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앗!”
그때 숲속에서 느껴졌던 누군가의 기척이 성녀였던 모양이다. 리첼이 잠시 멈칫하자 성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당장 사용을 멈춰요! 이 이상 사용했다간 나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성녀의 허무맹랑한 소리에 리첼은 할 말을 잃었다. 약물을 사용한 사람은 성녀였다.
‘본인이 약물을 사용한다고 상대방도 똑같을 거라 생각하다니….’
“가만있지 않으면 뭘 어떡할 건데요? 설마 겨우 이런 이야기 하려고 온 건 아니겠죠?”
성녀와 대화를 나눌수록 아무 의미가 없다고 느껴졌다. 지난번처럼 화풀이하러 온 것만 같았다.
“겨우 이런 이야기라니. 당신에겐 가벼운 장난일지 몰라도 내겐 미래가 달린 문제예요!”
‘미래라니? 대체 어떤 미래를 꿈꿨기에?’
성녀의 말을 들을수록 더욱 기가 막혔다.
“당신이 얼마나 여우짓을 하며 그를 꾀어냈는지 몰라도 그와 난 운명으로 연결되어 있는 관계예요. 그러니 당신이 계속 방해해도 우리 사이를 갈라놓을 수 없다고요! 난 당신에게 이 말 하려고 왔을 뿐이에요.”
자꾸 운명이라는 단어가 성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카일이 전에 말했듯이 다른 대륙에서 마주쳤으니 운명이라 생각하며 그에게 집착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흥분하며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당신 같은 사람이 평민들의 삶에 대해 모르죠? 얼마나 힘든지 알아요? 부모님은 대륙을 옮겨 다니며 물건을 팔았고 나는 따라다녔어요. 그러다 카일 사제님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죠. 어디서 만난 줄 알아요? 룩스 대륙이에요.”
“룩스 대륙이라고요?”
리첼은 잠시 놀라서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카일과 성녀가 그렇게 먼 곳에서 만난 적이 있다니… 대륙이라고만 들었기에 리첼은 놀랍긴 했다.
“그곳에서 난 그를 보고 한 번에 운명의 상대라는 걸 느꼈어요. 그도 나를 보며 얼마나 사랑스러운 미소를 보이던지….”
사랑스러운 미소라니. 카일이 성녀에게 그런 미소를 보였을 것 같지 않았다.
리리스에게나 가끔 그런 미소를 보였을 뿐 리첼에게도 그런 미소를 보인 적 없었다.
그녀가 남들이 모르는 카일의 미소란 그건 잠자리에서 가끔 보이는 요염한 미소였다.
성녀는 그의 겉치레용 미소를 사랑스러운 미소로 착각한 것 같았다.
“우린 그곳에서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요. 하지만 말했다시피 난 부모님을 따라 대륙을 옮겨 다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와 헤어져야만 했어요. 그땐 얼마나 울었는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
성녀는 그때를 상기하는 듯 잠시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우린 또다시 만나고 말았어요. 운 좋게도 성녀로 발탁이 되었고 대신관님을 따라 신전에 도착한 후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카일 님이 사제로 있을 줄 꿈에도 몰랐죠. 마치 나와 만나기 위한 운명이라고 신께서 이끌어주신 것 같았어요.”
“그럼 카일 사제님은 룩스 대륙에선 사제가 아니었나요?”
카일은 원래 사제가 아니었던 건가?
리첼은 성녀의 말에 놀랐다. 추기경 후보로까지 언급이 되었기에 당연히 예전부터 사제로 있을 줄 알았다.
“….”
그러자 성녀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원하는 반응이 나오지 않아서 짜증이 난 것 같았다.
“알아서 뭐 하게요? 당신은 그에 대해 알 필요 없어요. 나만 알 거예요! 그리고 나만이 그를 이해할 수 있어요. 이제 알아들었어요? 그와 난 운명이라고요!”
카일과 성녀의 말을 둘 다 들어보아도 두 사람은 우연히 한 번만 마주친 것 같았다.
“혹시 우연히 마주친 건 한 번이었나요? 아니면 다른 곳에서도 마주쳤나요?”
그래서 리첼은 확인차 물어보았다.
“그, 그건….”
진짜로 한 번만 마주쳤는지 성녀의 말문이 막혔다.
어쩌다 한 번 마주친 것 가지고 운명이니 뭐니 논하다니. 성녀의 주장이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그녀의 웃음을 비웃음이라 여겼는지 힐다는 갑자기 흥분하며 이상한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깟 목걸이가 뭐라고! 카일 님의 운명의 상대는 당신이 아니라 저라고요. 제국에서 만났는데 이곳에서 또다시 우연히 마주쳤잖아요. 그게 운명이 아니고 뭐란 말이에요!”
