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어떻게 하실 겁니까? 직접 가실 겁니까?”
남자가 떠나고 나서 프랭크가 물었다. 리첼은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하실까 봐 걱정입니다.”
“아까 들었잖아. 오늘이 적기라고 한 거 보니깐 오늘 안에 일을 벌일 것 같은데? 한시가 급해.”
“리첼 님 혼자서는 보내지 못하겠습니다. 위험합니다.”
“지난번에도 혼자 갔잖아. 그러니 괜찮을 거야. 신전 안인데 위험할 게 뭐가 있어? 성기사들도 순찰 다니고 있으니 무슨 일이 있다면 소리 지를게. 그러면 그들이 달려오지 않을까?”
“지난번엔 목걸이의 위치만 확인하고 돌아오면 됐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혹시라도 일이 벌어져서 성기사들이 달려온들, 리첼 님이 한밤중에 신전을 몰래 들어갔다고 소문만 늘어날 뿐입니다. 그러니 한시가 바쁜 지금 고집부리지 말고 제 말 들으십시오.”
프랭크 말이 맞았다. 가뜩이나 요새 리첼에 대한 소문이 많이 난 상태라 모임에서 마주치는 영애마다 사실이냐고 물어볼 때마다 난감하긴 했다.
게다가 이번 일에도 성녀와 관련되었으니 소문이 퍼진다면…. 이미 떨어질 대로 떨어진 리첼의 명예가 더욱 떨어지긴 할 것 같았다.
“아무 일 없을 수도 있잖아. 그러니 나를 믿어주면 안 될까?”
리첼은 설득하려 했지만, 프랭크는 탐탁지 않은 눈빛을 보냈다.
* * *
성녀의 방.
오랜만에 마을에 갔다 왔건만 힐다의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때마침 약을 구한 건 다행이지만 이번 것도 썩 믿음이 가질 않았다.
“하아.”
요새 주변 상황이 그녀의 마음대로 되질 않았다.
카일을 위해서 만들어 먹였건만 독의 성분이 많을 줄 상상도 못 했다.
그의 입에서 피가 뚝 떨어졌을 땐 너무 놀라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가 신전 밖을 나갈 때까지 붙잡을 수 없었다.
그래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카일이 다시 신전에 돌아왔을 땐 하늘이 그녀를 구해준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 이후로 마음에 들지 않는 계집과 계속 엮일 줄 몰랐다. 왜 그는 자꾸만 레녹스가를 왕래하는 건지.
“짜증 나.”
그 목걸이. 자신의 기억이 맞다면 마법의 목걸이였다.
문제는 왜 그녀의 방에 카일이 가지고 있던 목걸이와 비슷한 목걸이가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치 커플 목걸이 같아서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아니야. 그럴 리 없지.”
힐다는 다시 한번 두 목걸이를 비교하려 서랍을 열었다.
“어?”
분명 항상 두던 위치에 두었던 목걸이가 보이질 않았다. 혹시 몰라 다른 곳도 찾아봤지만 아무리 봐도 레녹스가에서 가져온 목걸이가 보이질 않았다.
“아하하하.”
어이가 없어서 힐다는 헛웃음만 났다.
“도둑고양이처럼 몰래 목걸이를 빼가다니….”
리첼. 그 계집애는 통통 튀는 분홍 머리색 같이 진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위험한 존재였다.
카일이 그런 이상한 여자에게 끌리는 것만 같아서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는 나를 사랑해.’
그러니 그의 관심이 리첼에게 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신경 쓰이는 계집애 때문에 힐다는 일을 더 빨리 치러야 했다. 그래야만 불안감이 해소될 것만 같았다.
힐다는 술집에서 받은 약을 꺼냈다. 더 늦어질수록 불리한 상황이 올 것이다.
‘오늘이 지나면 적어도 석 달은 기다려야 해. 그땐 너무 늦어.’
신전은 사제들이 한 명씩 돌아가면서 새벽까지 기도드리는 기도일 순번이 정해져 있었고, 오늘 때마침 카일이 혼자 새벽 기도 전까지 기도하는 날이었다.
