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도 나랑 맞춰 볼래요?-46화 (46/110)

08.

“괜히 내 질투심을 유발하려고 사제님께서 그렇게 말하라고 시킨 거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만 성녀는 리첼의 말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내 말을 부정할 거면 나한테 왜 물어봤어요?”

“….”

정곡이 찔렀는지 성녀는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어차피 사실도 아니기도 했고 더는 말 섞고 싶지 않은 리첼은 얼른 자리를 뜨려 했다.

얼른 성녀에게서 인사하고 가려 했건만, 갑자기 땋은 머리가 누가 누른 것처럼 묵직했다.

‘설마….’

리첼은 고개를 돌렸고, 당황해서 말이 나오질 않았다. 또다시 성녀가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만 것이다.

‘역시. 신전에 오지 말았어야 했어. 조금만 참았어야 했는데….’

리첼은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카일의 얼굴을 못 본 지 2주일이 안 되었건만 뭐가 성급하다고 신전에 왔는지.

성녀가 또다시 자신의 머리채를 잡을 거란 생각은 아예 생각하지 못했다.

지난번 싸운 이후 성녀는 벌을 받았고, 소문이 퍼졌을 테니 이번엔 몸 사릴 줄 알았다.

하지만 리첼의 예상은 틀렸다.

처음부터 리첼의 머리채를 잡으려고 시비를 건 것이 분명했다. 분풀이라고 해야 하나? 혹시 몰라 성녀를 피하려고 개인 기도실까지 갔지만, 그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다만 주변에 보는 눈이 있기에 리첼은 성녀의 머리채를 똑같이 잡진 않았다. 또다시 같은 사람으로 낙인찍히긴 싫었다.

그래서 놓으란 소리도 없이 그냥 그녀의 손에 이끌려 머리가 이리저리 휘청거렸다.

누가 보면 리첼 혼자 호되게 당하는 것처럼 보이게 말이다.

어느새 주위에 있던 여성들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그들에게 달려왔다.

“대체 무슨 일 때문에 공녀님의 머리채를 잡는 거죠? 성녀님?”

“그만두세요. 체통 없이 지금 뭐 하는 짓이죠? 성녀님이면 다예요? 감히 귀족을 먼저 건들다니요.”

“그 손 놓으시죠?”

주위에서 성녀를 말리는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리첼이 가만히 있던 덕에 다른 이들 눈에는 성녀가 먼저 그녀의 머리를 잡고 일방적으로 폭력을 휘두른 걸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주변의 비난에도 성녀는 잡고 있던 머리를 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네가 뭔데. 네가 뭔데. 감히.”

성녀는 같은 말만 반복하며 웅얼거렸고, 그 말을 들은 귀족 영애들은 기겁하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응원에 힘입어 리첼은 더더욱 성녀의 손에 끌려다녔다.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멀리서 누군가가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리첼과 성녀를 막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홍해가 열리듯 사람들이 길을 열어주었다.

화가 났는지 얼굴이 발그스름해진 주교가 성녀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보아하니 사제들이 기도를 마치고 나온 것 같았다.

주교 뒤로 사제 무리가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고 그들에게 다가온 사제들 중에 카일의 모습이 보였다.

‘또 이런 식으로 얼굴을 보는구나.’

그를 발견한 순간 리첼은 눈이 마주치기 전에 재빨리 제 눈을 질끈 감았다.

창피해….

지금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성녀님 그 손 놓으십시오!”

“맞아요. 지금 무례한 짓은 그만두세요.”

사제들이 옆에서 말려도 이미 흥분해서 이성을 잃은 성녀는 리첼의 머리채를 놓지 않았다.

“성녀님, 지금 무슨 상황인지 말씀해보시겠습니까?”

두 사람을 겨우 떼어낸 후, 성녀를 추궁하듯 주교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씩씩거리는 성녀의 손안에는 분홍 머리카락 몇 가닥이 잡혀있었다.

“세상에. 손 좀 봐요. 대체 얼마나 세게 잡았기에 머리가 저리 빠진대요?”

리첼과 마찬가지로 다른 영애들도 빠진 머리카락을 본 모양이다.

성녀는 잠시 그들을 가는 눈초리로 바라보다 주교의 눈치를 보곤 다시 고개를 숙였다.

“….”

“왜 제 말에 대답이 없으십니까? 어떤 상황인지 말씀해주십시오.”

성녀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자 주교의 시선은 리첼을 향했다.

