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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나랑 맞춰 볼래요?-35화 (35/110)
  • 06.

    “성녀님께서 지금 바닥에 떨어진 약을 사제님께 사용하려 하셨습니다. 아가씨와 제가 그 사실을 미리 눈치채서 막으려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아가씨와 성녀님 둘 다 약에…. 도와주십시오, 사제님. 해독제 가지고 계신지요?”

    그 말을 들은 카일의 표정이 굳었다.

    ‘망했다.’

    그가 약에 취한 다음 밝혔어야 했는데…. 그래야 일이 더 쉽게 풀렸을 것이다.

    힐다의 원래 계획은 몰래 약을 먹인 후 정신이 약해졌을 때 카일의 고백을 받는 것이었다.

    ‘그다음 그가 나를 덮치면 끝이지.’

    사제로 있다 보니 카일은 그의 속마음을 밝히지 않으려 했으니 힐다는 그가 그녀에게 고백할 기회를 마련하려 했다.

    비록 속마음을 끄집어내려는 작전은 실패했지만 그렇다고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다. 덮치는 이가 달라질 뿐이었다.

    ‘빠… 빨리 나를 구해줘….’

    카일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는 그녀를 도울 것이기에 힐다는 애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사랑하는 나를 어서 구하란 말이에요!’

    힐다는 그녀가 어느 정도 카일을 꼬시는데 성공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여인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 그가 그녀에겐 항상 상냥한 미소를 지었으니 조금은 마음이 넘어왔을 거라고.

    카일이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오자 힐다는 내민 손을 흔들었다.

    “!”

    하지만 카일은 힐다를 지나쳤다. 그녀가 아닌 리첼을 안아서 들어 올렸다. 그러곤 레녹스가 시종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더니 점점 시야에서 멀어졌다.

    ‘아니야. 이럴 순 없어!’

    요새 그가 레녹스가를 들락거릴 때 찜찜함을 느끼긴 했지만 힐다는 두 사람의 관계를 부정하곤 했다.

    ‘나 대신 저 계집애를 선택하다니. 말도 안 돼!’

    그러니 지금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혹시 두 사람 사이에 무언가 있던 걸까?

    “아, 안 돼!”

    힐다는 겨우 목소리를 냈건만 카일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이대로 그들을 가게 해선 안 될 것만 같았다. 그녀가 생각하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할 것만 같았다.

    “성녀님, 방으로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절박한 심정을 애써 모르는 척하며 시종은 그녀를 방까지 안고 간 다음 침대 위에 천천히 내려놓았다.

    처음 보는 남자였지만 그의 손길이 힐다의 몸을 위로해주었다.

    지금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선 저 남자라도 꼬셔야만 했다. 레녹스가의 시종이라면 일단 신분은 확실했으니 혹시라도 뒤탈이 생겨도 큰 문제가 발생하진 않을 것이다.

    “도… 도와줘.”

    힐다는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썩 내키진 않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남자는 그녀의 손길을 그대로 뿌리치고 방 밖을 나가버렸다.

    “….”

    방 안엔 홀로 고통스러워하는 힐다만이 남겨졌다. 아니, 내팽개쳐졌다.

    ‘왜 나 같은 미녀를 거부하지?’

    힐다는 혼자 버려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비참했다.

    * * *

    프랭크를 설득하는데 실패한 리첼은 결국 마부와 함께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마부는 체구가 작고 말랐기에 겨우 구멍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들은 성기사의 눈을 피해 기도실로 향했다. 가능한 한 빨리 달려왔다고 생각했지만 리첼과 마부가 도착했을 땐 성녀가 기도실 문을 열려고 하고 있었고 손안에는 술집에서 받은 병을 들고 있었다.

    성녀가 바로 움직일 거란 생각은 못 했는데 그녀는 예상보다 더 빨리 실행에 옮겼다.

    ‘저 병만 빼앗으면 돼.’

    리첼은 병을 보자마자 재빨리 달려가 성녀의 손목을 잡아 병을 빼앗으려 했건만, 그녀의 저항은 격렬했다.

    “이거 놔!”

    “내가 놓을 줄 알아?”

    치고받고 싸우던 중 리첼은 기회를 엿보아 병을 들고 있는 성녀의 손목을 쳤다.

