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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나랑 맞춰 볼래요?-62화 (62/110)
  • 11.

    이번 사건으로 리첼은 힐다의 천적이라는 별명도 생겨버렸다. 하는 일마다 훼방 놓았으니 생긴 별명이었다.

    멱살 잡아, 머리채 잡고 싸워, 약 사건도 우연히 알게 되면서 미리 막아, 카일과 연인 관계라는 주장도 어쩌다 보니 리첼이 거짓이라고 밝혀냈으니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녀와 카일에게 있던 일에 대해선 소문이 나지 않았다는 것 정도였다.

    그냥 다들 리첼이 해독약을 먹었을 거라 지레짐작하는 눈치였다.

    대신관이 리첼에게 대놓고 묻지도 않았고, 그날 마부가 증언한 것도 있어서 그럴 것이다.

    ‘조금만 참고 기다리자.’

    리첼은 이번 일이 조용히 넘어갈 때까지 기다리려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이번에도 먼저 소문을 내고 다니는 사람은 그녀의 아버지 레녹스 공작이었다. 아버지 덕분에 관심 없던 사람도 모두 다 알 것만 같았다.

    “제 얘기 좀 하고 다니지 말라니까요!”

    점점 집 안에 고립되어있는 시간이 늘어날 것만 같은 불길한 생각이 들자 리첼은 결국 레녹스 공작에게 항의했다.

    “재밌는 사건은 원래 함께 공유하는 법이란다.”

    하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제 소문이 나도는 게 부끄럽지 않으세요?”

    “내가 왜 부끄럽지? 리첼 넌 네가 했던 행동이 부끄럽다고 생각하느냐?”

    “….”

    공작은 껄껄거리며 웃었다.

    얼핏 들으면 맞는 것 같은데 자세히 생각하면 틀린 말을 하는 레녹스 공작과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결국 리첼은 공작을 설득하는 걸 포기했다. 그를 설득하느니 소문이 잠잠해지길 기다리는 편이 빠를 것만 같았다.

    외출을 포기하자 대신 그녀를 보기 위해 레녹스가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었다.

    일단 제일 먼저 친구 엘시아가 찾아왔다.

    “리첼, 괜찮니?”

    “난 아무렇지도 않아. 그냥 소문의 주인공이 되어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할 뿐이야.”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 네가 나를 도와줬듯이 나도 언제든 네 편이 되어줄게.”

    “말이라도 고마워.”

    엘시아는 그래도 리첼에게 응원이 되는 말이라도 해서 다행이었다.

    그 뒤론 찾아온 영애들은 응원하러 온 영애 반, 비꼬러 오는 영애 반이었다. 게다가 가장 만나기 껄끄러운 클라라도 그녀를 찾아왔다.

    “모턴 가문의 공녀님께서 찾아오셨어요.”

    모턴 가문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리첼의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것만 같았다.

    클라라에게서 어떤 모진 말이 나올지 그녀의 얼굴을 보기 전부터 두려웠다.

    “카일 사제님의 목숨을 구했다고 그의 마음까지 가져갔을 거란 착각은 하지 말아요! 우연한 만남이 계속되었다고 운명이라고 착각하지 말란 말이에요!”

    그리고 역시나 클라라는 리첼의 얼굴을 보자마자 인사를 생략한 채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다.

    남들 눈에는 카일 사제가 우연히 리첼과 엮이는 일이 많아 보여 오해를 한 것만 같았다.

    뭐…. 실제로는 남들이 더욱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지만 말이다.

    “운명이라고 생각한 적 없어요.”

    “그럼 다행이고요! 난 리첼 양과 자꾸 엮이는 거 별로 마음에 안 들어요. 그러니 이번만은 나랑 엮이지 않았으면 해요.”

    그건 리첼도 같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이미 엮였으니 생각만 해도 피곤했다.

    클라라가 레녹스가를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리첼의 머릿속엔 그녀가 남긴 한 가지 단어만이 떠올랐다.

    “우연. 우연이라….”

    부상 입은 그를 구해줬을 때 외에는 카일과 우연히 마주친 일이 없었다.

    차라리 우연한 만남이라도 잦았으면 그가 그녀의 운명이라고 생각할 텐데 오히려 반대였다.

    목걸이 색이 변했다고 해도 그와는 별개로 리첼은 카일과의 만남이 운명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고, 클라라가 리첼에게 그 사실을 확인시켜주고 간 것만 같았다.