그 말은 즉, 남들의 시선을 피해 그를 꾀어내기 딱 좋은 날이란 걸 뜻했다. 지난번 실패한 이후 힐다는 이날만을 기다렸다.
어떻게 만난 운명의 상대인데. 이대로 놓칠 순 없었다.
“강력하다고 했지?”
먹는 약이 실패했기에 힐다는 이번엔 냄새만 맡아도 효과가 나오는 약을 구했다. 강력한 만큼 구하기 힘들었다. 그러니 실패해선 안 된다.
성공하기 위해선 카일이 향을 맡도록 유인해야 했다. 그도 이 향만 맡게 하면 게임 끝이었다.
“기도실에 들어가서 카일 님의 앞에서 약의 뚜껑을 열기만 하면 돼.”
힐다는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방을 나왔다.
밤에 순찰하는 성기사들의 눈을 피해 그녀는 조심스레 기도실로 걸어갔다. 도착하자마자 심장이 가파르게 뛰기 시작했다.
문 안쪽에 카일이 홀로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몸 안에 뜨거운 열기가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드디어 이날이 왔어. 이제 그는 내 거야!’
힐다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도실 문을 열기 위해 다가갔다.
그 순간.
누군가 그녀의 손을 막았고, 예상치도 못한 이가 힐다의 시선에 들어왔다. 리첼이었다.
‘눈엣가시 같은 계집애! 어떻게 알고 이곳에 나타났지?’
문 맞은편에 카일이 있다는 생각만으로 꽉 찬 힐다는 누군가 그녀에게 접근하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내가 갑자기 나타나서 놀랐죠? 내가 여길 어떻게 들어왔는지 궁금한 얼굴을 하고 있네요.”
리첼이 힐다를 향해 여유 있는 미소를 내비쳤다.
‘….’
힐다는 너무나도 어이없는 상황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안 되겠다. 오늘은 일단 포기하고 다음 기회를 노려야겠다.’
리첼에게 들켰으니 오늘은 작전 실패였다. 이대로 망칠 바엔 석달 후를 기다리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힐다는 일단 지금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생각지도 못한 인물 때문에 일을 그르칠 순 없었다.
일단 문을 잡으려던 손을 거두려 했건만 리첼이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
“지금 기도실에 들어가서 무슨 짓을 하려 했죠?”
“이… 이거 놔!”
힐다는 리첼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생각보다 강한 악력에 벗어나지 못한 채 버둥거렸다.
그 순간이었다. 리첼이 약을 들고 있는 손의 손목을 순식간에 쳐버렸다.
“당신 뜻대로 두게 놔둘 것 같아요?”
깨뜨리면 끝일 거라 생각한 모양이다.
“아… 안 돼!”
바닥에 완전히 스며들 때까지 향이 올라오면 큰일이었다. 다시 잡으려 했건만 이미 늦어버렸다.
쨍그랑.
바닥에 떨어진 병은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동시에 깨진 병을 향해 몸을 던지다 그만 두 사람 다 향을 맡아 버리고 말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아아… 안 돼.”
카일에게 사용해야 하는 걸 힐다와 리첼이 그를 대신해 향을 맡고 말았다. 향이 코끝을 자극하자 몸 안에 뜨겁고도 아찔한 감각이 느껴졌다.
“!”
그 순간, 기도실 방문이 열렸고, 카일이 밖으로 나왔다.
“여기서 두 분이 무슨….”
그는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 기도에 집중하느라 밖의 소란 소리를 듣지 못하다 뒤늦게 유리가 깨진 소리를 듣고 나온 모양이다.
힐다와 리첼 모두 일어날 수가 없었다.
레녹스 가문의 시종으로 보이는 사람이 힐다의 팔을 잡자 저도 모르게 입에서 교성이 흘러나왔다. 카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그게 말입니다. 성녀님께서….”
시종이 카일에게 지금 상황에 대해 설명하려는 것 같았다.
‘안 돼. 말하면 안 돼!’
힐다는 입으로 외치고 싶었으나 닿고 있는 감각이 너무나 자극적이라 말소리 대신 신음 소리만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