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도 나랑 맞춰 볼래요?-69화 (69/110)
  • 12.

    “제 얼굴을 보고 말씀해주세요? 네?”

    펠릭스는 고개를 숙인 리첼에게 사정했지만 그녀는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

    애원에도 소용없자 펠릭스는 잠시 망설이는 듯 입을 열었다 닫았다 반복하다가 작은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요즘 리첼 양이 제게 마음이 떠난 것 같다고 느껴져서 죄송하지만, 혹시 자주 어울려 다니는 다른 분이 있나 따로 알아보았어요. 기분 상하게 듣지 않으셨으면 해요.”

    “네. 기분 상하지 않고 들을 테니 편히 말씀하세요.”

    펠릭스가 자신의 뒷조사를 했다기에 기분이 썩 좋진 않았지만 리첼은 내색하진 않았다.

    “단지 저는 당신의 마음이 제가 아닌 다른 곳으로 점점 향하는 것 같아 불안한 마음에서 알아봤어요. 그런데…. 제가 들은 사람이 맞나요? 스펜서가의 카일 영식이라던데. 신전에서 있었던 사건에 관해 들을 때도 불길한 느낌이 들긴 했는데 그 사건 이후로 자주 만나신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혹시 그분 때문에 제 마음을 거절하시나요?”

    펠릭스가 뜸 들이며 말할 때 불안하더니 역시나 그의 입에서 카일의 이름이 나왔다.

    리첼은 괜히 미안한 마음에 눈을 똑바로 보지 못했고, 고개를 숙인 상태에서 끄덕였다.

    “진짜 그분이 맞다고요? 아하하하하. 큭큭큭.”

    하지만 카일이라고 안 순간 펠릭스는 슬퍼하기는커녕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이해할 수 없는 그의 웃음은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대체 뭐가 그리 재밌다고 웃는 거지?’

    리첼은 어떤 점이 그를 웃게 만드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난처한 상황에 그녀는 머리만 잠시 긁적였다.

    “대체 왜 그러시나요?”

    계속 웃기만 한 펠릭스의 반응이 이상하면서도 조금은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그가 웃음을 멈추기 전에 리첼이 먼저 물었다.

    “리첼 양께선 아직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그는 말입니다….”

    펠릭스는 목을 한번 가다듬은 후 리첼의 귓가에 가까이 와서 속삭였다.

    “그의 몸은 현재 여자에게 반응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네?”

    리첼은 그의 말에 놀랐다.

    그녀가 그동안 그 단어의 의미를 모르고 살았던 걸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와 카일이 지금까지 한 행위는 대체 뭐지? 그와 지금까지 한 행위가 그 행위가 아니었던가? 몸 합체가 끝 아닌가?’

    리첼의 머릿속에선 온갖 생각들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분명 그녀와 카일은 정사를 나눈 것이 분명할 터였다. 그녀가 보고 들은 게 있는데 말이다.

    “제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요? 뭐라고요?”

    리첼은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재차 물어보았다.

    사전적 의미가 달라지지 않은 이상 그녀가 생각한 그 뜻이 맞을 테니깐.

    “다시 말씀드리죠. 그는 여성분과 사랑의 행위를 할 수 없는 남자입니다.”

    펠릭스가 그녀에 대해 이상한 오해를 한 것 같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어요?”

    “우연히 과거에 그를 아는 남자를 만났어요. 술집에서 옆에서 말하는 것을요.”

    * * *

    펠릭스가 리첼에게 눈물을 보이며 울던 날.

    펠릭스는 술에 취하고 싶었다. 맨정신으로는 오늘 하루를 보낼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열심히 술을 마시고 있었건만, 그 와중에 옆 테이블에 수상해 보이는 망토 쓴 남자 둘이 신경 쓰였다. 옷차림도 독특한 거 보니 다른 대륙 사람들 같았다.

    두 사람의 대화가 시끄럽기에 거슬렸지만, 술집인데 별수 있나. 조용히 해달라고 하려다 참고 그는 술을 마셨다.

    ―카일 그 녀석. 귀족 가문이었어?

    그런데 귀에 낯익은 이름이 들렸다.

    귀족 가문에 카일. 평범한 이름이었지만 요새 그의 신경을 거슬리는 남자였다.

    리첼이 신전에서 성녀와 싸웠을 때도, 성녀를 내쫓은 일에도 관련이 있는 남자였다.

    게다가 성녀가 카일에게 집착했다는 소문을 들었기에 뭔가 찜찜함을 안겨주기도 했다.

    ―얼굴부터 시작해서 마음에 안 들어. 스펜서 후작가라고 하던데. 가문도 좋더라? 뭔가 모든 축복이 그에게로 몰린 것 같아. 같이 있으면 짜증 난다니깐.

    남자들의 대화를 무시하려 했지만 그들이 지칭하는 남자의 신분이 구체적으로 나왔다.

