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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나랑 맞춰 볼래요?-28화 (28/110)
  • 05.

    여느 때처럼 수업이 끝나고 리첼은 카일과 함께 정원으로 가고 있었다.

    그가 성서와 관련된 말을 하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진 않았다. 리첼의 정신은 아득히 먼 곳을 헤매고 있었다.

    그때였다.

    “조심하십시오!”

    카일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청량하고도 상쾌한 향이 그녀를 감싸는 것만 같았다.

    갑자기 일어난 상황에 머리가 새하얘지는 것 같았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녀는 카일의 품 안에 안겨 있었다.

    ‘대체 무슨 상황이지?’

    “괜찮으십니까?”

    리첼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곧이어 주위를 둘러보며 지금 그녀에게 일어난 상황을 확인했다. 멍하니 가다가 그만 반대편에서 오던 하녀와 부딪칠 뻔한 것이다.

    하필이면 그녀가 뜨거운 수프를 들고 있었기에 카일이 잡아주지 않았다면 리첼은 뜨거운 수프에 데일 뻔한 상황이었다.

    두근두근.

    고개를 들어 자신을 안고 있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흑진주처럼 까맣고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길고 풍성한 눈썹에 싸여 있었고, 날렵한 턱선과 오뚝한 코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어쩜 이리 아름다울까?’

    리첼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동시에 그의 몸을 의식하자 동공이 잠시 떨렸다. 지난번 봤던 잔근육이 이렇게 단단할 줄은 몰랐다.

    머리에 피가 몰릴 것 같은 야릇한 감정이 들었다. 꼭 그와 하나가 되는 것 같은….

    ‘아니야!’

    리첼은 부정했다. 상대방은 아무 의도 없이 한 행동일 뿐인데 그녀 스스로 엉뚱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카일의 품 안에서 벗어났는데도 청량한 향이 주변을 떠돌았고 그에게 느꼈던 체취가 식을 때까지 계속 그 품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떨리는 감정으로는 카일과 계속 이야기를 나눌 자신이 없었다.

    “오늘은 몸이 좋지 않은 것 같으니 저는 이만 방에 가서 쉬어야 할 것 같아요.”

    “그러십시오. 다치지 않으셨으니 다행입니다.”

    카일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 그의 눈빛을 보니 그동안 비교했던 장미 향은 잊혀졌고, 지금 리첼의 머릿속엔 솔잎 향만이 떠올랐다.

    ‘대체 왜?’

    카일은 가만히 있는데 리첼은 자꾸만 그에게 휘둘리는 기분이 들었다.

    펠릭스는 리첼을 의도적으로 휘두르고 있었고 그녀도 그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카일은 아니었다.

    의도하지 않은 행동일 텐데 자꾸만 이상한 망상에 사로잡히게 만들었고, 그 점이 리첼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혼자만의 오해.

    그걸 알면서도 그녀의 망상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것 같았다.

    낯을 가렸던 그가 이제 친해졌다고 편히 대할 뿐인데 리첼의 머릿속에선 이상한 상상으로 연결되고 있는 것만 같았다.

    * * *

    “콜록콜록!”

    리리스가 감기로 앓아누웠기에 리첼과 레이나만 수업을 듣고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리첼도 자꾸 기침이 나왔고 정신이 몽롱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카일의 목소리가 귀에 전혀 전해지지 않았다.

    ‘자고 싶다.’

    빨리 수업이 끝났으면 좋겠고, 얼른 가서 눕고 싶다는 생각으로만 가득 찼다.

    “잠시만 수업을 중단하겠습니다. 리첼 님 괜찮으십니까?”

    카일이 그녀의 상태를 눈치챘는지 수업을 급하게 끝냈고,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레이나가 리첼을 바라보았다.

    “언니 얼굴이 빨개! 안 되겠다. 주치의 불러올게. 리리스에게 감기 옮은 것 같아.”

    레이나는 주치의를 부르기 위해 나갔다. 리첼은 가쁜 숨을 내쉬었다. 점점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앉아있어도 힘들기에 고개라도 엎드리려던 찰나 어깨 너머로 묵직한 감각이 느껴졌다.

    리첼은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쓰러졌다. 이윽고 상대방의 손이 그녀의 뺨에 닿았다.

    “괜찮으십니까?”

