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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나랑 맞춰 볼래요?-48화 (48/110)
  • 08.

    카일은 리리스를 안은 채 하녀가 안내한 응접실로 들어갔고, 뒤이어 리첼과 레이나가 따랐다.

    리첼이 방에 들어가기 전, 뒤에서 갑자기 레이나가 그녀의 옷을 잠시 당겼다.

    “왜?”

    리첼은 뒤를 돌아 레이나를 바라보았고.

    “잠깐 귀 좀.”

    그녀는 가까이 와서 귀를 대라고 손짓했다. 리첼이 가까이 오자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요즘 영애들 사이에 이상한 소문이 돌더라고. 카일 사제님께서 사제직을 그만두신다고 말이야. 뭐야? 언니도 알고 있었어?”

    리첼이 아무 반응 없자 오히려 레이나가 놀란 눈치였다. 아마도 놀래켜 줄 생각으로 말한 듯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해줄까? 요령껏 두 사람만 이야기할 수 있도록 자리를 피해 줄까?”

    레이나의 말에 리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제 동생이 이런 기특한 생각을 할지 몰랐기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좋아하는데?”

    레이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응접실로 먼저 들어갔고, 리첼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그들은 준비된 다과가 놓인 둥근 테이블 앞 의자에 차례로 앉았다.

    카일 옆에 리리스가 앉았고, 그 옆에 리첼, 레이나가 순서대로 앉았다.

    “사제님 조만간 그만두신 이야기를 들었는데 사실인가요?”

    자리에 앉자마자 레이나는 궁금한 것 그대로 물어봤다. 그러자 리리스에게 과자를 건네주며 카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곧 신전을 나올 것 같습니다. 공작님과 리첼 님께는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뭐야. 언니는 사제님께 직접 들었으면서 내겐 알려주지도 않아?”

    레이나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리첼을 바라보았다.

    “제가 당분간 비밀로 하길 원했기에 리첼 님께서 모른 척해 주신 것 같습니다. 그러니 레이나 님께서도 당분간 모른 척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요. 제 입이 얼마나 무거운데요. 그렇지만 이미 사교계엔 은밀하게 소문이 나 있던데 괜찮아요?”

    하녀가 가져다준 차를 입에 대며 레이나가 물었다.

    “네. 신전에서만 소문이 나지 않는다면 괜찮습니다.”

    그러자 그의 입가에 난감한 듯한 미소가 지어졌다.

    ―성녀님께서 제가 그만둔다는 사실을 아직 몰랐으면 합니다.

    전에 리첼이 그만두냐고 물을 때 카일이 한 말이었다. 그만둘 시기조차 성녀에게 숨겨야 하다니. 리첼은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그녀가 무섭기도 했다.

    카일도 그녀와 비슷한 생각을 하니 일단 비밀에 부치는 것 같았다. 성녀가 무슨 짓을 벌일지 짐작하지 못하니깐 말이다.

    세 사람이 한참을 이야기하고 있는 와중에 쿠키를 집어 먹던 리리스의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졸려.”

    리리스가 하품을 하며 말했다.

    “리리스를 재워야겠어요. 그럼 다음에 또 뵐게요.”

    레이나는 얼른 리리스의 핑계를 대며 눈치껏 자리를 빠져주었다.

    리리스는 반쯤 감긴 눈을 손으로 비비며 레이나의 손을 잡았고, 그녀는 리첼에게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방을 나갔다.

    갑자기 두 사람이 순식간에 사라지자 응접실에는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리첼은 맞은편에서 아무 말 없이 차를 마시는 카일을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둘이서 만나는 시간을 그렇게나 고대했건만, 막상 그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니 머리가 하얘졌다. 어떤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목이 바짝바짝 타는 것만 같았고 긴장한 손은 살짝 떨리고 있었다.

    긴장을 풀 겸 제 앞에 있는 남자를 찬찬히 바라보자 그의 이목구비가 리첼의 눈에 들어왔다.

    눈썹을 살짝 가린 부드러운 검은 머릿결은 그가 차를 마실 때마다 살짝살짝 흔들렸고, 긴 속눈썹은 맑고 고운 흑안과 조화를 이루었으며, 오뚝하고도 날카로운 콧날은 그의 아름다운 인상을 더욱 또렷하게 보이는데 한몫하고 있었다.

