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도 나랑 맞춰 볼래요?-49화 (49/110)
  • 08.

    어느덧 시간이 흐르자, 카일이 먼저 일어났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음에 언제 또 만날 수 있을까요?”

    이제 볼일은 다 마쳤으니 신전으로 돌아가야 했다. 리첼은 아쉬움이 남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싶더니 입을 열었다.

    “제가 필요한 약초를 채취하러 신전 옆에 있는 숲속으로 혼자서 갈 생각….”

    “저도 같이 가도 될까요? 저 약초 구분 잘할 수 있어요. 선생님과 실습도 몇 번 나갔는데 칭찬도 받았는걸요?”

    말이 끝나기 전에 그 말을 끊고 말하다 리첼은 뒤늦게 자신의 입을 막았다.

    그 순간 ‘쿡’하는 카일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너무 성급했어.’

    조급한 마음에 그의 말을 중간에 끊어버리고 말았다. 데려가 달라며 너무 티를 낸 것 같아서 살짝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꼭 그녀 혼자만 안달 난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만 같았다.

    민망한 마음에 리첼이 카일을 힐끔 쳐다보자 그의 손이 그녀의 머리에 닿았고 천천히 쓰다듬었다.

    카일은 마치 리리스를 바라보던 눈빛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다정스러운 그 미소를 보니 조금 전까지 느낀 민망함은 없어지고 어느새 마음이 편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러면 조만간 연락드리겠습니다.”

    카일의 검지와 중지 손톱 끝이 리첼의 볼을 ‘톡’하고 가볍게 치곤 레녹스가를 떠났다. 그의 입가엔 여전히 미소 한 조각이 걸려있었다.

    ‘둘이서 숲속에서 약초를 캐러 가다니…. 꼭 데이트 같잖아.’

    밖에서 카일과 둘만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혼자서 갈 생각입니다.

    혼자서…. 그리고 같이….

    리첼은 붉어진 제 얼굴을 손으로 가린 채 그녀의 방으로 걸어갔다. 중간에 누군가 말을 건 것 같았지만 손짓으로만 대답했다.

    지금의 모습을 누군가 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방에 도착한 순간 리첼은 문을 닫은 후 재빨리 침대 위에 누워서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몸을 요리조리 굴리며 환호성을 질렀다.

    카일과 만나기로 한 날이 되자 리첼은 아침부터 북받쳐 오르는 흥분을 주체할 수 없었다.

    옷장을 전부 뒤지며 어떤 옷을 입고 갈지 입었다 벗었다만 반복하고 있었다.

    ―편한 복장으로 오십시오.

    서신에 쓰여 있는 그 말 대로 입으려고는 하지만, 예쁜 옷은 편하지 않고, 편한 옷은 예쁘지 않았기에 고민이었다.

    “편한 옷 입으시려면 디자인을 포기하세요.”

    옷 갈아입히기 지쳤는지 비아가 결국 적당한 드레스 한 벌을 들며 입으라고 강요했고 결국 그녀는 비아의 선택에 따랐다.

    풍성한 치마 대신 평소보다 간편한 옷을 입었고, 치렁치렁한 액세서리 대신 수수한 하늘빛 드레스, 햇빛을 가려주는 하얀 모자를 택했다.

    “평소보다 수수하긴 해도 지금 입으신 드레스도 예뻐요. 그러니 거울 좀 그만 보시고 이만 출발하는 게 어때요?”

    계속 거울 앞을 서성이는 리첼을 보며 비아가 힘이 빠진 듯한 작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다시 한번 거울을 보다가 뒤에서 느껴지는 비아의 따끔한 시선에 리첼은 얼른 망토를 두르고 방에서 나와 마차에 올랐다.

    마차가 신전 앞에 도착하니 카일이 갈색 망토를 쓰고 바구니를 든 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리첼의 복장을 보더니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드레스가 조금 더러워질 수 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예쁘다는 말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리첼은 그의 말에 괜히 섭섭함을 느꼈다.

    “괜찮아요. 각오하고 왔어요.”

    아쉬웠지만 겉으론 아무런 내색은 하지 않았다.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카일은 기사들에게 지금부터 그들이 갈 곳을 설명했다.

    “꽤 깊이 들어가는군요. 걱정 마세요, 아가씨. 저희가 편히 갈 수 있게 도와드릴게요.”

    카일과 둘이서 가는 날만 기다렸건만 눈치 없는 프랭크가 그들을 따라올 기세였다.

    “괜찮아. 여기서 대기하고 있어.”

    “아니요. 어떻게 그래요? 그럴 순 없습니다.”

    리첼은 기사들에게 신전 앞에서 기다리라고 했지만, 그들은 극구 따라나서겠다며 그녀의 호위 일에 의욕이 넘쳤다.

    자꾸 따라오겠다는 기사들 앞에서 대놓고 데이트니 따라오라고 말할 순 없기에 리첼은 프랭크만 손짓으로 살짝 불러내 그의 귓가에 조심스레 속삭였다.

    “첫 데이트야. 둘만 가면 좋겠는데….”

    그 말을 듣고 나서야 프랭크는 그가 눈치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민망한 웃음을 지었다.

