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모두 숨을 죽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언니, 갑자기 왜 그래? 정신 나갔어?”
놀란 레이나가 리첼의 손을 잡고 억지로 자리에 앉히려 했다.
“고… 공녀님? 뭐라고 하셨습니까? 다시 말씀해주시겠어요?”
주교도 리첼의 말을 듣고도 믿지 못하겠는지 그녀에게 다시 확인차 물어보았다.
“사제님께서 목격했던 그 여인은 성녀님이 아니라 바로 저라고요.”
리첼은 그녀를 말리려는 레이나의 손을 뿌리치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걸어가는 도중에 레녹스 공작과 눈이 마주쳤지만, 그는 레이나와 달리 흥미롭다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카일 사제님께서는 제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서 제 이름을 끝까지 숨기려 하셨습니다. 사실 저는 그날 몰래 신전에 들어왔었거든요.”
리첼은 카일과 성녀의 뒤에 선 후 말했다.
“공녀님께서 어째서 신전 문을 닫은 시간에 몰래 신전에 들어오셨습니까? 문이 닫혔는데 어떻게…?”
주교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리첼을 바라보며 물었다.
“제가 몰래 신전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따로 있었습니다. 원칙대로라면 야간에 순찰하는 성기사님께 먼저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상황이 급박하다는 생각에 미처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대체 공녀님께서 왜?”
“사실 그날 신전 안에서 일이 있었어요. 쉬쉬하려 했건만 결국 밝히게 되었네요. 일단 제 잘못에 대한 처벌을 받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날 우연히 레녹스 가문의 기사들과 함께 술집에서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리첼은 그녀가 목격한 사실을 그 자리에서 말했다.
일단 카일이 피를 토하며 쓰러진 걸 목격하곤 레녹스가에서 돌본 일부터 시작해서 신전 벽에 작은 구멍 이야기, 그녀가 술집에서 기사들과 목격하고 엿들은 사실들, 그리고 몰래 들어와 약을 막으려 했지만 실패했고, 카일이 그녀를 도와준 사실을 말이다.
대신 카일이 걱정했던 어린 사제의 이야기는 쏙 뺀 채 그냥 독을 먹였다고만 표현했다.
말을 마친 리첼은 뒤돌아서 자신을 바라보는 성녀를 노려보았다.
“사실입니까, 성녀님?”
“아… 아니에요. 저건 다 거짓말이에요. 일부러 저를 모함하려고 꾸며낸 얘기라고요!”
주교의 물음에 성녀는 앞으로 고개를 돌려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증인이 필요하다면 부르겠어요. 일단 저와 같이 목격한 레녹스 가문의 기사들과 마부는 지금 이 자리에서 부를 수 있어요. 이들 외에 또 다른 증인이 필요하다면 다음에 데려오도록 할게요.”
성녀는 스스로 제 발목을 잡고 있었다. 처음부터 작정하고 증거를 만들어 치밀하게 준비했다면 모를까 증인이 있는 이상 부정해봤자 좋을 것 하나 없었다.
성녀의 말이 하나라도 거짓으로 밝혀지게 되고, 카일의 말에 거짓이 없다면 그녀의 이전 증언도 의심을 받을 테니 말이다.
성녀는 이를 모를 정도로 멍청한 건지 아니면 현실을 부정하는 건지 알 수는 없었다.
“그런데 공녀님. 사건 발생하기 전엔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다고 이해하더라도, 왜 나중에라도 그 사실을 밝히지 않으셨습니까?”
주교는 리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물었다.
“성녀님께서 스스로 잘못을 뉘우칠 거란 헛된 기대를 하기도 했고, 신전에서도 그런 말도 안 되는 사건이 있었다고 알려진다면 좋을 것 같지 않아 숨긴 점 죄송합니다. 대신관님께라도 따로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리첼이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하아. 카일 사제가 왜 공녀님의 성함을 밝히지 않으려 한 이유는 알 것 같군요. 목숨을 구해줄 정도로 큰 도움을 받았으니 갚으려 했나 봅니다. 하지만 카일 사제님만이라도 대신관님께라도 말씀드렸어야죠. 실망입니다.”
“그 점은 저도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 교육 부족이라 생각하여 더 열심히 성녀님의 잘못된 생각과 행동을 바꾸려 했지만 제 능력이 부족하여 이 모든 일이 벌어진 점 사죄드립니다.”
카일은 역시 고개를 푹 숙였다.
‘어쩌다 성녀같이 이상한 여자한테 걸려 가지곤….’
리첼은 잘못도 없으면서 사과하는 카일의 모습을 보니 불쌍하기도 했다.