    ‘우연한 만남이 잦은 사람은 따로 있는데….’

    우연이라고 하니 리첼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남자가 하나 있었다.

    펠릭스!

    리첼이 그를 떠올리기 무섭게 펠릭스가 곧바로 그녀를 찾아왔다. 그도 신전에서 있었던 일을 들은 모양이었다.

    리첼은 펠릭스를 응접실로 안내했고, 그들이 마주 보며 앉자, 비아가 테이블 위에 차례로 차를 내려놓았다.

    “연락을 기다렸는데 뜻밖의 사건에서 리첼 양의 이름이 언급되더군요. 괜찮아요?”

    “아하하. 그래서 요새 밖을 나가지 못하고 있어요.”

    리첼은 지금 이 말을 사람만 바꿔가며 몇 번이나 반복하고 있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 사이 저를 잊으신 건 아닐까 걱정했어요.”

    펠릭스의 말에 리첼은 속으로 뜨끔했다. 요새 이런저런 일이 있어서 그녀는 실제로 그를 잊고 있었다.

    “….”

    차마 말은 못 하고 미소로 대답했다.

    평소라면 펠릭스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텐데 그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펠릭스와는 있을 때 느껴본 적 없던 미묘한 침묵이 흐르자 리첼은 기분이 묘했다.

    그가 그녀에게 달리 할 말이 있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몇 분간의 침묵 끝에 펠릭스가 ‘흠흠’ 기침 소리를 내며 말했다.

    “리첼 양. 사실 전 이제 하염없이 기다리기 지쳤어요. 제 마음을 직접 말할게요.”

    그리고 리첼의 촉이 맞았다.

    일부러 그녀가 펠릭스를 피하는 것도 눈치챘으니 그는 또다시 고백하러 온 것이었다.

    펠릭스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리첼 앞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잡은 후 손등에 살짝 입을 맞추며 말했다.

    “이젠 정말 제 마음을 받아주시면 안 될까요?”

    리첼은 펠릭스를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가 그녀에게 호의를 갖는 건 정말 고마웠다. 덕분에 즐거운 추억도 생겼었다.

    그치만…. 그에 대한 마음은 그게 다였다. 친구라면 모를까. 그 이상은 힘들 것 같았다.

    “죄송해요. 당신의 마음은 고맙지만 전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아요.”

    차마 펠릭스의 눈을 바라보지 못한 채 리첼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다시 한번 생각해주시면 안 될까요? 저를 놓치면 후회하실 거예요. 지금은 제가 못 미더워 보이겠지만 저와 함께 하는 시간이 늘고, 깊은 관계가 된다면 제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거예요.”

    리첼은 작은 숨을 내뱉었다.

    “죄송해요. 충분히 생각했는데 저는 당신과 좋은 친구로만 남고 싶어요.”

    펠릭스는 또다시 그녀를 설득하려 했기에 이번엔 그의 페이스에 넘어가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리첼은 단호한 말투로 대답했다.

    지금으로선 그녀가 그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이었다.

    “이렇게 뺏길 순 없습니다. 제가 당신을 얼마나 소중히 여겨왔는데!”

    하지만 펠릭스는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는 분하다는 듯 소리를 쳤다.

    그의 표정과 말투를 보니 리첼을 향한 그의 마음은 진심인 것 같았다. 그러니 더더욱 미안했다.

    두 사람의 관계를 질질 끌지 않고 빨리 정리하는 것이 그를 위한 일인 것도 같았다.

    리첼은 또다시 단호히 거절의 말을 하려 했지만 앞에 보이는 남자의 예상하지 못한 모습에 몸이 굳어 입술이 벌어지지 않았다.

    펠릭스의 눈가엔 어느덧 눈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하더니 한 방울이 눈에서 천천히 내려와 뺨에 머무르다 그대로 툭 하고 떨어졌다.

    그것을 시작으로 속눈썹에도 눈물이 송송 맺히더니 차례로, 천천히 그의 뺨을 타고 쏟아지기 시작했다.

    흐르는 눈물방울조차 떨어지기 아까울 정도로 아름다워 보였다.

    ‘사람이 저렇게 아름답게 울 수 있을까?’

    남자의 우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잠시 멈칫한 채로 리첼은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눈물방울만 떨어지던 숨죽인 울음소리는 어느새 흐느낌으로 변하였고 모성애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펠릭스에게서 도저히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당신과 헤어지기 싫어요. 이렇게 우리 관계가 허무하게 끝날 순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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