“공녀님. 이번에도 정말 죄송합니다. 지난번에 단단히 일렀기에 이런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또다시 생기다니…. 다 제 불찰입니다. 그런데 왜 성녀님이 공녀님의 머리채를 잡았습니까?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는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저도 모르겠어요.”

사실을 말할 수도 없으니 리첼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과 함께 모르쇠로 일관했다.

카일을 힐끔 바라보았지만, 그는 아무런 표정 없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사람은 대답이 없고 다른 사람은 모른다고 하니 주교는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였다.

“제가 똑똑히 봤어요, 주교님. 성녀님께서 대화를 마치고 돌아가는 공녀님의 머리를 뒤에서 갑자기 잡아끈 것을요.”

“저도 봤어요.”

성녀가 먼저 리첼에게 달려든 것을 본 일부 영애들의 목격담이 흘러나왔다.

그들의 말을 들을수록 주교의 표정은 점점 파랗게 변했다.

“대체 두 분께서 어떤 이야기를 하셨습니까?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당황한 듯한 표정을 보이며 주교는 대답이 없는 성녀 대신에 리첼에게 또다시 물었다.

“그냥. 별 얘기 안 했어요. 인사하고, 그냥 이런저런 안부의 말을 주고받은 다음 제가 먼저 인사하고 헤어지려 했어요.”

리첼은 진짜 별일 없었다는 듯 침착하고 차분히 말했다.

성녀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어차피 그녀도 사실대로 말할 수 없기에 그 시선을 모르는 체했다.

“어휴. 성녀님. 대체 어떤 생각으로 먼저 공녀님의 머리채를 잡은 겁니까?”

이젠 주교도 속이 답답한지 대놓고 한숨을 쉬며 물었다.

“…공녀님께서 제게 먼저 함부로 대하셨어요.”

잠시 머뭇거리더니 성녀가 대답했다.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이 오자, 그녀는 겨우 지어내어 핑계를 댄 것이다.

성녀의 말에 주변에 있던 영애들의 시선이 더욱 싸늘해졌고, 주교의 표정은 더욱 당황한 듯 보였다.

이미 성녀가 무례하고 예의 없다는 항의 서신을 많이 받았을 테니 성녀의 변명은 누가 봐도 황당한 변명이었다.

본인 스스로 예의가 없으면서 상대방이 막 대했다고 머리채를 잡다니….

“그런 이유는 공녀님의 머리채를 잡은 일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 없습니다.”

주교의 싸늘한 말에 성녀의 얼굴엔 당혹감을 내비쳤다.

“다, 다른 이유도 있어요.”

“네. 말씀하십시오.”

“고, 공녀님께서 제 것을 뺏어가려 했어요. 그래서 그만 분을 이기지 못하고….”

“공녀님께서 성녀님의 물건을 뺏으려 했다는 말인가요?”

성녀의 말에 주교는 이번에도 이해하지 못한 듯 되물었다.

제국 내에서도 부유한 가문의 영애인 리첼이 누군가의 물건을 탐내서 훔친다는 건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매년 신전에 기부하는 금액만 해도 어마어마했으니 말이다.

“아니요. 물건이 아니에요. 그…건, 그건 카….”

성녀의 입에서 카일의 이름이 나올 것 같은 그 순간이었다. 사제 중 누군가가 황급히 그녀의 입을 막았다.

보아하니 신전 내에서도 이미 성녀가 카일을 노리고 들어온 걸 알고 있는 눈치였다.

일단 성녀의 입을 막았지만 일부 눈치를 챈 영애들이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성녀가 그들에게도 비슷한 이유를 가지고 괜히 트집을 잡으며 시비를 걸었으니 알 만도 했다.

“이유가 없으시군요. 카일 사제님! 사제님께서 공녀님의 상처를 살펴주십시오. 그리고 성녀님께서는 일주일간 감금의 방에 계셔야 할 겁니다. 그곳에서 스스로 반성의 시간을 갖도록 하죠.”

주교는 성녀의 다음 이야기는 못 들은 척 무시했고, 일부러 그녀가 보란 듯이 카일을 불러 리첼을 돌보라고 명령했다.

“아, 안 돼!”

성녀의 비명소리와 함께 주위 있던 여성들의 탄식이 들렸고, 동시에 부러운 시선이 리첼을 향했다.

“네. 알겠습니다. 공녀님 저를 따라오십시오.”

주교의 말을 들은 카일은 앞으로 나와 리첼에게 따라오라는 듯 눈짓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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