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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나랑 맞춰 볼래요?-60화 (60/110)
  • 10.

    “일리가 있군요.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약의 효과가 강력하다면 다음날이 되어도 멀쩡하지 못할 텐데요.”

    마부의 말에 주교가 고개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 사이에 구멍을 확인하러 갔던 사제가 돌아왔고, 몸집이 작은 사람이 지나다닐 수 있는 작은 구멍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대신관의 얼굴이 퍼레졌다. 그를 대신해 옆에 있던 주교가 상황을 정리했다.

    “성녀님의 말씀 중 거짓이라고 몇 가지 밝혀졌고, 카일 사제 말씀 중에 거짓이라고 밝혀진 건 없습니다. 게다가 오히려 카일 사제가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이 추가로 알려졌으니….”

    잠시 가만히 있던 대신관은 화가 났는지 주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녀에게 소리쳤다.

    “공녀님 말씀이 전부 사실입니까? 어떻게 성녀라는 사람이 약을 이용해서 사람을 유혹하려 하다니…. 순결 서약서는 처음부터 지킬 생각이 없었습니까? 게다가 신전 내에 몰래 구멍을 파고, 남들 눈을 피해 순결까지 잃다니!”

    “아니에요!”

    대신관이 화를 냈지만 성녀는 끝까지 아니라고 우겼다.

    “그동안 예의가 부족해도 시간이 지나면 차차 나아질 거라 여겼건만 제 판단이 잘못되었군요. 이 모든 잘못은 성녀님을 제대로 뽑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성녀를 향하던 대신관의 시선이 어느새 신도들을 향하며 그는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아니에요. 내 말이 사실 맞다니까요. 카일 사제님께서 택한 건 저 계집이 아니라 저라고요. 저요!”

    대신관이 사과를 했음에도 성녀는 자꾸 자신이 말이 맞다고 우겼다.

    하지만 ‘계집’이라는 단어에 예배당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은 싸늘했다.

    “오늘부로 힐다 양은 성녀 자리에서 박탈되었음을 선언하겠습니다.”

    결국 신전에서는 힐다를 성녀의 자리에서 내치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동안의 무개념 행동을 어떻게든 고치려 노력했건만, 고쳐지기는커녕 사고만 쳤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어, 억울해요! 제 말 좀 들어주세요!”

    힐다가 대신관에게 달려가려 했지만 성기사들이 달려와 그녀를 붙잡았다.

    그녀를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며 대신관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보는 눈이 부족했기 때문에 다음 성녀 선발에 관여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또한 아무리 힐다 양의 행동을 막으려 했지만 몰래 들어온 잘못도 공녀님께 있으니 사후 처분은 서신으로 알려드리겠습니다.”

    대신관의 말이 끝나자마자 성기사들이 각각 힐다의 한쪽 팔을 잡고 들어 올렸다.

    “왜 내 말은 안 믿어주는데요? 카일 님은 저와 연인 사이가 맞다니까요. 룩스 대륙에서부터 만난 사이라고요!”

    “카일 사제님과 연인 사이라는 증거가 있습니까?”

    힐다의 계속된 항의에 주교가 귀찮은 표정으로 물어보았다.

    “카일 사제님이 안다고요. 그쵸? 사제님. 제발 날 사랑한다고 말해줘요. 네?”

    “….”

    주교는 할 말을 잃은 듯 잠시 묵묵부답인 채 성녀를 내려다보았고, 어이없어하던 그의 눈빛은 점점 싸늘하게 변했다.

    “신전을 기만한 힐다 양은 일단 감금의 방에 가두겠습니다. 이후 어떤 처벌을 내릴지는 다른 분들과 상의하고 결정하겠습니다.”

    “이럴 수 없어!”

    힐다는 어떻게든 성기사들을 떨치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성기사들의 힘에 눌려 억지로 감금의 방으로 끌려갔다.

    “안 돼!”

    힐다의 비명소리는 예배당 내 신도들의 웅성거리는 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상황이 정리되었으니 모두 돌아가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지난번과 달리 사제들은 카일 주변에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그를 에워쌌고, 신도들에겐 예배당을 나가줄 것을 부탁했다.

    리첼은 카일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으나 다른 사람들에 이끌려 예배당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까 한 얘기가 전부 사실이에요?”

    “리첼 양, 카일 사제님과는 어떤 관계죠?”

    “아직 뒷얘기 더 있는 거 아니에요?”

    예배당을 나오자마자 많은 영애들이 리첼에게 다가와서 이것저것 물어보려 했지만, 다행히도 레이나가 그들을 막아섰다.

    “아까 신전에서 충분히 상황 설명했으니 질문은 받지 않겠어요. 그러니 저희가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비켜주세요.”

    레이나가 당당하게 리첼의 손을 잡고 그들 사이를 걸어가려 했지만 일부는 계속 그들의 앞을 막아서려 했다.

    그러자 레이나가 싸늘한 눈빛으로 무섭게 노려보았고 그녀의 기에 눌린 영애들이 그제야 길을 내주었다.

    레녹스가로 돌아가는 마차를 타자마자 레이나가 이제야 궁금했던 걸 물어보기 시작했다.

    “언니 뭐야? 대체 뭘 숨기고 있던 거야? 카일 사제님이 언니 방에서 치료받은 것도 뒤늦게 알고 당황스러웠는데 이번엔 뭐? 약이라고?”

    “어쩌다 보니 이런저런 일에 휘말렸어. 아깐 고마웠어. 덕분에 살았어.”

    리첼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카일 사제님을 만나지 못하게 하니깐 당연히 언니에게 와서 물어보려 할 줄 알았어. 물어보는 거 일일이 대답해줄 필요 없잖아. 안 그래? 그리고 내 언니는 내가 지켜야지 누가 지켜.”

    “말만 들어도 든든하네. 역시 내 동생이야.”

    리첼은 믿음직스러운 자신의 동생을 자랑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런데 왜 내게 말을 아무 말 안 해줬어? 섭섭하게.”

    레이나는 아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나도 너무 놀라 네게 말할 경황이 없었어.”

    “피― 핑계 대기는. 아까 신전에서라도 말해줬으면 좋았을걸.”

    “말해줬으면 듣자마자 놀라서 벌떡 일어났을 것 같은데?”

    “그건 그래. 그래도 오늘 이렇게 도와줬으니 다음에 재밌는 일 생기면 꼭 날 불러야 해?”

    “….”

    리첼은 방금 전 레이나를 믿음직스럽다고 여긴 자신의 생각을 취소했다.

    엉뚱한 생각하는 레이나를 보니 픽 하고 웃음이 나왔다.

    “레녹스 공작님의 자식 아니랄까 봐 공작님, 리첼 님, 레이나 님 역시 성격이 비슷하시네요.”

    리첼의 옆에 앉은 비아가 재밌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 순간 두 사람의 쏘아보는 시선이 동시에 비아를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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