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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나랑 맞춰 볼래요?-57화 (57/110)
  • 10.

    얼마 전 성녀를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 상태가 조금 이상하긴 했다. ‘운명’이란 단어에 집착했고, 상대방의 감정과 상관없이 제 감정만 밀어붙이기만 했으니 말이다.

    불길한 일이 일어날 것 같아 불안했는데 역시나 엉뚱한 일이 터뜨리고 만 것이다.

    무언가 일을 벌일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런 식으로 카일의 명예를 더럽힐 줄이야 꿈에도 몰랐다.

    그를 좋아하는 마음이 컸기에 명예는 지켜줄 거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그래서 리첼은 성녀가 더욱 괘씸했다.

    사랑한다면서 왜 상대방에게 흠집을 내려 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저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가볼게요.”

    “네? 네네.”

    리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클라라는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리첼 양은 여전히 엉뚱하네요.”

    “설마 신전으로 달려가는 건 아니겠죠?”

    “설마요. 그럴 리가요. 소식만 들으면 될 텐데 그런 번거로운 일을 하겠어요?”

    뒤에선 뒷담화가 들려왔건만 리첼은 그 말들을 무시한 채 마차를 향해 최대한 빨리 달려갔다.

    * * *

    신전에 도착한 후 리첼은 사건이 발생한 예배실로 들어가려 했지만 문 앞에서 성기사들이 막아섰다.

    그녀 말고도 소문을 듣고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아무나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았다.

    “혹시 레녹스가의 공녀님 아니십니까?”

    리첼이 고개를 들어 안을 보려고 기웃거리자, 다행히 그녀의 얼굴을 알아본 성기사가 그녀만 예외로 안에 들여보내 주었다.

    리첼이 자주 방문하기도 하고 기부금도 많이 내는 신도라 가능했다.

    신전 안으로 들어선 순간 난감한 얼굴을 한 대신관과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사제와 성녀의 모습이 보였다.

    예배당 안은 엄숙한 분위기 속에 무거운 공기만 흐르고 있었다.

    “두 분이 지난밤 같은 방에 머물렀던 걸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니까요.”

    증인으로 보이는 사제가 리첼이 전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는 지난밤 카일과 성녀가 같은 방에 있었다는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제 방에 성녀님께서 들어오신 건 맞으나 곧바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고 카일은 그 사실은 인정하고 있었다. 다만 아무 일도 없다는 주장과 함께 말이다.

    “저는 일반 여성으로 돌아가 밤새 그와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반면 성녀는 그와 같이 밤을 보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의견 대립이 팽팽한 데다 증인의 말은 애매하기에 대신관은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성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신전과 두 사람 모두 다 망신이고, 거짓이라면 카일의 명예와 관련된 일이기에 성녀만 파문시킨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스펜서가에서 이를 문제로 삼아 들고 일어난다면 그 또한 큰일이었다.

    주장이 서로 다르기에 대신관과 주교, 사제들은 누구의 말을 들어줄지 난감한 상태였다.

    “이대론 아무런 진전이 없을 것 같으니 오늘은 일단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혹시라도 다른 증인이나 증거가 나타난다면 제게 데려오십시오. 그리고 기사님들은 성녀님을 먼저 방에서 모셔다드리십시오.”

    결국 대신관은 당장 사건의 결론 짓는 것을 보류했다. 리첼이 오자마자 상황은 종료된 것이다.

    다만 성녀가 또다시 무슨 사고를 칠까 걱정되었는지 대신관이 성기사에게 그녀를 방에 데려가라고 명령했다.

    성기사에게 명령하는 그의 모습도 참으로 힘들어 보였다. 얼마 전 봤을 때보다 몇 배는 더 늙어 보이기도 했다.

    많은 이들이 아쉬운 마음으로 밖으로 나갈 때 리첼은 그들을 헤치며 카일에게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그녀가 가까이 가기도 전에 그는 이미 여러 여성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진실은 곧 밝혀질 거예요. 거짓말하는 것들은 진짜 천벌 받아야 해요.”

    “저도 사제님의 결백을 믿어요.”

    “힘내세요!”

    다들 한마디씩 카일에게 응원의 말을 건네주었고, 그는 한 명 한 명 감사하다며 고개 숙이며 인사를 했다.

