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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나랑 맞춰 볼래요?-33화 (33/110)
  • 06.

    “몰래 불러내야지 우리 둘의 모습을 못 보지. 우리가 같이 있는 모습을 더 이상하게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곧이어 가볍고 경박한 말투의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평소처럼 내게 오는 신도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잖아.”

    “킥킥. 그럼 그들 앞에서 내게 돈을 건네줄 순 있고?”

    남자는 비아냥거렸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성녀가 돈을 줘야만 하지? 둘은 무슨 사이일까?’

    긴장하고 있던 리첼은 숨을 천천히 소리 없이 삼켰다.

    “예배 중간에 나온 거야. 알아? 예배실에서 내게 신호를 보내면 어떡해?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아픈 척하고 잠시 나온 거야. 당신 때문에 얼마나 곤란한 상황인지 관심도 없겠지만 말이야. 에휴. 여기 돈 있으니 가져가.”

    성녀의 말이 끝나는 동시에 짤랑거리는 묵직한 동전 소리가 들려왔다. 돈을 받고 확인이라도 하는지 동전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말한 금액이 맞겠지? 네가 말한 건 오늘 구할 수 있을 것 같아. 템푸스 거리에 있는 포르쿠 술집으로 오라고. 대신 남들 몰래 와야 해.”

    두 사람은 포르쿠 술집에서 만날 약속을 정하는 것 같았다. 템푸스 거리라면 평민들이 많이 다니는 곳이었다.

    ‘성녀가 구하는 것이 대체 뭘까?’

    신전에서 남들 눈을 피해 사람을 만나는 거 보니 그녀가 뭔가 불법적인 일을 저지를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두 사람이 방에서 나간 후 조금 더 기다렸다가 리첼은 자신의 목걸이를 가지고 방에서 나왔다.

    저녁 예배가 끝나고 신전의 개방 시간도 끝나는 때쯤.

    리첼은 기사들과 함께 포르쿠 술집에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갈색 가발을 쓴 채로 비아의 옷을 빌려 입었고, 기사들 또한 허름한 일상복을 입었다. 그들은 술잔을 기울이며 성녀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진짜 올까요?”

    “진짜 오겠지. 공녀님 말씀 못 믿어?”

    “그, 그럴 리가요.”

    기사들은 성녀가 이상한 짓을 벌일 거란 걸 못 믿는 눈치였지만 프랭크만은 리첼을 믿어주었다.

    1시간쯤 기다리자 망토를 쓴 여인이 들어왔다. 얼굴을 가렸지만 가슴 밑으로 내려오는 머리는 주황빛이었다.

    “여기 술 한 잔 줘요. 약한 걸로.”

    여성은 자리에 앉자마자 곧바로 술을 주문했다. 주문하는 목소리를 들어보니 그 여성은 성녀가 확실했다.

    “진짜 오셨네요.”

    “쉿! 조용히 해.”

    기사들은 일단 대화를 멈추고 그녀를 주시했다. 술 몇 잔을 들이켜니 어떤 남자가 그녀의 앞에 앉았다.

    “여. 생각보다 일찍 왔네.”

    리첼이 아까 성녀의 방에서 들은 목소리였다. 힐끔 바라보니 성녀와 나잇대가 비슷해 보이는 젊은 남자였다.

    “모두 개인실로 들어간 후에 겨우 나온 거야. 개구멍을 통해서 왔으니 이렇게 일찍 올 수 있었어. 그거 뚫느라 고생을 얼마나 했는데 이렇게 바로 편하게 사용하네.”

    어쩐지 신전에 웬 구멍이 있나 했더니 성녀의 작품인 모양이다.

    “천사 역할은 할 만해?”

    남자는 대놓고 성녀라고 말할 수 없으니 천사라는 지칭으로 에둘러 표현했다.

    “아니. 이 생활도 지겨워.”

    “그래도 예전 삶보다는 낫잖아.”

    “그건 그렇지만.”

    “네가 옆에 있다고 그놈이 너한테 마음을 주디?”

    남자가 말하는 그놈이 카일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역시나 카일 사제를 만나기 위해 성녀가 된 건가.’

    그렇게나 사제가 자신의 것이라고 티를 내더니 그녀는 카일을 노리기 위해 성녀가 된 모양이다.

    “걱정 마. 조금만 더 있으면 내게 완전히 넘어올 거야.”

    성녀의 말에 놀란 리첼이 잔을 ‘쾅’하고 내려놓을 뻔했지만 다행히 프랭크가 리첼의 팔을 잡았기에 손을 멈출 수 있었다.

