능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

    ‘두 사람도….’

    카일은 마치 리첼이 펠릭스와 잦은 인연이 운명이라고 여긴 그녀의 생각까지 짐작하고 있는 듯했다.

    리첼의 의문은 점점 커져만 갔다. 누군가 그에게 일러줄 사람이 없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밀리아, 올리비아, 아버지뿐이었다.

    “왜 우리가 운명이라고 생각하셨나요? 우리에겐 극적이거나 우연한 만남이 없는 걸로 아는데요.”

    “궁금하십니까?”

    리첼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카일은 대답 대신 멈춰있던 행위를 다시 시작했다.

    또다시 예고도 없는 그의 공격에 리첼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그리고 아무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거센 움직임을 이어나갔다.

    연이은 자극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 순간 머릿속을 채우는 건 의문 대신 쾌락이었다.

    ‘역시 나빴어.’

    그렇게 생각했지만 말 대신 교성만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카일의 거침없는 공격에 집중할 수 없었지만 리첼은 그의 입에서 나온 두 가지 단어는 들을 수 있었다.

    목걸이, 그리고 마법사….

    * * *

    ―카일의 과거 이야기.

    “잠시 제국을 떠날까 합니다.”

    카일의 말을 들은 후작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성인이 되자마자 떠난다는 그 말이 못마땅한 모양이다.

    “뭐라고? 다시 말하려무나.”

    “제국을 떠나 잠시 여행을 떠나고 싶습니다.”

    “갑자기? 대체 왜 그러느냐. 네 형 키튼을 도와 스펜서가를 더욱 키워나갈 생각도 없이 말이냐?”

    “휴우. 솔로이 제국에서 사는 건 이젠 지쳤습니다.”

    긴 한숨과 함께 카일은 피곤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스펜서 후작가의 차남으로 태어난 카일은 우락부락한 외모를 가진 키튼과 달랐다.

    그는 솔로이 제국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소문난 스펜서 후작 부인을 닮았고 그게 그의 끔찍한 인생의 시작이었다.

    “이리 잠시 좀 와보세요.”

    일하는 하녀들이 가끔 그를 불렀다. 처음엔 아무 생각 없이 그 부름에 갔지만 그녀들의 눈빛은 어딘가 음흉했다.

    괜히 와서 손을 잡고 악수를 한다던가 그의 뺨을 쓰다듬는다던가. 그런 이상한 행동을 했다.

    처음 한두 번이야 부름을 받고 갔지만 세 번째부터 그는 그녀들을 무시했고, 어머니에게 말해 그들을 모두 내쳤다. 하지만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와도 그들이 카일에게 흑심을 품은 건 마찬가지였다.

    “검술을 배워보는 건 어떻겠니? 우락부락한 몸을 가지면 여성들이 접근하기 부담스러워질 수도 있잖아.”

    접근하는 여자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자 곱상한 외모에 콤플렉스가 생겨버렸다. 그런 그를 딱하게 여긴 형 키튼이 몸을 단련시킬 방안을 제안했다.

    ‘그래. 골격을 키우면 무언가 달라지지 않을까?’

    변화를 기대하며 카일은 형의 추천을 받아 기사단과 함께 훈련을 시작했다.

    하지만 마른 체격이었던 그의 몸은 기본 덩치가 큰 형과는 달랐다.

    카일은 키가 크고 어깨가 넓었지만, 운동을 해도 적당히 단단해질 뿐 우락부락한 몸이 되질 않았다.

    그런 점이 여인들로 하여금 쉽게 침대 위로 불러들일 수 있다고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럴수록 그는 그들의 앞에 빠르게 긴 칼을 꺼내 그들의 목에 가누며 위협했다.

    “꺄악!”

    “앞으로 한 번만 더 나를 건드렸다간 무사하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카일에게 불순한 목적으로 다가오는 여인들의 수가 점점 더 늘어만 갔다. 특히나 그에게 적극적으로 들이대는 유부녀들이 많았다.

    그 모든 것이 그에겐 고통이자 스트레스였다. 그래서 카일은 어느 순간부터 여성을 혐오하기 시작했다. 성인이 되자마자 제국을 떠나기로 결심한 것도 주변 여성들의 집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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