    그리고 입술….

    리첼의 시선은 입술에서 멈추었다. 엷붉게 칠해진 입술을 보자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촉촉하고 부드러웠지.’

    저도 모르게 지난번에 느꼈던 감촉이 떠올랐다.

    약에 취해서 그런가. 솔직히 펠릭스와 키스했을 때보다 더 기분이 좋았다. 또 하고 싶을 정도였다.

    ‘앗. 내가 무슨 생각을….’

    리첼은 애써 자신의 망상을 부정하려 했다.

    하지만 저도 모르게 자꾸만 곁눈질로 흘긋흘긋 카일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보지 않으려 했건만 저도 모르게 시선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마치 그녀를 유혹하는 것만 같았다.

    “…공녀님.”

    고요한 침묵이 깨고 리첼을 부르는 카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재빨리 시선을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시선이 제 눈이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카일의 입가엔 짓궂은 미소 한 조각이 걸려있었다. 그의 말에 창피함을 느꼈다. 그녀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뻔히 알면서도 그는 에둘러 말하고 있었다.

    ‘날 놀리곤 그 반응에 재미를 느끼는 게 분명해.’

    분했지만 그와 별개로 점차 리첼의 낯빛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차마 고개를 들을 수가 없어서 고개를 푹 숙였다.

    그 순간 카일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리첼의 옆으로 다가와 그녀의 턱을 잡고 올렸다.

    “제가 민망하다고 느낄 정도로 한 곳만을 응시하고 있는데 제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셨습니까? 원하신다면 바로 해드려야겠죠?”

    “제가 뭘…. 읍!”

    말이 끝나기 전에 카일이 고개를 숙였고,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보드랍고도 촉촉한 감촉이 느껴져 기분이 좋아졌다. 열기가 점차 올랐는데 이 열기가 속마음을 들켰다는 부끄럼 때문인지 카일의 촉촉한 감촉 때문인지는 알 수는 없었다.

    부드러운 키스는 짧은 여운을 남기며 입술이 떨어졌고, 그 끝에는 타액으로 이어져 있었다. 리첼은 얕은 호흡을 내뱉었고, 그녀의 어깨는 살짝 오르내렸다.

    “이제 만족하셨습니까?”

    “지금 저를 놀리는 건가요?”

    달콤한 입맞춤의 감각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채 가쁜 숨을 내쉬며 리첼이 카일을 노려보았다.

    “왜? 하기 싫었습니까? 제가 착각한 것 같군요. 그러면 여기서 이만 멈추도록 하죠.”

    그는 그녀의 시선을 모르는 체했다.

    그 모습이 얄미웠지만 이미 한껏 달아오른 리첼은 이대로 멈추기 아쉬웠다.

    “아뇨.”

    아쉬워한다는 걸 알고 그가 놀리는 것이 분명했지만, 아쉬움이 많이 남은 사람이 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멀어지는 카일의 옷깃을 붙잡은 리첼은 그대로 잡아당겨 그녀의 입을 지그시 눌렀다.

    그러자 이에 답하듯 그녀의 입술 사이로 카일의 뜨거운 혀가 들어왔다.

    리첼은 흠칫 몸을 떨었으나 그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더욱 단단히 감쌌고 두 사람은 더 가까이 밀착되었다.

    감미로운 혀가 깊숙이 들어와 헤집을수록 리첼의 정신은 점차 혼미해졌다.

    두 사람은 격렬히 서로의 안을 탐했다.

    겉으론 무심한 척했으면서 그는 정열을 숨기고 있었다.

    두 사람의 숨소리는 점점 거칠어져 갔고, 서로의 숨결을 끊임없이 주고받았다.

    숨이 가빠와도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기에 시간이 갈수록 서로를 더욱 강하게 휘감았다.

    그렇게 쉼 없이 몰아치는 격렬하고도, 긴 여운이 남는 키스는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마음속에 품었던 열정을 한껏 드러낸 뒤, 리첼과 카일은 또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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