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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나랑 맞춰 볼래요?-42화 (42/110)
  • 07.

    레녹스가를 방문한 황녀 밀리아와 함께 리첼은 정원에 있는 탁자에 앉아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다. 코끝을 자극할 만큼 향기로운 꽃향기를 맡곤 있지만 마음 속은 계속 안절부절 불안했다.

    그녀는 밀리아를 힐끔힐끔 바라보며 눈치를 살폈다.

    리첼은 카일과 있었던 일을 숨기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둘밖에 모르는 일이었기에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감이 좋은 밀리아가 먼저 레녹스가에 들이닥친 순간 숨기는 건 불가능해졌다. 추궁당한 후 끌려다닐 것만 같았다.

    밀리아는 레녹스 공작과 마찬가지로 리첼이 만나기 조금 곤란한 상황일 때를 잘 아는 것만 같았다.

    “너 뭔가 변한 것 같은데? 뭔 일 있었지? 응?”

    역시나 리첼을 바라보는 밀리아의 눈빛은 심상치 않았고 슬슬 무슨 일이 있었냐며 추궁하기 시작했다.

    “없었어요. 일은 무슨.”

    리첼은 정색하며 딱 잡아뗐다.

    “리첼, 네겐 이전과 다른 분위기가 흐르고 있어. 수상해. 아무리 부정해도 내 눈을 속일 수 없어. 너 분명히 뭔 일 있었어!”

    밀리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니에요.”

    “아니긴 무슨. 지금도 내 눈을 피하고 있잖아. 사제와 바람둥이 둘 중 누구야? 응? 말해 봐.”

    계속 부정하려 했건만 그녀는 끈질겼다. 원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리첼을 물고 늘어졌다.

    “펠릭스 영식 역시 그 사람 맞지? 내가 언젠가 넘어갈 줄 알았어. 바람둥이가 괜히 바람둥이니? 너같이 순진한 애들은 역시나 조금만 꼬셔도 넘어간다니깐. 지난번 무도회에서 수상하더니. 그 사람 몸이 그렇게 좋았니? 네 피부도 보송보송해질 만큼?”

    “아니에요.”

    “아니긴. 쑥스러워서 모른 척하는 거야?”

    “아니라니까요.”

    “아니긴. 에이.”

    “그분 진짜 아니에요!”

    자꾸만 자극하는 황녀의 말에 리첼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격하게 부정하고야 말았다.

    “그럼 카일 사제님이라고?”

    그러자 밀리아는 펠릭스가 아니란 걸 깨달은 눈치였다.

    “….”

    아무런 대답이 없자 밀리아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리첼을 바라보았다. 보아하니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다.

    “어때? 좋았어?”

    놀랄 땐 언제고 이성이 돌아오자 밀리아는 소감을 물었다.

    리첼은 자스민차의 향으로 마음을 진정시킨 후 말보단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대신했다.

    “보아하니 꽤 만족한 눈치네. 겪어보니 어때? 대물 맞아?”

    밀리아의 물음에 리첼은 입 안에 있던 자스민차를 밖으로 뿜을 뻔했다.

    “가장 궁금한 게 그거였어요?”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밀리아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대수롭지 않은 듯 웃으며,

    “내가 뭐 이상한 거 물어봤니?”

    라며 어깨를 으쓱했다.

    “….”

    리첼이 잠시 말문이 막히자 밀리아는 재밌다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

    “네가 소문의 주인공이 되었을 땐 어찌나 놀랐는지 몰라. 누가 신전 안에서 성녀와 싸울 생각을 하겠어?”

    보아하니 성녀와 머리채를 잡고 싸운 사건이 밀리아의 귀에까지 들어간 모양이었다.

    “그런 부끄러운 이야기는 사양할게요. 기어오르지 말라고 경고를 했을 뿐인데 제 머리채를 잡을지 누가 알았겠어요.”

    성녀와 싸웠던 일이 떠오르자 저절로 얼굴이 굳었다.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었다. 그 뒤로 얼마나 많은 영애들이 그녀를 찾아왔던지.

    대신 혼내줘서 고맙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보단 귀족의 명예를 실추시켰다고 비웃으려고 온 자들이 더 많았다.

    “하하하. 나는 통쾌하던데? 사실 그 성녀 소문이 자자했잖아. 겁도 없이 귀족 영애들을 협박한다고. 아마 다들 알게 모르게 손봐주려고 노리고 있었을 거야. 너처럼 앞에서 대놓고 싸우지 않았을 뿐이지.”

    “저도 성녀가 그렇게까지 막돼먹을지 몰랐어요.”