    귓가에 걱정이 담긴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첼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지만 숨이 점점 가빠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뺨을 만지던 손이 갑자기 턱에 닿았고 곧이어 턱이 들렸다. 카일이 그녀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지그시 눌렀다. 서늘한 촉감에 리첼의 기분은 제법 좋아졌다.

    “열이 많이 나는군요.”

    코가 맞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기에 서로의 입술이 닿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리첼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몸이 경직되는 것 같았고 열이 점점 더 오르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곧 주치의께서 오실 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레이나 님께서 곧 모시고 오실 겁니다.”

    어느새 리첼의 고개는 또다시 카일의 어깨에 살며시 얹혀 있었다.

    레이나가 주치의를 부르러 간 건 알고 있었지만 조금만 더 늦게 왔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조금만 더 그와 이렇게 있고 싶었다.

    ‘조금만 더….’

    그의 몸은 차가웠지만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에 리첼은 저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고 말았다.

    * * *

    얼마의 시간이 지난 걸까? 리첼의 눈이 천천히 떴다. 무거웠던 눈꺼풀이 가벼워졌고, 몽롱했던 정신도 이젠 멀쩡해진 것 같았다.

    “일어나셨어요? 그제 쓰러지시고, 어제 꼬박 주무시더니 오늘 아침에야 겨우 눈을 뜨셨네요. 몸은 괜찮… 에구머니나!”

    비아가 놀란 채로 말을 잇지 못했다.

    “왜? 갑자기 무슨 일인데 그래?”

    “모… 목덜미에….”

    비아가 말을 끝까지 하지 못하자 답답한 마음에 거울을 꺼내 목 주변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오른쪽 목덜미 쪽에 붉은 장미 모양의 흔적이 새겨져 있었다.

    “이… 이게 뭐지? 내가 자는 사이에 큰 벌레에게 물렸나? 아니면 누가 때리기라도?”

    목에 난 자국을 문지르며 약을 가져오라고 하자 비아가 큰 소리로 웃었다.

    “아하하하. 아가씨. 그렇게 큰 벌레가 있을 리가요. 순진하셔서 모르시는구나. 그거 키스 마크 같은데요?”

    “뭐? 그럴 리가!”

    비아의 말도 안 되는 소리에 기가 막혀 리첼은 헛웃음을 지었다.

    “제 말이 맞을 것 같은데요?”

    하지만 너무나 확고한 비아의 표정에 리첼은 웃음을 멈췄고, 문득 자고 있던 사이에 묘한 감각이 느껴졌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다시 거울을 들어 확인해 보았다. 그러고 보니 잠결에 누군가의 숨결이 목덜미에 닿았던 것 같기도 했다.

    ‘꿈이 아니었나?’

    흔적이 남은 자신의 목을 손으로 감싸며 비아에게 물었다.

    “누가 내 방에 들어왔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자는 사이에 누가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

    “아가씨께서 아프다니깐 많은 분들이 병문안을 왔다 가셨어요. 엘시아 님, 아드리안 님, 레이나 님, 리리스 님, 펠릭스 님. 아 그리고 보니 카일 사제님께서 수업하시러 오긴 했는데, 아가씨 방에 들어왔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설마 나를 혼자 두고 하녀들 다들 나가 있던 거야? 내 목에 이런 흔적이 남는지 보지도 못하고?”

    리첼이 실눈으로 바라보자 비아가 그 시선을 피했다.

    “죄송해요. 저는 아가씨 지인분들이 오셨으니 당연히 자리를 비켜드렸죠. 진짜 아무런 기억이 없으세요?”

    누군가 왔었다는 느낌만 들었을 뿐 상대방 얼굴을 직접 보지 못했기에 고개만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내 방에 들어온 사람이 누구야?”

    분명 마지막으로 온 사람이 범인일 터였다.

    “잘… 모르겠어요.”

    “목까지 올라온 드레스 가져와.”

    리첼은 목까지 올라오는 드레스를 입어 흔적을 감추려고 했다. 하지만.

    “아냐. 평소대로 목이 파인 옷을 가져와.”

    “목에 난 흔적은 어떻게 하시려고요?”

    “….”

    흔적을 남긴 상대를 알아보기 위해선 차라리 겉으로 보이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반응을 보면 범인이 누군지 알 것이다.

    과연 범인은 누구일까. 펠릭스일까, 카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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