“목걸이요? 어떤 목걸이를 말하나요?”
목걸이라니…. 성녀는 마치 리첼이 가지고 있던 목걸이에 대해 말하는 것 같았고, 그 기능에 대해 아는 눈치였다.
훔쳐 갔을 때 혹시라도 기능을 알아채기라도 한 건가?
하지만 리첼이 몰래 훔쳐 왔을 때만 해도 그녀는 모르는 눈치였다.
“그 목걸이는 돌팔이 노인이 만든 거야! 사람을 괜히 현혹하고 있어! 그런 가짜에 속아 운명이니 뭐니 착각하지 말라고요!”
성녀는 질문에 대한 답변 대신 생뚱맞은 말만 했다.
이번엔 노인이라는 단어까지 나왔다. 목걸이를 만든 사람을 아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마법사에게서 받아왔다고 했었는데? 설마 성녀가 마법사와 만나기라도 했었나?’
리첼은 성녀에게 이것저것 물어볼까 하다가 말았다.
“당신이 아니야. 나라고! 그가 사랑하는 사람은 나라니깐? 왜 중간에서 자꾸 방해하려고 해?”
지금도 그녀는 물음에 대한 대답 없이 하고 싶은 말만 지껄이고 있었기에 도저히 성녀와 대화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리첼은 그녀가 지껄이는 말을 듣지 않고 비아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아직 내 말 안 끝났다고요!”
뒤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성녀는 제정신이 아닌 것만 같았기에 이상했고, 무서워서 온몸에 소름이 돋을 것만 같았다.
* * *
어둠이 내려온 모두가 잠든 시간.
조용한 공간 속에서 정적을 깨는 발걸음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발소리는 띄엄띄엄 있는 여러 방을 지나쳐 제일 끝에 있는 방 앞에서 멈췄다.
[똑똑]
노크를 했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힐다가 또다시 문을 살며시 노크했으나 여전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원하는 반응이 없자 살짝 두드리는 손은 점차 거세지기 시작했다.
다른 방에서 누가 나올까 봐 세게 두드릴 순 없었지만 문이 열릴 때까지 손을 멈출 생각이 없었다.
노크로는 소용이 없자 이번엔 손잡이를 잡고 계속 흔들었다.
‘누가 이기나 보자!’
그녀는 쉴 새 없이 방 손잡이를 고문했다.
한참을 실랑이를 벌인 끝에 ‘철컥’ 잠금을 푸는 소리와 함께 문이 천천히 열렸다.
방에서 나온 카일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자신의 방 앞에 서 있는 힐다를 바라보았다.
“어쩐 일로 이런 야밤에 제 방을 찾아오신 겁니까?”
묻는 말에 대답 없이 힐다는 문을 확 열어젖히곤 초대하지도 않은 방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침대 위에 앉았다.
“지금까지 안 자고 있을 줄 알았어요.”
막무가내로 쳐들어온 그녀를 차마 무력으로 내쫓진 못한 채 카일은 고개를 푹 숙였고, 체념하듯 말했다.
“돌아가십시오. 이 시간에 타인의 방에 들어오는 건 경우에 어긋나는 행동입니다.”
“말과는 달리 저를 들여보내 줬잖아요. 역시 당신도 내가 오길 기다리고 있던 것 아니에요?”
힐다는 카일이 그의 방으로 그녀를 들여준 것 자체가 기쁘고 설레었다.
“각자의 방에서 주무시고 계실 사제님들에게 피해가 될까 봐 잠시 문을 열어드린 것뿐입니다.”
‘다른 사제 핑계를 댈 필요 있나?’
조금 전까지 좋았던 힐다의 기분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지난번에 공녀님은 방으로 잘만 데려왔으면서 난 왜 안 돼요? 누가 모를 줄 알아요?”
그녀의 말에 카일은 골치 아픈 문제라도 있는 것처럼 손으로 이마를 짚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어서 나가십시오. 아니면 제가 가서 성기사님이라도 모셔와야 나가시겠습니까?”
“절 진짜로 내치시려고요?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의 만남은 솔레아 신의 뜻이에요. 몇 번이나 말했잖아요. 난 첫눈에 알아봤어요. 그리고 당신도 나와 같은 감정을 느꼈으리라 믿어요.”
“….”
카일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힐다는 그가 그녀의 말이 옳다는 걸 인정했다고 생각했다.
“바다 건너 우리가 어떻게 다시 만났겠어요? 우연이라고 하기엔 믿을 수 없는 일이잖아요. 이게 다 우리가 운명의 끈으로 묶여있다는 소리 아니겠어요?”
“….”
계속 말을 이어나갔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자 힐다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양팔을 붙들며 대답을 재촉했다.
“그렇지 않아요?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