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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나랑 맞춰 볼래요?-68화 (68/110)
  • 12.

    오늘도 힐다가 시비를 건 영애들 중 한 명의 그녀 앞에서 발을 내밀었다.

    “벗기 귀찮으니까 그대로 닦아줘.”

    “네.”

    닦아달라는 요구에 힐다는 어쩔 수 없이 구두를 닦아야만 했다.

    그녀는 구두를 박박 닦으며 분한 마음을 진정시켰다.

    “아파! 살살해!”

    공짜로 요구하는 주제에 불만까지 하자 힐다는 화가 나 구두를 더욱 세게 문질렀다.

    그러자 그녀의 발이 잠시 붕 뜨더니 그대로 힐다의 얼굴을 가격했다.

    “어머나. 발이 미끄러졌네.”

    “이럴 땐 발이 미끄러진 게 아니라 저도 모르게 발이 올라갔다고 말하는 쪽이 맞죠.”

    뒤에 줄 서 있는 영애가 말했다.

    힐다는 얼얼한 코를 손으로 문질렀고, 그녀를 향해 깔깔거리며 웃는 영애들을 노려보았다.

    일부러 그녀의 얼굴을 가격한 것이 분명했다.

    귀족이란 것들은 매번 고상한 척하는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이렇게 치사하게 행동할 줄 몰랐다.

    “지금 우리를 째려보는 것 같은데? 아직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 같으니 주교님께 말씀드려야 하나요? 그렇다면 가벼운 처벌이 더욱 무거워지려나?”

    그들은 힐다의 시선을 비웃듯 킥킥거리며 웃었다.

    “이 정도로 봐주는 줄 알아. 네가 성녀 직에서 내려오는 걸 기다린 사람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그걸 아니깐 대신관님께서 굳이 이런 일을 시키는 거야. 이런 식으로 우리의 화를 풀라고 말이야. 너도 자존심을 택할지 목숨을 택할지 결정하라고!”

    충고와 함께 두 명의 영애는 힐다가 보는 앞에서 그녀가 애써 닦은 구두를 그 자리에서 버리곤 미리 준비해온 새 구두를 신으며 그곳을 떠났다.

    “아이. 분해!”

    힐다는 영애들이 버리고 간 구두를 씩씩거리며 발로 밟았다.

    하지만 구두만 밟는 것만으로는 화가 풀리지 않았다. 버리고 간 구두를 정리하는 것도 그녀의 몫이었기 때문이었다.

    힐다는 치가 떨릴 만큼 화가 났지만 귀족 영애들 앞에서 내색할 수 없다는 사실이 가장 화가 났다.

    ‘그들에게 복수할 방법이 없나?’

    자신을 괴롭힌 영애들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으나 성녀 직에서 내려온 그녀로선 귀족들을 상대할 힘이 없었다.

    그래서 더 분통했다. 괴롭히는 사람이 한두 명도 아니고 꽤 여럿인 데다가 당하기만 하고 복수할 방법이 없으니 말이다.

    힐다를 일부러 괴롭히러 온 영애들도 있지만 그냥 순수하게 구두를 닦으러 오는 영애들도 있었다.

    그럴 때면 힐다는 그들의 억지로 수다를 들어야만 했다.

    “그거 알아요? 카일 님께서 레녹스가에 자주 방문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던데요?”

    여느 때처럼 귀족들의 수다라 생각했건만 힐다는 듣기 싫은 무언가를 들은 기분이 들었다.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듣고 싶지 않은 대화였지만 왠지 모르게 들어야만 할 것 같았다.

    “설마 두 분이 사귀는 건 아니겠죠?”

    “글쎄요. 요새 클라라 양도 스펜서 가문과 친하다는 소문이 돌기도 해서요.”

    “클라라 양이라면 인정할 수 없는데 저는 리첼 양이라면 그분의 마음이 향하는 것도 이해가 가요. 솔직히 도움도 많이 줬잖아요.”

    “맞아요. 차라리 다른 이에게 빼앗기느니 리첼 양이라면 저는 안심이에요.”

    “약간 엉뚱하긴 해도 심성은 착하잖아요. 게다가 레녹스 공작가이기도 하고요.”

    ‘말도 안 돼!’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힐다가 놀라서 닦고 있던 구두를 그대로 눌렀다.

    “아, 아프잖아. 무슨 짓이에요?”

    구두가 눌린 영애가 소리쳤다.

    “그, 그 얘기 무슨 말이에요? 카일 님이 누구와 잘 되고 있다고요?”

    “아, 알 거 없잖아요. 구두나 제대로 닦아요.”

    “지금 구두 닦게 생겼어요?”

