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도 나랑 맞춰 볼래요?-56화 (56/110)
  • 10.

    “아닙니다.”

    대신관의 말이 끝나자마자 카일은 그 즉시 대답했다. 그러자 시끌벅적한 예배당 안은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이렇게까지 자리를 마련해줬는데 왜 자꾸 부정하는 거야?’

    모두의 앞에서라면 카일이 그녀를 사랑한다고 솔직히 고백하리라 생각했지만, 예상과 다른 그의 답변에 힐다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이젠 사제님의 마음을 숨기지 말고 말씀하세요. 자꾸 마음을 숨기려 하니 제가 이렇게 자리를 만들었잖아요. 저를 사랑하시면서 왜 자꾸 부정하시는 거예요? 이젠 솔직해질 때가 되었잖아요.”

    “….”

    참다못한 힐다가 간절하게 말했지만 카일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대신관은 당황스러워 잠시 말하는 것 잊은 것처럼 굳은 채 그냥 서 있기만 했다.

    “그렇다면 일단 성녀님의 말씀이 맞는지 아닌지 확인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요?”

    제일 앞에 앉아있던 노란 머리의 주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제야 대신관이 정신을 차린 듯 작은 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일단 모두 돌아간 다음에 진행해야 할 것 같습니다.”

    대신관의 말에 앉아있던 신도들이 일어나서 항의하기 시작했다.

    “우리도 무관하지 않은 일이에요.”

    “내가 매년 내는 기부금이 얼만데 무관하다고 하는 건가요?”

    “우리도 알 권리가 있다고요!”

    결과가 궁금한 신도들이 나갈 생각을 하지 않고 각자의 목소리를 내자 예배당은 더욱 혼잡해지기 시작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일단 다들 앉으신 다음, 다음 일을 진행하겠습니다. 대신 정숙 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대신관의 말에 다들 입을 다물기 시작하며 예배당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일단 수정석을 들고 오세요.”

    대신관의 말에 제일 앞줄에 앉아있던 갈색 머리 사제가 일어나서 어디론가 들어가더니 사람 머리 크기의 동그랗게 세공된 수정석을 들고나왔다.

    성녀가 처녀인지 아닌지 알아보는 신전에서만 사용하는 도구였다.

    “일단 성녀님께서 처녀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성녀님, 일단 앞으로 나오십시오.”

    사제의 말에 힐다는 앞으로 나갔고, 그가 시키는 대로 수정석에 손을 갖다 댔다.

    그 순간 수정석은 뿌옇게 연기가 나기 시작하더니 이내 잿빛으로 변했다.

    다들 같은 마음으로 조용히 지켜보던 신도들의 입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붉은색을 띠어야 처녀임을 나타내는데 잿빛으로 변했으니 말이다.

    그 말은 즉 힐다는 성녀 자격이 박탈되었음을 의미했다.

    * * *

    같은 시각.

    리첼은 다른 영애들과 차 모임을 즐기고 있었다.

    “리첼 양은 요새 약혼자를 고르고 있다는 소문이 들리고 있던데요?”

    “그래요? 전 아직까진 생각 없는데 왜 그런 소문이 난 줄 모르겠어요.”

    “그래요? 전 펠릭스 님과 잘 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걸요? 역시 오라버니 같은 분을 고르셨네요.”

    모임 주최자인 클라라의 얼굴은 웃고 있지만 비꼬는 듯한 말로 끝을 맺고 있었다.

    공작가 집안인 그녀는 어째 평소에 리첼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요새 친해지긴 했지만 펠릭스 님과 아무 사이 아니에요.”

    리첼은 일단 그와의 사이를 부정했다.

    “그래도 여자관계만 빼면 괜찮은 분이잖아요. 리첼 양과 잘 어울릴 거라 생각하는데요?”

    두 사람의 눈치를 보던 마가렛이 괜히 한마디 거들었다.

    “클라라 양은 요새 관심 있는 남성은 없으세요?”

    리첼은 제게 관심을 돌리려 화제의 대상을 바꾸었다.

    “전… 요새 스펜서 후작님과 친해졌답니다.”

    클라라는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바로 대답했고, 그녀의 말에 다른 영애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머. 부러워요. 조만간 스펜서 가문과 연을 맺을 수도 있겠네요.”

    마가렛이 부러운 눈초리로 말했다.

    “카일 사제님께서 조만간 그만두신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사실이에요? 클라라 양 때문에 그만두는 건가요?”

