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역시나 밀리아를 만나면 안 되었다. 그녀는 리첼이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제안을 했고, 그 제안은 얼핏 들으면 그럴싸했다.
두 사람 모두 고민될 바엔 둘 다 경험해 보는 것도 나쁠 것 같진 않았다.
‘정말 그래도 될까?’
솔직히 두 사람과 모두 잠자리를 가진다고 리첼을 비난할 사람은 없었다.
결혼 전이고 누구와도 약혼하지 않은 상태이기에 황녀의 말은 리첼의 마음이 흔들렸다.
그 순간이었다.
―한 명만 고르세요!
올리비아의 호통이 들리는 것 같았다.
깜짝 놀란 리첼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올리비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잠시 환청이 들렸던 모양이다.
“갑자기 왜 그래?”
갑자기 불안한 듯 주위를 둘러보는 리첼의 모습을 보며 이상하다는 듯 밀리아가 물었다.
“제 양심이 찔리나 봐요. 어릴 적부터 제 몸은 제가 잘 지키라고 교육을 받아와서요.”
리첼은 올리비아의 모습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안도의 한숨을 쉬는 동시에 그녀의 모습이 없어도 그 말을 들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 느껴졌다.
“아쉽네….”
밀리아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역력했다.
“저를 설마 실험 대상으로 삼아 언니의 궁금증을 풀려는 건 아니겠죠?”
너무나도 아쉬워하는 밀리아의 표정을 보니 수상했다. 오로지 그녀의 재미를 위해 그냥 별생각 없이 던진 말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역시나 밀리아는 흠칫 당황한 듯 보였다.
“흠흠. 어쨌든 다른 사람 시킬 수도 있는데 너를 도와줬다는 건 카일 사제님도 네게 마음 있던 건 아닐까?”
갑자기 말을 돌리려는 듯 밀리아는 카일의 이야기를 꺼냈다.
“해독제가 없기도 했고, 위급한 상황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일일 뿐이에요.”
“진짜 그럴까?”
“….”
리첼은 밀리아의 말이 사실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일 사제는 애매하지만, 내가 볼 땐 말이야. 펠릭스, 그자는 네게 마음이 있는 건 분명해. 요새 다른 여인을 만난다는 소문도 들리지 않는 것 같던데. 안 그래?”
리첼이 아무 말이 없자 밀리아는 또다시 펠릭스라는 고민거리를 던지고 돌아가 버렸다. 일부러 리첼의 마음을 흔들려고 한 말이 틀림없었다.
그 말에 흔들리지 않으려 했지만 리첼은 일단 그를 직접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나고 나면 자신의 감정을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래서 리첼은 만날 약속을 정하기 위해 펠릭스에게 서신을 보냈다.
* * *
“당신의 서신을 계속 기다렸어요. 계속 연락이 없어서 얼마나 초조했는지 몰라요.”
얼마 후 환한 미소와 함께 펠릭스가 레녹스가를 찾아왔다.
“제가 몸이 좋지 않아서 병문안까지 오셨는데….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리첼은 펠릭스를 만나기 전까진 여전히 그를 향한 마음이 이전과 같으리라 생각했다.
‘뭔가 달라….’
펠릭스와 사귀었던 여인들의 존재를 알고 난 후, 그의 행동에 실망했지만 리첼은 여전히 그를 향한 마음은 이전과 비슷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카일과 이런저런 사건들이 엮이면서 그녀의 마음은 변한 것 같았다.
‘잠시 그와 잠시 멀어지게 된 그 짧은 순간 사이에 감정이 이렇게 변할 수가 있나?’
리첼은 그에게 느껴지는 감정의 변화가 혼란스러웠다.
그의 말들도 이전처럼 달콤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떨림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펠릭스를 만나기 전까지 리첼은 그와 카일 두 사람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건만 그를 보자마자 고민이 해결되는 것만 같았다.
마음의 변화라도 생긴 것일까?
* * *
펠릭스는 만나자는 리첼의 연락을 받고 기뻤다. 이제야 그의 진심을 알아주는 것만 같아 가슴도 두근거리고 벅차올랐다.
