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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나랑 맞춰 볼래요?-47화 (47/110)
  • 08.

    리첼은 카일을 따라 신전 건물 안 복도를 걸었다. 침묵만이 흘렀기에 두 사람의 발소리만이 귓가에 들려왔다.

    앞서가면서도 아무 말이 없는 카일에게 어색함이 느껴지는 것 같아 리첼은 머뭇거리다 먼저 입을 열었다.

    “…성녀님께서는 감금의 방에 일주일 동안 들어가시면 아예 밖으로 나오질 못하는 건가요?”

    “네. 일주일 동안 방 안에만 계실 겁니다. 식사도 방 안으로 따로 제공될 테고요.”

    매일 보던 카일을 일주일이나 보지 못하게 생겼으니 성녀는 감금의 방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격하게 저항한 것 같았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기에 주교가 성녀에게 정신적인 벌을 내린 것 같았다.

    일주일 동안 카일을 보지 못하게 감금하는 동시에 그를 직접 지명하여 성녀와 싸운 여인을 돌봐주라고 시켰으니 말이다.

    리첼은 은근히 통쾌함을 느끼면서도 찜찜했다. 벌을 받아도 성녀는 정신을 못 차릴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였다.

    “보다시피 저 다친 곳은 없어요. 애써 의무실에 갈 필요 없어요.”

    궁금증이 해결되자 그녀는 그제야 카일에게 자신은 멀쩡하다고 알렸다.

    머리채만 잡혔으니 머리카락이 몇 가닥 뽑힌 것 외엔 별다른 상처는 없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카일의 입에선 예상외의 답변이 나왔다.

    “알고 있다고요? 그렇다면 왜 저를 치료실로 데려가나요? 혹시 신전에서는 뽑혀 나간 머리털을 다시 심어주기라도 하나요?”

    떨어져 나간 머리털을 다시 심어준다면 감사하긴 했지만, 그런데 그 머리털은 이미 성녀의 손에서 공중으로 날아간 것 같았는데? 리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갑자기 ‘쿡’하고 짧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잠시 놀란 리첼의 발걸음이 멈췄고, 곧이어 그녀의 앞에 가던 발걸음도 몇 걸음 걷다가 멈추었다.

    “큭큭. 아하하하하.”

    그러더니 갑자기 카일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가 저렇게 크게 웃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거의 미소를 짓거나 무표정한 얼굴이었기에 낯선 그의 모습에 어색하면서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가 마치 자신을 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설마. 지금 저를 비웃은 거예요?”

    “아하하. 죄송합니다. 공녀님을 비웃으려 했던 건 아닌데.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요. 아까부터 웃음을 참고 있었는데….”

    아까부터라니. 리첼은 빠르게 발걸음을 몇 걸음 옮겨 카일의 앞에 멈춰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설마. 아까 제 머리채 잡힌 모습을 보고 웃음을 참았다는 말인가요?”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웃음을 참는 듯 보였다.

    “어쩜. 마음이 어질고 관대하다고 소문이 난 사람이 타인을 보고 비웃다니요?”

    리첼이 뚱한 얼굴로 카일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제가 착하다고 제 입으로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만. 신전 밖에 저에 대한 소문은 그리 났나 봅니다.”

    여전히 웃음을 멈추지 않은 채 그가 대답했다. 마치 리첼의 말을 처음 들은 것처럼 모르는 척을 했다. 모를 리 없을 텐데 말이다.

    “혹시 지난번에 성녀와 머리채 잡고 싸울 때도 속으로 웃고 계셨나요?”

    리첼은 분명 그때 그의 싸늘한 눈빛을 봤다고 생각했었다. 그게 아니라면 착각이라도 했던 걸까.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그의 말을 듣자 리첼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오를 것만 같았다. 창피했다.

    “제가 그리 웃겼나요? 대체 어떤 모습이?”

    갑자기 그녀의 오른팔에 묵직한 감각이 느껴지는 동시에 그대로 붕 떠올랐다. 이내 그대로 몸과 함께 앞으로 이끌렸다. 그러곤 눈 깜짝할 사이에 카일의 품에 안겼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리첼의 귓속으로 카일의 숨결이 느껴졌다.

    “레녹스 공작님과 너무나도 닮았기에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습니다. 기분 상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속삭이듯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리첼의 귓가를 간질였다.