“일단 증인을 부르십시오. 그리고 진짜로 신전 주위에 작은 구멍이 있는지도 확인하고 오십시오.”
“네!”
주교의 말에 사제 한 명이 곧바로 나갔고, 그때 그 자리에 있던 성기사 중 한 명이 손을 들고 말했다.
“카일 사제님께서 피를 흘리시는 모습을 저도 보았습니다. 신전 안으로 들어가서 약을 가져오려는 그사이에 카일 사제님께서 사라지셨고, 며칠 후에 신전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성기사의 증언에 예배당에 신도들의 웅성거림이 더욱 커졌다.
앉아있던 대신관은 일어난 후 조용히 해달라고 말하며 작은 숨을 내쉬었다.
“이곳에서 증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당시에도 듣긴 했지만 모든 상황을 듣고 기사님의 증언을 들으니 새롭게 들리는군요.”
대신관은 성기사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카일을 바라보았다.
“카일 사제님께서 그 당시 실수로 독에 중독되었다고만 말씀하셨습니다. 기억하십니까? 그때 성녀님이 범인이라고 말씀하셨으면 좋았으련만…. 일이 이렇게 커지다 보니 아쉬움이 남습니다.”
“저도 일이 이렇게 커질 거라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신전 내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고 성녀님도 고의로 제게 독약을 먹인 건 아니라 생각했습니다. 제가 무사한 모습을 보며 가장 먼저 안도하신 분이 성녀님이셨기에 의도하지 않은 실수였다고 여겼습니다.”
“맞아요. 그건 실수였어요. 약의 조제를 잘못해서 그런 것뿐이라고요!”
카일의 말에 성녀가 거들며 소리쳤다.
오히려 말하지 않는 편이 나았으련만. 굳이 자신의 결백을 해명하려다 그녀는 카일에게 독약을 먹인 사실을 실토해 버렸다.
대신관과 그 옆에 있던 주교들이 놀란 듯 성녀를 바라보았지만 그녀의 얼굴은 당당했다.
이윽고 프랭크가 예배당 안으로 들어왔다.
“저는 황실 제3 기사단이자 레녹스 기사단에 소속된 기사 프랭크입니다.”
“네. 말씀하십시오.”
프랭크가 인사하자 대신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와 함께 술집에서 성녀님이 말씀하시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원래는 제가 직접 성녀님의 행동을 저지하려 했지만 신전에 들어올 수 없기에 밖에서 대기만 했습니다.”
이윽고 리첼과 함께 들어갔던 마부가 들어왔다.
“저는 레녹스 가문에 소속된 마부입니다. 보다시피 몸집이 작아 아가씨와 함께 신전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 눈으로 목격했습니다. 성녀님께서 작은 병을 들고 카일 사제님께서 계시는 예배당으로 들어가려던 것을요.”
“저런….”
마부의 말이 너무나 황당했는지 듣고 있던 대신관의 입에서 탄식이 나왔다.
“아가씨께서 막으려 했지만 마시는 약이 아니라 향에 취하는 약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습니다. 병이 깨지며 아가씨와 성녀님 두 분 다 약의 향을 맡으셨습….”
“저런 약은 어디서 구했대요?”
“성녀가 아니라 마녀 같네요.”
마부의 진술에 놀란 신도들이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웅성거리며 제 각각의 생각을 말했고, 리첼의 귓가에도 들려왔다.
점점 시끄러워지자 주교가 손을 들어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내자 예배당 안이 조용해졌다.
주교가 마부에게 계속 얘기를 하라며 고개를 끄덕이자 마부는 멈췄던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사제님께서는 해독제가 있다며 아가씨를 해독제가 있는 곳으로 데려가셨고, 성녀님은 제가 방까지 직접 모셔다드렸습니다. 그 후 아가씨께서 몸을 회복하신 다음 저와 함께 레녹스가로 돌아갔습니다.”
증언을 마쳤지만 마부는 아직 할 말이 더 남았는지 말할지 말지 망설이는 눈치였다.
“할 말이 있으면 편히 하십시오.”
주교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자 마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녀님의 순결은 그날 잃은 게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이건 제 추측일 뿐이지만, 성녀님은 약의 효과가 강력해서 괴롭다며 제게 도움을 청하셨지만 저는 거절하며 성녀님의 방을 나왔습니다. 해독제가 있었다면 제게 도와달라 말을 안 하셨겠죠. 게다가 다른 사제분들은 성녀님의 몸 상태에 대해 알지 못하는 걸 보고 그리 생각했습니다. 이건 제 생각일 뿐이니 그냥 참고만 해주십시오.”
“모함이에요!”
마부의 말에 반박하려는 듯 성녀가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