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도 나랑 맞춰 볼래요?-45화 (45/110)
  • 08.

    ‘신전에 가야 하긴 하는데.’

    막상 신전에 갈 생각하니 리첼은 망설여졌다.

    여전히 성녀와 싸웠다는 소문은 많은 귀족들 사이에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이럴 때만이라도 레녹스 공작가라는 방패막이를 내세워 소문을 쉬쉬하면 좋으련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어이없게도 그 일에 대해 가장 많이 떠벌리고 다니는 사람이 바로 레녹스 공작이었다.

    보통은 자식의 소문에 부끄러워 숨기려 하건만 그는 아니었다.

    ―신전에서 성녀와 머리채 잡고 싸운 사람이 바로 내 딸 리첼이랍니다. 아하하.

    묻지도 않았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그 사건에 대해 말하고 다녔다.

    그 바람에 관심 없던 사람들까지도 모두 그녀의 일을 알게 되었다.

    ‘내가 생각해도 특이해….’

    아버지의 입을 꿰맬 수도 없고, 나가지 못하게 잡아다 집에다 묶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에휴….”

    긴 고민을 하던 끝에 리첼은 결국 카일의 얼굴을 잠깐이라도 보기 위해 신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괜찮으시겠어요? 보는 눈이 많을 텐데요.”

    신전으로 가는 마차 안에서 비아가 걱정스러운 듯 계속 물었다.

    “하도 나를 씹어대서 내 귀에선 피가 날 지경이야. 그렇다는 건 이미 뒤에선 내 욕 다 했다는 걸 의미할 테니 앞에선 대놓고 뭐라 못 하겠지 뭐.”

    리첼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대답하면서도 ‘괜찮겠지’ 생각하며 스스로를 달랬다.

    신전은 여전히 카일을 보러 온 여성들로 가득했다.

    그녀들의 시선을 따라가면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건만, 만나고 싶은 카일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만나고 싶지 않은 성녀의 모습만 보였다.

    ‘오늘은 절대로 성녀와 마주치지 말아야지.’

    남들이 보는 앞에서 성녀와 이야기라도 나누었다간 구경거리가 될 것만 같았다.

    “오랜만에 초나 태워볼까나.”

    리첼은 성녀를 피할 겸 신전 안에 있는 그녀 전용 초에 불을 켜러 갔다.

    신전 내 귀족들을 위해 따로 마련된 공간이 있었다.

    귀족들은 각자 자신만의 자리를 돈 내고 산 후 그 자리에 양초를 두었고, 원하는 소원이 있을 때마다 초를 태워 소원을 빌곤 했다.

    리첼은 자신의 전용 자리에 촛불을 켜고 소원을 빌었다.

    “가족들 모두 건강하길.”

    겉으론 가족의 건강을 빌었지만 속으론 다른 소원을 빌었다.

    ‘그의 마음이 제 마음과 같기를.’

    누구라고 지칭하지 않았으나 요즘 끌리고 있는 그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가 이내 지웠다.

    기도하며 나온 후 다시 카일을 찾았으나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비아가 기다리는 곳으로 가려던 순간 갑자기 눈앞에 성녀가 나타났다.

    ‘마주치지 않으려 했건만.’

    성녀는 리첼이 나올 때까지 기도실 밖에서 기다린 듯 보였다.

    “무슨 낯짝으로 여기 오셨나요?”

    그녀는 다짜고짜 시비를 걸었다.

    무시하려고 다른 방향으로 몸을 틀었지만 성녀가 앞길을 막아버렸다. 보아하니 대답할 때까지 가는 길을 막을 작정인 것 같았다.

    썩 내키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리첼은 그녀의 말에 대꾸했다.

    “그러는 본인은 무슨 낯짝으로 신전에 계속 있나요?”

    좋게 대답할 수도 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예의를 지키지 않는 성녀에게 그녀도 예의를 차릴 필요는 없으니, 막말은 막말로 대꾸하자고 생각했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주변인들까지 들리진 않을 테지만 멀리서 그들을 바라보는 많은 시선들이 느껴졌다. 이번에도 싸울지 지켜보는 것만 같았다.

    “그날 아무 일 없었죠?”

    “그날이라뇨?”

    성녀는 카일에게 약을 먹이려 했던 날 리첼과 그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계속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그러니 대화하기 껄끄러울 텐데도 굳이 리첼에게 와서 물어보는 듯했다.

    예상치 못한 성녀의 물음에 놀랐지만 일부러 모른 척했다.

    “모른 척하려고요? 그날 사제님과 무슨 일 있었어요? 대답해요!”

    리첼이 모른 척하자 성녀는 언성을 높이며 대답할 것을 강요했다.

    “아아. 성녀님께서 사제님께 약을 먹이려다 실패한 그날이요?”

    굳이 그날 일을 콕 집어 말하자 성녀는 인상을 찌푸렸다.

    “꼭 대답해야 하나요?”

    리첼이 귀찮은 듯 물었다.

    “네. 전 꼭 알아야겠어요.”

    성녀는 확인이라도 해야겠다는 듯 눈을 부릅뜨며 노려보았다.

    “그건 성녀님께서 더 잘 아실 텐데요? 그날 혼자서 해결 잘 보셨나 봐요. 전 혼자서 해결 안 되겠던데요.”

    대답하라고 강요하는 성녀의 태도가 썩 마음에 들지 않자 리첼은 약 올리듯 비꼬았다.

    그러자 성녀의 미간에 있던 주름이 더욱 깊이 파였다.

    “거짓말! 내가 믿을 것 같아요?”

    그녀는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화내기보단 일단 자신의 잘못부터 사과하는 게 우선 아닐까요? 당신 때문에 사제님은 약을 먹을 뻔했고, 저는 그를 대신해 약에 취했어요!”

    “누, 누가 맡으라고 강요했어요? 오히려 내 일을 방해한 건 공녀님이잖아요!”

    “그럼 카일 사제님에게 사과는 했나요?”

    “그, 그건 공녀님이 알 바 아니잖아요.”

    사과할 거라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성녀는 잘못한 사람치곤 태도가 너무나도 당당했다.

    성녀의 행동으로 피해를 본 사람은 카일, 그리고 리첼이었다.

    그런데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다짜고짜 따지듯 말하다니 생각할수록 어처구니없었다.

    “그렇다면 성녀님의 질문에 대답을 하죠. 그날 당신이 생각하던 일이 있었고, 그와 전 이제 깊은 관계가 된 것 같은데요? 누구 덕분에 말이에요.”

    사실이 아니지만 성녀에겐 괜히 거짓말하고 싶었다. 뻔뻔한 그녀가 괘씸했기에 일부러 자극하는 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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