    ‘카일 사제가 성녀의 유혹에 넘어갔다고?’

    믿을 수 없는 말에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나 철벽 치던 사람이? 말도 안 돼!’

    리첼은 성녀의 말을 듣고도 믿을 수 없었다.

    “그럼 그 약은 왜 필요한데? 네게 넘어갔다면서? 나야 돈만 주면 좋지만 웃기네.”

    남자는 성녀를 비웃었다.

    “아직 완전히 넘어온 건 아니니깐. 마지막 한 방이 그 약이야. 비웃지 마! 지난번에 실패해서 그가 죽을 뻔했잖아.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넌 왜 약 조합에 실패한 거야?”

    죽을 뻔하다니…. 리첼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지난번 카일이 독을 먹고 쓰러진 건 성녀가 먹인 약 때문이었다. 대체 무슨 약이었기에 그에게 굳이 먹이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하하. 용케 살아남았네.”

    성녀의 말을 들은 남자는 통쾌하다는 듯 웃었다. 사람이 죽을 뻔했다가 살아났다는데 뭐가 저리 신나는 건지.

    남자를 힐끔 바라보던 리첼의 시선이 매서워졌는지 프랭크가 눈에 힘을 풀라며, 눈치를 주었다.

    “몰라.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는지 며칠 동안 신전에 돌아오지 못했단 말야. 그가 죽었으면 넌 이미 내 손에 없었을 거야. 이번 건 제대로 된 거지?”

    남자를 향한 성녀의 시선 역시 날카로웠다.

    “그래. 겨우 구했어. 네가 오늘까지 구해오라고 해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남자가 짜증을 내며 주머니를 내밀었다.

    성녀는 주머니 안을 살펴보더니 만족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또 다른 주머니를 남자에게 건넸다.

    “이번에 성공하면 특별히 돈 두 배로 얹어줄게.”

    “약속 지켜.”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헤어졌고, 리첼과 기사들은 그들을 따라 술집에서 나왔다.

    성녀가 신전이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긴 것을 확인한 남자는 그녀와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프랭크는 남자의 뒤를 조용히 따라가다가 그가 외진 곳으로 간 순간 빠른 걸음으로 달려가 그의 입을 막고 뒷목을 쳐서 기절시켰다.

    그리고 나선 레녹스가의 마차가 있는 곳으로 그를 어깨에 들쳐 메고 왔다.

    남자의 손을 뒤로 묶고 입에는 재갈을 물렸다. 무릎을 꿇리고 난 후 리첼과 기사들은 그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렸다.

    몇 분의 시간이 지나자 남자가 눈을 떴고, 자신이 처한 상황에 놀랐는지 입이 막힌 채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으… 으으읍!”

    그러자 프랭크의 칼이 그의 목을 겨누었다.

    “입 다물어. 이 칼이 네 목을 치기 전에 말이야.”

    협박이 두려웠는지 남자는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그러자 프랭크는 그의 입에 물고 있는 재갈을 풀었다.

    “묻는 말에 대답만 해.”

    “네네네에. 히익.”

    남자는 목 아래에 보이는 칼이 두려운 듯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방금 전 포르쿠 술집에서 여성에게 건넨 약이 뭐지?”

    “마…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그의 목을 향하던 칼은 그의 목에 더욱 가까워졌다.

    “히이익… 사… 살려주십시오.”

    “죽기 싫으면 똑바로 말해!”

    “아… 알았습니다. 말씀드리지요. 별거 아닙니다. 그냥 약이에요.”

    남자는 벌벌 떨며 말했다.

    “말 돌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 어떤 약이지?”

    “저도 부탁받은 것뿐이에요. 목숨만 살려주세요.”

    이후 남자는 약의 정체를 말했다.

    원하는 답을 얻자 프랭크는 칼을 거두었다.

    “내게 약에 대해 말한 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도록. 앞으로도 조심해라.”

    “그… 그럼요. 저도 누군가에게 약에 대해 털어놓은 사실을 알면 큰일 나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기사님.”

    리첼은 그 앞에 주머니를 던졌다. 남자는 어리둥절하며 주머니를 받았고, 그 안을 확인하자 눈이 커졌다.

    “입막음비야. 알았지? 누군가에게 우리 이야기를 털어놓았다간 그 배를 물어내야 할 거야.”

    “무… 물론입니다. 감사합니다.”

    남자는 횡재라도 한 듯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그대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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