    떨어지는 병을 잽싸게 잡으려 했건만 놓쳐 버렸고, 병은 그만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어쨌든 바닥에 떨어졌으니 성공이다.’

    리첼은 그렇게 생각하며 한시름 놓았다. 하지만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 약은 마시는 약이 아니라 향을 맡는 약이라는 것을 말이다.

    뒤늦게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땐 이미 늦었다.

    병이 바닥에 떨어져 깨지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진한 향기가 그녀를 자극했다.

    향을 맡자마자 온몸에 힘이 풀리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상야릇 감각이 덮쳐왔다. 몸이 덜덜 떨렸다.

    “공녀님 괜찮으십니까?”

    어느새 기도실 밖으로 나온 카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란 피우는 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온 모양이었다.

    “다… 다가오지 마세요.”

    가까이 다가오는 카일을 향해 리첼이 소리쳤다.

    지금 자신의 몸이 이상했고, 그의 손이 닿으면 더 이상해질 것 같았다.

    특히나 그는 놀라는 눈빛으로 리첼을 바라보고 있을 텐데도 그녀에게는 유혹하는 듯한 야릇한 눈빛으로만 보였다.

    “저… 혼자 일어날 수 있어요.”

    리첼은 혼자서라도 움직이려 했건만 실패했다. 몸이 그녀의 마음대로 움직이질 않아서였다. 힘이 들어가지 않아 비틀거리자 벽에 의존해 서 있으려 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의 몸은 제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휘청거렸고 똑바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정신을 차려야 해.’

    리첼은 다리에 힘을 주려 했건만 그럴수록 몸이 녹아버릴 것만 같이 흐물거렸다. 다리에 힘이 풀리며 바닥에 쓰러질 것 같았다.

    그때였다. 갑자기 그녀의 몸이 붕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

    누군가의 손이 그녀의 등과 다리를 지탱하고 있었고, 몽롱해지는 정신 사이에서도 청량한 향이 코를 자극했다.

    고개를 돌리자 또렷한 검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제야 리첼는 자신이 카일의 품 안에 안겨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와 밀착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자, 카일과 닿고 있는 곳마다 신경이 살아있는 것만 같았다.

    곳곳에서 심장이 뛰는 것만 같았고, 몸에 닿는 그의 손이 이상한 감각을 자극하는 것만 같아서 버둥거렸다.

    리첼이 카일의 품을 벗어나려 하자 청량한 체향이 또다시 느껴졌다.

    마음이 조금은 진정이 되는 것 같다가도 그의 체온이 느껴지자 몸이 움찔거렸다.

    “가만히 계십시오.”

    리첼의 귓가에 카일의 목소리가 내려앉는 동시에 얕은 숨결이 느껴졌다.

    몸이 또다시 움찔거렸다. 리첼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공녀님은 제가 모시겠습니다. 해독약이 있는지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공녀님을 잘 부탁드립니다.”

    카일과 마부의 대화가 끝나자, 마부와 그들과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다행이다.’

    해독약이라는 단어에 리첼은 일단 한시름 놓았다.

    조금만 참으면 아찔아찔한 감각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다행이라 여겼지만 동시에 걱정도 되었다.

    ‘내가 그 짧은 시간 동안 참을 수 있을까?’

    걸을 때마다 그녀의 몸이 살짝살짝 흔들렸고 그때마다 몸이 오싹거리며 전율이 일었다.

    리첼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다 손을 뻗어 그의 옷을 잡았다. 그러자 그녀의 차오르는 땀이 그의 옷을 적실 것만 같았다.

    ‘내 몸이 이상해.’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몸은 점점 더 민감해져만 갔다. 스스로 절제할 수 없는 감각이 고통을 안겨주었다.

    게다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워지기 시작했다. 달뜬 숨을 내쉬며 리첼은 자신의 가슴팍의 리본을 흔들었다.

    “더… 더워요.”

    평소라면 부끄러운 행위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너무 더웠다. 그래서 벽 사이로 들어오는 차디찬 저녁 공기로 몸의 열기를 조금이라도 식히고 싶었다.

    “조금만 더 참으십시오.”

    카일의 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그는 어딘가의 문을 열어 리첼을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곤 이리저리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리첼은 갑갑한 자신의 옷을 하나둘 차례로 벗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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