    “제가 눈치가 없었군요. 다른 기사들에겐 제가 잘 말하겠습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사제님께서 곁에 계시니 별일 없겠죠?”

    말은 그리했지만, 그는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리첼을 바라보았다.

    “걱정하지 마.”

    자꾸만 부담스러운 눈빛을 보내는 프랭크를 겨우 떼어놓고 나서야 그녀는 카일과 둘이서만 숲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숲길이 조금 험할 겁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숲에 들어서자마자 그가 말했다.

    ‘불러놓고 뒤늦게 저런 소리를 하다니. 너무 늦게 알려준 거 아닌가?’

    리첼은 그의 말을 듣자 어처구니가 없었으면서도 괜찮았다. 그와 함께면 어디든 좋을 것 같았다.

    오랜만에 숲속 공기를 마시니 상쾌했고, 새들의 재잘거리는 소리와 벌레가 우는 소리도 반가웠다.

    하지만 하늘이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우거진 나무들의 뿌리 때문에 걷기 힘들었다.

    툭 튀어나온 뿌리가 많아서 걸어가기엔 조금 험했기에 리첼은 카일을 잘 따라갈 자신이 없었다.

    괜히 따라나섰나 후회가 되는 건 아니지만 차라리 겉치장을 포기하고 레이나에게 바지라도 빌려서 입고 왔어야 했나 생각이 들던 그때였다.

    카일이 손을 내밀었다. 리첼이 놀라 멍하니 있자 그가 잡으라는 듯 한 번 더 손을 흔들었다.

    “길이 험하니 제 손을 잡으면 좀 더 편하게 가실 수 있을 겁니다.”

    그의 손을 잡는 순간 힘들다는 생각은 사라지고, 리첼의 온 신경은 그쪽으로 집중되었다.

    숲의 풍경도 맑은 공기도 새의 노랫소리도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다. 오로지 그의 손과 닿고 있는 감각만이 그녀를 지배하고 있었다.

    숲의 서늘한 바람을 맞으면서도 리첼의 손은 자꾸 땀이 차는 것만 같았다.

    혹시라도 그가 그 이유로 손을 놓을까 마음이 조마조마했지만 카일은 다행히 그녀의 손을 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카일을 따라 한참을 걸어가니 나무 사이 빼곡히 찬 잡초들이 보였다.

    드디어 도착한 모양이다. 현재 그들이 보고 있는 잡초들 중에서 약초가 섞여 있을 것이다.

    “약초에 대해 잘 안다고 하셨죠?”

    “네.”

    “그럼 열심히 채취 부탁드립니다. 기대 많이 하겠습니다.”

    데이트라 기대했지만 카일은 진짜 필요한 약초를 캐러 온 듯 보였다. 리첼에게 자리를 지정해주곤 그곳을 맡겼고, 그는 그녀와 살짝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네!”

    기대와는 달라 실망했지만 리첼은 내색하지 않은 채 환한 미소와 함께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 이후로 그들은 각자가 맡은 자리에서 발견하면 채취하고, 발견하면 채취하며, 이 행동만 반복했다.

    리첼은 그녀 혼자만 데이트한다고 기대한 것 같아 서운하면서도 동시에 즐겁기도 했다.

    이렇게라도 그와 얼굴을 마주할 수 있어서 좋았기에 평소보다 기분이 더욱 고조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카일보다 더 많이 약초를 찾으려고 애썼다. 평소에 약초학 공부도 열심히 했기에 눈으로 약초를 구분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약초학 공부를 열심히 해두길 잘했어.’

    카일에게 도움이 되니깐 뿌듯하기도 했다. 수업으로 무슨 과목을 배울까 고민했을 때 리첼은 약초학을 빼려 했다. 어차피 치료는 주치의가 하니깐 말이다.

    ―아는 건 많을수록 좋단다.

    다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공부해두라는 레녹스 공작부인의 말씀에 따라 리첼은 재미는 없더라도 약초학을 배우게 되었다.

    어머니 말씀을 들은 리첼은 스스로를 칭찬했다.

    물론 이번에도 레녹스 공작은 시종들이 매일 따라다니기에 그들에게 맡기면 된다며 배울 필요 없다고 주장했지만 말이다.

    ‘아버지 말씀을 들었다간 멍하니 시간만 허비할 뻔했어.’

    의도치 않게 그녀의 앞길을 방해하는 것만 같은 아버지를 떠올리자 리첼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다가도 그녀와 그가 닮았다는 카일이 말이 동시에 떠오르며 다시 표정이 굳어졌다.

    “혼자서 무슨 생각을 그리하십니까?”

    리첼의 표정이 확확 변하는 걸 봤는지 카일이 물었다.

    “아무 생각 안 했어요.”

    “혹시 지루하십니까? 괜히 따라왔다고 후회하시는 건 아니겠죠? 속으로 저를 욕하고 있다던가.”

    “아뇨? 재밌는데요? 제가 말했잖아요. 저 약초 구별 잘한다고. 이것 보세요.”

    리첼은 그녀가 채취한 약초가 가득 담긴 바구니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로 바라보더니 다시 약초를 찾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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