그래서 되도록 빠른 시일 내에 그녀와 만날 날을 정했고, 만나는 날 당일에도 재빠르게 레녹스가로 달려갔다. 조금 더 빨리 리첼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오랜만에 만났건만 그와 리첼 사이에 미묘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이전에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과는 뭔가 달랐다. 심지어 그와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만나지 않은 사이에 그녀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던 걸까.
“제 눈을 똑바로 바라봐 주세요.”
펠릭스의 말에 리첼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제 눈 안에 그녀의 모습을 찬찬히, 그리고 조심스레 담았지만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에는 어딘가 불안함이 보였다.
“갑자기 거리감이 느껴지는 건 제 착각일까요?”
이런 때일수록 신체적인 접촉을 한다면 더욱 거부감을 느낄 수 있었다.
여성에 대해 어느 정도 일가견이 있는 펠릭스는 이 사실을 잘 알기에 조심스레 다가가서 리첼의 마음을 흔들려고 시도했다. 일단 그의 마음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게 가장 중요했다.
“저를 용서해달라는 말은 하지 않을 겁니다. 당신이 하는 어떤 행동이든 저는 이해하니깐요. 다만 당신을 향한 제 마음만은 알아주셨으면 해요.”
그의 말에 제비꽃을 연상시키는 보라색 눈동자가 잔잔히 흔들렸다.
이번엔 불안감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더더욱 밀어붙이고자 이어서 말을 했다.
“제 마음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당신을 향해 있을 거예요. 그러니 저에 대해 좀 더 천천히 생각해주세요. 당신과 저의 마음이 오가는 속도가 달라도 저는 계속 기다릴 테니까요.”
“네… 알겠어요.”
어렴풋이 흔들리던 리첼의 눈동자는 이내 바닥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성공이야!’
그녀의 마음이 조금은 제게로 기울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펠릭스는 안심했다.
리첼의 얼굴을 보자마자 처음엔 너무 놀랐고, 피하려 했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운명의 신은 두 사람을 계속 엮어주었다.
그래서 마음이 갔던 걸까.
곁을 떠난 그녀를 잊으려 여러 여자를 만나봤지만 펠릭스는 사랑하는 여인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빠져나올 수 없는 늪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리첼은 곁을 내줄 수 있는 유일한 여성이었다.
‘리첼 양은 다른 여인들과 다를 거야.’
다른 여인들은 잊지 못하는 첫사랑을 못마땅하게 여길 테지만 리첼이라면 그의 마음속에 품었던 사랑과 그 아픔을 같이 공유할 것만 같았다. 그렇기에 리첼을 놓치기 싫었고, 그녀를 위해서 그는 다른 여인들은 모두 정리했다.
이제 모든 정리를 마쳤으니 리첼이 그에게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뭔가 어긋나는 기분이 들었다.
‘분명 그건 키스 마크였어….’
펠릭스는 리첼의 목에 있던 흔적을 떠올렸다.
‘그녀의 마음을 흔드는 또 다른 남자가 있는 걸까?’
리첼의 마음을 확실히 잡아야만 했다. 그러니 지금은 그가 매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리첼의 주변에 그런 흔적을 남길만한 남자가 있는지 확인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역시나 리첼이 신전에 가지 않고 카일이 레녹스가를 찾아오지 않자, 그녀는 그를 만날 수가 없었다. 대신에.
“리첼님 여기서 또 뵙네요.”
의외의 장소에서 펠릭스를 마주치는 건 여전했다. 한동안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건만 운명의 신이 그와 그녀를 이어주는 것만 같았다.
“그러네요.”
리첼은 일단 미소를 지으며 펠릭스를 반겼다.
전엔 자주 마주친 것만으로도 운명이라 생각을 하며 가슴이 떨려왔건만, 지금은 아니었다.
‘고민할 시간이라도 줘야지.’
펠릭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려 했건만, 생각할 시간도 없이 자주 마주치는 건 오히려 역효과였다.
“같이 앉아도 될까요?”
“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