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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나랑 맞춰 볼래요?-53화 (53/110)
  • 09.

    “…성기사님을 부르겠습니다.”

    원하는 대답이 들려오기는커녕 그녀의 애원에도 카일의 같은 말만 반복했다.

    그가 왜 자꾸 운명을 거스르려 하는지 힐다는 이해할 수 없었다.

    단호한 카일의 말투에 그녀는 애써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가려 했건만 말을 내뱉을수록 점점 끓어오르는 흥분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잘 생각해 보세요? 네? 이 세상에서 당신에 대해 제일 잘 아는 여인은 저라고 생각해요. 안 그래요?”

    진심을 다해 이야기했건만 상대방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카일은 신의 사자라는 직책 때문에 마음과 달리 그녀를 밀어내는 것만 같았다.

    “어떤 고난이나 역경이 있어도 우린 이겨낼 수 있어요.”

    힐다가 계속 애걸했지만, 남자의 모진 손이 그녀를 내쳤고, 그는 문 앞까지 걸어가 문을 열려고 했다.

    힐다는 너무나 화가 난 나머지 점점 자신의 화를 주체할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이런 말까지 하기 싫었다. 하지만 말을 내뱉도록 유도한 건 그였다. 그래서 어쩔 수 없었다.

    “지금 나를 내쫓으려 한다거나 성기사님을 불러온다면 나… 당신의 비밀 모두 앞에서 폭로할 거예요. 알겠어요? 나만이 알고 있는 비밀인데 밖으로 퍼져나가도 되겠냐고요!”

    걸어가던 카일의 발걸음이 그대로 멈추었고 잠시 그의 몸이 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아마도 망설이는 중일 것이다.

    ‘지금이야!’

    힐다는 카일에게 다가가서 또다시 그의 양팔을 붙잡았다.

    “나도 당신의 비밀이 퍼져나가는 것 원하지 않아요. 나를 받아줘요. 아직 순결 서약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그러니 우리에겐 아직 시작할 기회가 있어요!”

    카일의 팔을 잡고 있던 힐다의 손은 미끄러지듯 점점 아래로 내려왔다.

    그녀는 길게 덮여 있는 검은색 긴 상의를 들어 올렸고, 눈에 보이는 그곳에 손을 댔다.

    그녀의 예상과 달리 아무런 반응도 없는 그의 몸을 바라보니 힐다는 눈물이 핑 돌 것 같았다.

    ‘아니야. 할 수 있어.’

    힐다는 어떻게든 그를 자극하려 애썼다.

    “….”

    신음 소리라도 내주었으면 좋겠지만 그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그 때문에 힐다의 마음은 점점 조급해져만 갔다.

    그녀는 일어서서 카일과 입맞춤을 하려 했지만 그의 손이 그녀의 입술을 저지했다.

    “왜?”

    “….”

    힐다가 카일을 바라보았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아니야. 나를 막을 리 없어.’

    힐다는 다시 한번 키스를 시도했지만 여전히 그의 손이 그녀의 입술을 가로막았다.

    ‘입술을 다쳤나?’

    입술이 거부당한 걸 인정할 수 없는 힐다는 그저 그녀가 좋을 대로 생각했다.

    ‘입술이 안 되면 다른 곳을 유혹하면 돼.’

    힐다는 카일의 사제복의 단추를 하나하나 풀기 시작했다.

    그러자 매끈한 피부와 함께 그의 단단한 근육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그의 맨가슴을 천천히 더듬으며 어떻게든 자극을 가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싸늘한 표정과 함께 몸의 상태 또한 여전했다.

    여전히 아무런 변화가 없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도 그녀를 좋아하는데. 이럴 순 없었다.

    “옷 위라서 그래. 그래 옷을 벗기면 되는 거야.”

    힐다가 허둥지둥 카일의 바지를 내리려고 한 그 순간 가만히 있던 카일의 손이 힐다의 손을 잡았다.

    “아무리 해도 소용없습니다.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했지만 제 생각이 짧았나 봅니다.”

    “아니.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힐다의 말에 카일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당신께 기회를 드린 적도 없을뿐더러 현실을 알려드리려고 가만히 있던 것뿐입니다. 이미 충분히 아셨을 거라 생각합니다만.”

    “아니. 이럴 수 없어요! 그 계집애랑 나랑 무슨 차이길래 이래요?”

    힐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분명 그는 그 계집이랑 하는 걸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는데. 계집이라는 말이 나오자 카일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성녀님께선 말을 함부로 하셔선 안 되지요. 솔레아 신께서 언제 어디서든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항상 언행에 조심하십시오.”

    “누누이 이야기하지 않았나요? 제가 성녀가 된 이유는 당신 곁에 있고 싶다고 말이에요. 왜 이리 제 진심을 몰라주시나요?”