    참석자 중 한 명인 달리아가 묻자 클라라의 어깨를 가볍게 으쓱하며 잘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실이에요. 후작님께 직접 들은 이야기라 확실해요.”

    클라라의 말에 리첼은 어이없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카일은 비밀로 하길 원했는데 어디서 소문이 퍼졌나 했더니 그의 아버지가 범인인 것 같았다. 스펜서 후작도 레녹스 공작처럼 입이 가벼운 모양이다.

    ‘어휴, 또 엮이다니. 클라라가 카일 사제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을 줄이야.’

    졸지에 리첼은 또다시 클라라와 경쟁하게 될 거란 상상만으로도 한숨이 절로 났다.

    예전부터 클라라는 리첼과 잘 맞지 않았다. 이상하게 그녀는 리첼에게 묘한 경쟁심을 갖고 있었기에 피곤했다.

    클라라는 무엇이든 리첼을 이기려고 했다. 기초지식, 예절, 춤, 노래 등등.

    전체적으로 실력이 엇비슷하고 같은 공작 가문이라서 더욱 경쟁심을 가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클라라는 만날 때마다 리첼을 깎아내릴 말을 찾으려 했기에 그런 그녀를 호의적으로 보긴 힘들었다.

    지금 모임도 클라라가 모턴 공작가라 어쩔 수 없이 참석한 것뿐이었다. 질문 내용으로 보아하니 리첼과 펠릭스의 관계가 궁금해서 부른 것 같지만 말이다.

    그때였다. 시종 한 명이 허겁지겁 달려와선 말을 할지 하지 말아야 할지 초조한 기색으로 클라라의 눈치를 보며 섰다.

    “무슨 일이야?”

    클라라는 갑자기 달려온 시종의 모습이 신경에 거슬렸는지 짜증나는 표정으로 그가 건네주는 서신을 받았다.

    받은 서신을 읽다가 그녀는 갑자기 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얼굴은 점차 붉어지고 있었다.

    ‘대체 어떤 내용이 쓰여 있기에 그렇게 놀라지? 누가 모턴 가문을 모욕하기라도 한 걸까?’

    리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아. 지금 신전에서 재밌는 일이 벌어지고 있대요. 오후 예배에 참석했던 플로라 양이 제게 급하게 서신을 보냈어요.”

    하지만 클라라의 입에선 예상외의 장소가 나왔다. 신전이라니.

    “대체 무슨 일이 있기에 신전에서 실시간으로 서신이 오나요?”

    클라라와 리첼을 제외한 나머지 영애들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클라라를 바라보았다.

    “현재 성녀가 그 직을 박탈당했대요. 이제 처녀가 아니라서요.”

    “아. 그 성녀요? 저도 몇 번 본 적 있지만, 어찌나 무례하던지.”

    “결국 쫓겨날 줄 알았네요. 그런데 그 이유도 불순하다니. 그럴 줄 알았어요.”

    “매일 헛소리를 지껄이더니. 쯧.”

    다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성녀에 대한 험담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리첼은 그 말을 듣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기분이었다.

    얼마 전 만났을 때 성녀의 상태가 조금 이상해 보여서 그런 건지 모르겠으나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런데 그 상대가 카일 사제님이라네요. 믿을 수가 있어야지.”

    “!”

    클라라의 말이 끝나자마자 영애들의 시선이 클라라를 향했고, 그녀는 제 분을 못 이기고 읽고 있던 편지를 손으로 쫙쫙 찢어버렸다.

    “….”

    그 순간 모임에 참석한 5명의 영애들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듣고도 믿을 수 없는 말에 다들 할 말을 잃은 탓이었다.

    고요한 가운데서도 영애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카일 사제가 이야기가 나왔으니 더욱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전 믿을 수 없어요. 그럴 리가 없을 텐데요? 아리따운 귀족들을 두고 하필이면 그런 말라깽이 평민한테 눈이 돌아가겠어요?”

    달리아가 먼저 침묵을 깨며 흥분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저도 못 믿겠어요.”

    “다른 사람도 아닌 그런 여인에게 빼앗기다니 자존심 상해요.”

    덩달아 마가렛과 바이올렛이 한마디 거들었다.

    “그쵸? 전 사실이 아닐 거라 생각해요. 스펜서 후작님께선 그런 소리 한마디도 없으셨는걸요. 아셨다간 큰일 날 테지요.”

    클라라도 이를 악물며 화를 참아가며 말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리첼만 아무 말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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