    스펜서가에서 카일이라니. 그렇다면 제국에서 그는 한 명이었다.

    남자들도 펠릭스처럼 카일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듯했다. 역시 그는 남자의 적이었다.

    ‘그럴 만해.’

    카일의 얼굴이 떠오르자 펠릭스도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중요한 게 기능을 못 하는데 뭔 축복이야. 저주받은 셈이지. 크하하하.

    그 말을 듣고 펠릭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모든 여자를 홀릴 것 같은 외모에 그렇지 못한 몸뚱이라니? 펠릭스는 그 말 자체가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 그 자식이 편지만 두고 말없이 떠났다고 그 스승이 얼마나 화를 냈는지 알아? 그래서 얼굴만 멀쩡한 속 빈 강정이라고 그 스승이 소문내고 다녔잖아.

    남자는 비웃으며 말했다.

    ―아, 나도 들었어. 예전엔 몇 명만 알았는데 지금은 주위에 모르는 사람이 없다던데? 게다가 듣자 하니 카일 그 자식. 여기 제국에 있는 신전의 사제로 들어갔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본인과 어울리는 직업 잘 찾아갔네. 신께 기도드리는 정성이 갸륵해 고쳐주는 거 아냐? 그럼 뭐해. 이미 늦는데. 사제가 그런 기능이 있어서 뭐하냔 말이야. 크하하.

    남자가 통쾌하다는 듯 큰 웃음을 짓자 옆에 앉은 남자도 덩달아 따라 웃었다.

    ―그런 걸 보면 신이 존재하긴 해. 한 사람에게 모든 걸 몰빵한 건 아니니 말이야. 이 제국의 신은 그래도 공평한가 보지?

    펠릭스는 그들의 가볍고도 거친 대화를 계속 엿듣자니 기분이 썩 유쾌하진 않았다.

    하지만 희망이 생기는 것 같아 한편으론 그들에게 고마움을 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술맛이 떨어지는 것 같아 그대로 술집을 나왔다.

    * * *

    리첼은 펠릭스의 말을 듣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아…. 혹시 힐다도 이 사실을 알고 있던 걸까? 룩스 대륙에 있을 때부터 아는 사이라고 했었지.’

    리첼은 힐다와의 대화를 곱씹어 생각해 보았다.

    ―그는 당신이 감당할 수 없는 남자예요.

    그녀는 분명 그런 말을 한 적 있었다.

    그땐 리첼은 그녀가 헛소리한다고 생각했는데 펠릭스의 말을 듣고 보니 헛소리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 당시 성녀의 말한 의미가 뭔지 알 것 같았다. 성녀는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녀는 무슨 자신감으로 본인은 감당할 수 있다는 듯 여유를 부린 걸까?’

    리첼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멈칫했다.

    ‘아… 약. 이전에 다른 약도 먹였다고 했었지? 잘못 조제해서 독이 되었다는 그 약!’

    그러고 보니 처음에 정사를 나눌 때 카일도 그의 것을 보고 놀라는 눈치였던 것도 같기도 했다.

    대신관님의 행동도 이상하긴 했다. 그는 카일이 힐다나 리첼과 밤을 보낼 리 없다는 듯 확신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대신관님 모두 이 사실을 알고 있던 걸까?

    펠릭스의 말을 믿을 수 없으면서도 리첼은 그동안의 일들을 되짚어 정리해보았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카일의 몸은 리첼에게만 반응하는 사실을 말이다.

    그와 몸을 섞은 건 한 번이 아니었다. 그 뒤로 몇 번이나 몸을 섞었으니….

    매번 리첼을 짓궂게 놀리던 카일이 실제론 오로지 그녀에게만 느낀다는 것을 의미했다. 얼굴은 갑자기 확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사랑한다는 말이나 좋아한다는 달콤한 말을 그의 입에서 직접 듣지 않았지만, 리첼은 마치 그의 고백을 들은 것만 같았다.

    “제 말에 민망함을 느꼈을 거라 생각은 하고 있어요. 하지만 사실을 알아야 그에게 끌리는 당신의 마음을 멈출 수 있을 것 같았어요.”

    “….”

    펠릭스가 무슨 말을 하든 리첼의 귀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이제 아시겠죠?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에요. 그러니 이제 그에게 향한 마음을 내게로 다시 돌려줘요. 네?”

    그녀의 마음은 전혀 모르는 펠릭스는 사정하듯 말했다. 마음을 돌리기 위해 솔직하게 말했지만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그는 실수했다.

    카일의 비밀에 대해 알게 된 순간 리첼은 지금 당장 카일을 만나고 싶어졌다. 그리고 나선 방금 펠릭스에게 들은 내용이 사실인지 두 귀로 직접 듣고 싶었다.

    “다… 다음에 다시 이야기해요.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