    힐다는 카일이 그녀의 진심을 알아주길 원했다. 그만 있으면 다른 건 다 필요가 없었다. 그러니 제발….

    “대신관님께서 들으시면 섭섭하실 겁니다. 불순한 마음으로 성녀가 되기로 결심한 건 아무래도 괜찮지만 성녀라는 직책을 받아들인 지금은 그런 마음을 접으라고 제가 항상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여전히 성녀님께는 많은 교육이 필요하군요.”

    하지만 돌아오는 카일의 대답은 확고했다.

    “아니요. 성녀의 혜택을 포기하더라도 나는 당신을 선택할 거예요. 당신만 내게 확신을 준다면 난 성녀 따윈 언제든 버릴 생각이에요.”

    “이제 서로가 하고 싶은 말은 마친 것 같으니 방에 가셔서 잠자리에 드시는 건 어떨지요, 새벽에 일찍 일어나기엔 시간이 짧습니다.”

    “저… 당신의 비밀을 내일 당장 폭로하겠어요!”

    힐다는 자꾸만 말이 통하지 않는 것 같자 카일을 협박했다.

    “제 얘기를 다른 분에게 퍼뜨린다고 해도 원망하진 않겠습니다. 일단 사실이니까요. 그러니 이만 돌아가십시오.”

    하지만 협박은 통하지 않았다. 냉소적으로 내려간 입꼬리와 함께 무덤덤한 말투가 그의 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힐다는 끝까지 인정하고 싶지 않아 나가지 않으려 버텼지만 결국 카일의 강압적인 힘에 의해 그녀는 방 밖으로 내쳐지고 말았다.

    “좋은 꿈 꾸십시오. 새벽 예배 때 뵙겠습니다.”

    카일는 끝까지 그녀에게 냉대했다.

    그의 방 앞에서 힐다는 눈가에 차오르는 눈물을 닦을 여력이 없었다.

    그녀는 그저 닭똥 같은 눈물만 뚝뚝 흘리며 자신의 방으로 천천히 돌아갈 뿐이었다.

    힐다는 밤새 한숨도 잘 수 없었다. 탱탱 부은 눈으로 그녀는 새벽 예배에 참석해야만 했다.

    그녀와 같이 잠을 충분히 자지 못했을 카일은 그녀와 달리 새벽부터 생기가 넘쳤고, 시선을 빼앗길 정도로 아름다웠다.

    힐다는 그와 눈을 마주치려 시도했지만 자꾸만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마음이 점점 불안해져만 갔지만 그래도 교육 시간에는 카일을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때 다시 이야기해보겠다고.

    하지만.

    “오늘부터 교육 담당이 저로 바뀌었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카일 사제님은 어디 가고 평소 그녀에게 콧수염을 자랑하는 제라드 사제가 눈앞에 있었다.

    “무슨 소리예요? 제 담당은 카일 사제님이에요. 그를 불러주세요.”

    말도 없이 담당이 갑자기 바뀌는 걸 인정할 수 없었기에 힐다는 제라드를 무시한 채 카일을 찾으러 가려 했다.

    “그러니깐 오늘부터 저로 바뀌었다고요!”

    그러자 제라드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아니요. 전 카일 사제님께 교육받을 건데요?”

    제라드 때문에 가려던 길이 막히자 힐다는 그를 노려보았다.

    “사제님께서는 사정이 있어서 더 이상 성녀님을 가르칠 수 없어서 저로 바뀌었다고요!”

    제라드는 답답하다는 듯 못마땅한 시선으로 힐다를 바라보았다.

    “말도 안 돼요. 무슨 사정이요?.”

    “개인 사정이라 저도 잘 모릅니다.”

    “카일 사제님 다시 데려와요! 당신에게 배우기 싫단 말이에요!”

    힐다는 눈에 힘을 주며 제라드를 더욱 매섭게 쏘아보았다.

    “아무리 교육해도 성녀님의 태도가 변치 않는다기에 대신관님께서 같은 평민 출신인 저를 담당자로 변경하셨습니다.”

    “같은 평민 출신이라뇨? 전 이제 평민이 아닌데요?”

    힐다는 제라드와 같은 취급을 받자 기분이 상했다.

    “평민 맞으십니다. 지위만 성녀일 뿐. 대신관님께선 제가 그나마 성녀님과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기에 성녀님의 이상한 행동을 이해해 줄 수 있고, 예의도 더 빨리 배울 수 있게 도와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셨나 봅니다.”

    제라드는 힐다가 들으라는 듯 ‘평민’이라는 단어와 ‘이상한’이라는 단어에 일부러 힘을 주어 말했다.

    “싫어요. 싫다고요!”

    잠깐만 이야기해보아도 알 것 같았다. 그와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을.

    “빨랑 카일 사제님 데려와요! 제라드 사제님은 싫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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