    졸지에 리첼은 그를 응원하는 영애들 줄의 제일 마지막에 섰다. 한참을 기다리다 겨우 카일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어느새 예배당에는 카일과 리첼, 그리고 정리하는 몇몇 사제들만이 남아 있었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리첼을 보자마자 카일이 말했다. 그의 얼굴은 몇 시간 사이 수척해 있었다. 안쓰러운 마음에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러자 카일의 두 손이 그녀의 손을 감쌌고, 그는 잠시 음미하듯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

    “잠시 충전해도 되겠습니까?”

    눈을 뜬 카일의 입에서 넌지시 흘렀다. 그의 말에 리첼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리하던 사제들도 나가고 예배당 안에는 두 사람만 남아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카일의 손이 천천히 다가오더니 그녀를 와락 안았다.

    아무렇지도 않을 줄 알았으나 그의 몸은 잘게 떨고 있었다. 리첼도 손을 뻗어 그의 등을 감쌌고 토닥였다.

    그녀의 뺨에 단단한 가슴이 맞닿자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빠르게 뛰고 있는 카일의 심장 소리가 느껴졌다.

    정신 이상자 같은 성녀 때문에 그도 마음고생을 많이 한 것 같았다.

    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하고 억울한 누명도 씌우고….

    “괜찮아요. 성녀의 거짓말은 금방 들통날 거예요. 거짓말한 것 내가 뻔히 다 아는데요. 뭘.”

    텅 빈 예배당에서 리첼의 목소리만이 잘게 울려 퍼졌다.

    “말만이라도 감사합니다.”

    카일이 그녀를 더욱 끌어안았다. 그들은 그렇게 잠시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잠깐의 포옹이지만 리첼은 서로의 체온을 느끼는 것이 그에게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 * *

    다음날 신전에서 일어난 사건은 사교계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역시나 스펜서가에선 신전에 일어난 사건에 대해 듣자마자 바로 항의 서신을 보냈다는 소식과 진행 과정을 계속 직접 눈으로 보고 싶다는 신도들의 서신이 빗발쳤다는 이야기가 동시에 들려왔다.

    신전에서는 조용히 처리하고 싶었겠지만, 호기심 많은 신도들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귀족 신도들의 심기를 함부로 거스를 순 없었기에 신전에서는 결국 기부금을 많이 내는 신도 순으로 입장을 가능하게 했다.

    그래서 리첼도 비교적 앞자리를 배정받아 예배당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비아와 둘이서만 오고 싶었지만, 레이나가 그녀도 직접 눈으로 보고 싶다며 떼를 쓰는 바람에 결국 그녀도 같이 와야 했다.

    레녹스 공작은 따로 마련된 앞쪽 자리에 미리 와서 앉아있었고, 리첼 일행은 중간 조금 앞자리에 앉았다.

    “이 재미난 구경을 지난번에 언니 혼자서 봤단 말이야?”

    레이나의 입에선 볼멘소리가 흘러나왔다.

    “지난번엔 클라라 양이 초대한 모임에서 갑자기 듣게 돼서 네게 알려줄 시간이 없었어. 그래서 오늘은 너를 데려왔잖아.”

    리첼은 한숨이 푹 나왔다. 말 많은 레이나가 옆에서 또 무슨 이야기를 쫑알거릴지 걱정이었다.

    선택받은 신도들이 모두 들어오고 난 후 10분 정도 지나자 대신관과 사제들, 그리고 카일과 성녀가 들어왔다.

    지난번처럼 두 사람은 중앙에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오늘은 새로운 증인이 나타났기에 이곳에 부르기로 결정했습니다.”

    지난번에 충격을 받았는지 대신관은 앞으로 나서지 않고 뒤에 앉아있었고, 그 대신 주교가 앞으로 나와서 말했다.

    곧이어 보라색 머리의 사제 한 명이 예배당으로 들어왔다.

    “저는 뒤늦게 사건 이야기를 듣고 제가 봤던 기이한 장면이 떠올라 이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사제의 눈은 잠시 주교와 마주쳤고, 주교가 계속 말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이전 증인과 다른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한 달 전쯤에 카일 사제님께서 어떤 여성분을 안고 방으로 들어가는 걸 목격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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