    “소문이 날 바엔 뺨까지 때렸으면 통쾌했을 텐데 아쉽네.”

    “뺨 때리고 싶은 걸 얼마나 참았는데요.”

    “나라면 때렸을 텐데 아쉽다.”

    황녀라고 성녀를 함부로 때려선 안 될 테지만 밀리아는 리첼과 달리 자신이 처벌을 받더라도 때리고 말 사람이었다.

    “그나저나 난 너와 사제님과는 이젠 정말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세상에나! 일이 예상치도 못하게 흘러갔네? 그래서 어떻게 된 건데? 갑자기 그가 마음을 열었을 리는 없을 테고.”

    밀리아는 화제를 바꾸며 의아한 듯 물었다.

    “사정이 있었어요.”

    “뭔데? 말해 봐! 나 입 무거운 거 알잖아. 응?”

    밀리아의 재촉에 리첼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자신에게 있던 일을 짤막하게 설명했다.

    “성녀는 제정신이 아니구나? 그러다 제 역할도 다 못하고 쫓겨나게 생겼는데? 게다가 원한이 많아 자칫하단 성녀 직에서 물러나자마자 목숨도 위험할 수도 있을 텐데. 겁이 없는 건지. 무식한 건지. 나 원 참”

    밀리아는 어이없다는 듯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성녀로서 편안한 삶을 보장받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카일 사제님이 목적인 것 같아요.”

    “그래서 성녀에 대해선 어떤 복수를 할지 생각해 봤어? 네게 함부로 대하기도 했고, 의도하진 않았지만 네게 약도 먹였잖아.”

    “이미 복수는 했다고 봐요. 그녀가 그토록 원하던 남자의 순결을 의도하진 않았지만 제가 가져갔으니 말이에요. 제 꾀에 제가 넘어간 셈이죠.”

    “왜 성녀는 그가 그녀의 꼬임에 넘어갈 거란 확신을 가졌는지 알 수가 없네. 어차피 그는 네 몸에 끌렸을 텐데 말이야.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거니?”

    “….”

    그러고 보니 리첼은 다음 일에 대해 생각해보진 않았다.

    그건 우연의 사고였고, 그는 단지 그녀를 도왔을 뿐이었다. 그게 다였다.

    “카일 사제님에게 너를 위해 사제복을 벗어달라는 그런 이야기조차 하지 않은 거니?”

    “솔직히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는데 그런 이야기를 어떻게 해요? 그건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일어난 일인데. 게다가 내가 말하기도 전에 먼저 사제 일 그만둔다고 하던데요?”

    밀리아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번갈아 기울였다.

    “정말이야? 그렇다면 이젠 사교계가 한바탕 뒤집어지겠는데? 그를 차지하려고 치열한 싸움이 예상된다. 하하.”

    재밌는 일이라도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는지 그녀의 눈빛이 초롱초롱 빛났다.

    “아마도 그렇겠죠?”

    밀리아는 재밌는 일일지 몰라도 리첼에겐 피곤할 일이었다. 수많은 경쟁자가 있다는 걸 상상하니 생각만으로도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럼 네 마음은? 네 마음은 어떤데? 두 남자 사이에서 흔들리는 중 아니었어?”

    “흔들리긴 했죠….”

    “이제 네 마음을 확실히 정했어? 어때? 한번 자고 나니 마음이 완전히 결정되었니?”

    “….”

    리첼은 그 말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요새 카일에게 마음이 이끌리고 있는 것도 맞고 그와 함께 지낸 밤은 기분이 좋았다.

    가끔 그가 그녀를 놀리는 것 같아 얄밉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그가 싫어진 건 아니긴 한데….

    “역시나. 내가 우려하던 상황이 왔구나. 내가 분명히 말했지. 몸이 먼저 끌린다고 말이야. 난 한 명이었는데 넌 두 명이니 어떨까 걱정했더니 역시나 넌 그 두 사람에게 끌리고 있잖아.”

    “그건 부인하진 못하겠어요.”

    두 사람에게 끌렸던 건 맞고, 지금은…. 사실 리첼은 그녀의 마음이 한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다만 일방적인 마음일 것 같기에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리첼의 도발에 넘어가는 듯하다가도 넘어가지 않는 듯한 카일의 태도를 보면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그의 마음을 알지 못하니 답답할 뿐이었다.

    “그럼 결론 났네.”

    고민하는 리첼을 바라보며 밀리아가 확신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

    “어떤 결론이요?”

    “보아하니 한 번 잤다고 마음이 흔들리는 것 보니 다른 한 명과도 자보는 건 어때?”

    “네?”

    “둘 다 자 봐야 네 마음이 진짜 확실히 결정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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