    힐다는 손에 들던 수건을 버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신전 밖을 향해 달려갔다.

    “이, 이봐요!”

    뒤에서 영애들이 황당하다는 듯 힐다를 불렀지만 그녀는 뒤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카일 님의 마음이 누군가에게 향했다고?”

    이해할 수 없는 소리에 힐다는 제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불쾌한 기분이 온몸을 지배하는 것만 같았다.

    “지금 봉사 시간인데 어디를 가십니까?”

    하지만 힐다는 곧바로 성기사에게 들켜 붙잡히고 말았다. 아깝게 신전 문 바로 앞에서.

    아마도 조금 전 구두를 닦으러 왔던 영애들이 성기사에게 일러준 것 같았다.

    “놔요. 지금 나 가볼 곳이 있단 말이에요!”

    힐다가 발버둥을 쳤지만 기사들은 그녀를 놓지 않았다.

    “어디를 가시려고 합니까?”

    성기사의 물음에 발버둥을 치던 힐다의 몸짓이 멈추었다.

    막상 그녀는 갈 곳이 없었다. 어디를 가야 카일을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스펜서가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뿐더러 레녹스가로 갈 수도 없었다. 성녀가 아닌 그녀에겐 귀족의 집에 갈 명분이 없었다.

    한숨을 쉬며 신전 밖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다 문득 눈에 익은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이것 좀 놔요!”

    힐다는 그 사람을 쫓아가려 다시 버둥거렸지만 성기사들은 양쪽에서 그녀를 들어 올렸고, 그대로 봉사실로 걸음을 옮겼다.

    “나, 만날 사람 있단 말이에요!”

    힐다는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며 몸부림쳤지만 기사들의 힘에 눌려 꼼짝할 수 없었다.

    빨리 저 사람에게라도 가야 했건만 그의 모습은 점점 그녀의 눈에서 멀어졌다.

    * * *

    “펠릭스 님 오셨어요.”

    리리스와 경쟁하느라 정신없는 나날들을 보내던 리첼에게 펠릭스가 갑자기 찾아왔다.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근육은 바짝 긴장했고 동시에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진작 정리했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으니 마음 한구석엔 찜찜함이 남아있던 중이었다.

    ‘이번엔 꼭 정리할 거야!’

    지난번 눈물을 보고 마음이 약해져 정리하지 못했지만 리첼은 이번엔 확실히 펠릭스를 정리해야만 한다고 다짐했다.

    인연, 운명이라는 단어와 남자의 눈물에 끌려다니지 말고 단호히 말해야만 했다.

    “제 마음에 부담을 느끼지 말아줘요. 당신을 붙잡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기에 이렇게 얼굴만이라도 뵈러 왔어요.”

    펠릭스는 리첼이 부담을 느낄까 봐 미리 그의 생각을 말해주었다.

    그의 배려는 고마웠으나 그런 배려 하나하나가 그녀가 그를 완전히 끊어내기 힘들게 하였다.

    ‘좋은 사람인데….’ 리첼은 괜히 그에게 상처를 주는 것만 같아서 미안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같은 일 반복할 순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그녀는 펠릭스에게 모질게 말해야 했다.

    “죄송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 마음을 당신께 드릴 순 없을 것 같아요.”

    눈을 마주할 수 없었기에 시선은 바닥을 향해 있었다.

    “대체 왜? 제가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거절하시나요? 당신을 위해 저는 과거를 모두 정리했어요. 그러니 제발 다시 생각해줘요.”

    펠릭스는 이번에도 순순히 물러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펠릭스 님께선 이미 정리하셨다곤 했지만 제가 불안해서요. 과거를 집착하면 안 되겠지만, 사실 펠릭스 님만 보면 자꾸 뺨 맞던 그 날 일이 떠올라요.”

    “지금은 힘들어도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거예요.”

    “제가 겪은 일들이 과거의 추억으로 남으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할 테고, 저는 제 마음속에서 무뎌질 날을 기다릴 자신이 없어요.”

    리첼의 말에 펠릭스는 또다시 상처받은 얼굴을 보였다.

    “이, 이번엔 울어도 소용없어요.”

    행여라도 또다시 그가 눈물을 보일까 봐 리첼은 먼저 못을 박았다.

    눈물에 약해지지 않고, 그에게 질질 끌려다니지 말자고.

    연애에 서툰 그녀가 연애 경험이 풍부한 그를 이길 순 없겠지만 그래도 확실히 말하고 정리하는 게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끊을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마음을 단단히 먹지 않으면 이번에도 끊어내지 못할 것 같았다.

    계속 끌려다녔다간 자꾸만 그가 쳐놓은 덫에 빠져나갈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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