    나지막하면서도 달콤한 목소리가 흘러나와 잠시 정신이 멍해지는 것 같아 가만히 있던 리첼은 문득 그의 입에서 이상한 말을 들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저…. 제가 잘못 들은 거 아니죠? 제가 아버지와 닮았다는…?”

    재차 확인했다. 뭔가 욕 같으면서 욕 아닌 말을 들은 것 같아서.

    매번 리첼의 일을 훼방 놓고 그녀에 대해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니는 입이 싼 아버지를 닮았다니?

    “제대로 들으셨습니다.”

    또다시 귓가에 감미로운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네?”

    리첼이 놀라는 사이에 카일의 숨결은 귀에서 목으로 내려왔고 그녀의 목덜미에 진한 여운을 남기더니 그대로 멀어졌다.

    “아무런 상처가 없으시다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갑자기 간다는 말에 아쉬움을 느껴졌다. 몸에 상처라도 만들었어야 했나 후회했다.

    “조만간 서신 보내겠습니다. 그때 뵙겠습니다.”

    하지만 카일의 마지막 말에 그를 잡으려던 손짓을 멈추었다.

    서신이라니.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리첼은 멀어지는 남자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건물 밖으로 나온 리첼은 비아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아가씨. 뒤늦게 얘기 들었어요. 성녀님과 또 한 판 했다면서요?”

    잘못된 소문을 들은 비아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 판 한 게 아니라 일방적으로 당했어.”

    “저런. 제가 따라갔었어야 했는데. 성녀님께서 머리채를 잡기 전에 제가 먼저 머리채를 잡고 머리를 다 뜯어놨어야 했는데. 몰랐어요.”

    아마도 신전 내에서 마주친 지인과 수다를 떠느라 몰랐을 것이다. 나중에야 와전된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았다.

    “괜찮아. 성녀도 그 나름의 벌을 받았어.”

    리첼은 비아와 함께 마차가 있는 곳으로 향해 걸어갔다.

    “어쩌나. 상처도 났어요. 목에 멍든 것 봐! 성녀님께서 때리기라도 했어요? 며칠 가겠는데요?”

    걸어가는 도중 비아가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

    “멍이라고?”

    다친 적도 없는데 멍이라니?!

    리첼은 잠시 의아한 눈빛으로 비아를 바라보다 아까 느꼈던 감각을 떠올렸다.

    카일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얼굴로 그녀에게 흔적을 남겼다….

    “아하하.”

    리첼은 아까 카일이 웃었던 것처럼 크게 웃었다.

    “다쳤다는 말이 그렇게 웃겨요?”

    영문을 모르는 비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지만 대답 없이 계속 웃기만 했다.

    지난번 흔적은 키스 마크라고 확신하더니 이번엔 상처라니.

    한참을 웃던 리첼은 다시 심각해졌다.

    “아가씨…?”

    웃다가 갑자기 정색한 리첼을 보며 비아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지만 그녀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은 이미 카일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그는 대체 어떤 생각으로 이런 상처를 남긴 걸까?’

    마음이 있는 걸까. 장난인 걸까.

    고민하고 또 고민했지만 리첼은 그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 * *

    며칠 후 카일이 레녹스가를 방문하겠다는 서신이 왔고, 그로부터 또다시 며칠 후 그가 레녹스가를 찾아왔다. 레녹스 공작을 만나러 온 김에 리첼과 동생들의 얼굴도 보기 위해서였다.

    레녹스 공작과의 볼 일을 마치면 레녹스가의 세 명의 공녀를 만나고 싶다는 문구를 되짚으며 리첼은 아쉬움을 느꼈다.

    ‘혼자가 아니라 셋이서 보자니….’

    “카일 사제님께서 오셨어요.”

    비아가 카일이 도착했다는 것을 일러주자, 아쉬움을 달래며 리첼은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방에서 나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카일의 모습이 보이자 리리스가 제일 먼저 달려들어 그의 품에 안겼다. 아니, 카일이 리리스를 안아 올렸다고 표현하는 것이 적합했다.

    “선생님. 오랜만이에요. 수업 끝나고 얼마나 아쉬웠는지 몰라요.”

    그의 품 안에서 마음껏 응석 부리는 동생의 모습을 보니 부럽기도 했다. 리첼은 애써 자신의 마음을 감추며 레이나와 함께 그에게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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