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도 나랑 맞춰 볼래요?-27화 (27/110)

05.

[성서의 이해]

리리스와 같이 수업을 들어서인가 수업은 정말 기초적인 부분부터 시작했다.

수업을 듣는 내내 리리스의 눈이 초롱초롱했다. 그녀에게 맞춘 수업이라 리리스는 재밌겠지만 내용을 이미 알고 있는 리첼은 정말 지루했다.

그냥 카일의 얼굴만 재밌기에 그의 얼굴만 힐끔힐끔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하품을 했다. 옆에 앉아있는 레이나도 지겨웠는지 동시에 하품을 하고 있었다.

“리리스 님께선 아직 어리시니 집중할 수 있는 시간도 짧고, 오늘은 첫 수업이고 하니 여기서 수업을 마치겠습니다.”

다행히 리첼과 레이나의 따분함을 눈치챘는지 카일은 수업을 일찍 끝냈다.

“와아!”

수업을 마치자마자 리리스는 환호성을 지르며 밖으로 나갔고, 곧바로 레이나도 꾸벅 인사를 한 후 방을 나갔다.

두 사람이 나가자 방 안에는 카일과 리첼만 남았다.

“아는 내용이라 많이 지겨우셨죠?”

“아….”

카일이 리첼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지겨우면 지겹다고 말하면 될 텐데 그 말이 입 밖에 나오는 순간 수업 듣지 말라는 말이 나올까 봐 리첼은 그 말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지겹다고 대답하셔도 괜찮습니다. 다음엔 더 재밌는 주제를 가져오겠습니다.”

다행히 그의 입에서 다음 수업부턴 듣지 말라는 말이 나오진 않았다.

“네.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거절당한 것 같지 않자 리첼은 한시름 놓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갑자기 양 갈래로 길게 딴 머리 한쪽이 붕 떠오르는 걸 느꼈다.

리첼은 곁눈질로 자신의 머리를 바라보다 멈칫했다. 너무 놀랐는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

카일의 손이 그녀의 머리끝에 닿아있었다. 그는 머리끝을 살짝 들어 잠시 향을 느끼고 있었다.

“공녀님에게선 달콤한 딸기 향이 나는군요.”

그의 부드러운 손길이 살짝 닿자 심장 고동 소리가 점차 빨라지기 시작했다. 머리가 멍해져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모든 감각이 머리끝에만 몰려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고 보니 처음 마주쳤을 때 카일에게서 청량한 솔잎 향이 났던 기억이 났다.

‘딸기 향과 솔잎 향이라… 뒤섞이면 어떤 향이 날까? 서로의 몸과 몸이 겹치면….’

리첼은 고개를 흔들었다.

‘대체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그는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대할 뿐인데 불순한 생각으로 가득찬 자신의 모습에 리첼은 부끄럼을 느꼈다.

얼른 화제를 바꿔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차… 차라도 한잔하고 가실래요?”

저도 모르게 나온 말이라 내뱉자마자 후회했다. 거절할 게 뻔한데 왜 하필 차를 마시고 가라고 했는지.

“네. 그러죠.”

하지만 의외의 대답이 들려왔다.

정말로 마시고 간다고?

예상외의 답변을 들으니 리첼의 심장은 가파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대로 계속 같이 있다간 카일의 앞에서 실수라도 할 것 같았다.

일단 정신을 바짝 차린 후 카일을 정원으로 안내했다. 어찌나 떨리던지 그녀의 팔과 다리는 뻣뻣한 상태로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평소의 걸음을 유지하려 했건만 몸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냥 자신의 착각이었으면 했건만 리첼의 모습을 본 비아가 놀랐는지 다가와서 그녀의 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러곤 카일에게 자신이 먼저 안내하겠다며 리첼에게 괜히 옷 갈아입고 나오라는 눈치를 줬다.

“하아…. 그가 가르치러 온 첫날부터 실수할 줄이야.’

리첼은 옷 갈아입으러 방에 들어와선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상대방은 별 의미 없이 하는 행동일 텐데 혼자만 의식하고 이상한 망상에 빠지는 것 같았다.

‘앞으로도 잘 견뎌낼 수 있을까?’

같이 차 마시는 건 어쩌다 한 번일 뿐이니 수업 시간만 잘 버티면 될 거라며 안일하게 생각하려 했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수업이 끝난 후 카일과 함께 차를 마시는 일이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어버렸다.

물론 리리스와 레이나가 같이 마시는 날도 있었지만, 리리스가 차를 마시지 않는 날엔 레이나도 일부러 바쁘단 핑계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예전에 도와준다는 말을 했던 걸 떠올리며 눈치껏 빠지는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리첼이 카일과 단둘이 보내는 시간은 점차 늘어났다.

눈에서 멀어질 땐 마음이 조금은 식는 것 같더니 이렇게 자주 얼굴 보니 다시 떨려왔다. 보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그에게 점점 끌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펠릭스와는 조금 다른 감정이었다. 쌍방의 호감을 느낀 그와는 달리 카일에게는 리첼의 일방적인 호감이라 조금 다르게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었다.

* * *

한동안 펠릭스에게 편지를 보내지 않았지만, 또다시 우연한 만남은 계속 되었다.

비아와 디저트를 먹으며 앉아있는데 그가 먼저 반갑게 인사하며 다가왔다.

“오랜만입니다. 편지를 기다렸건만 답장이 없어서 제 하루하루가 기다림의 연속이었어요.”

“죄, 죄송해요. 요새 조금은 바빴어요.”

여전히 펠릭스에 대한 경계가 무너지지 않았기에 리첼은 도저히 답장을 보낼 수 없었다. 그런 그녀의 감정을 눈치라도 챘는지 그는 잠시 당황한 듯한 얼굴을 하다가 이내 씨익 웃었다.

“잠시 기다려주시겠어요?”

리첼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어디론가 향했고, 그의 뒷모습을 보며 비아가 말했다.

“인연은 인연인가 봐요. 이렇게 자주 마주치다뇨. 리첼 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으…응. 그런 것 같네.”

이상하게도 펠릭스와는 우연의 만남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여자관계를 떠올리면 거부감이 들다가도 우연히 만나는 기회가 늘수록 운명에 이끌리는 것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메리오너스가에서 일하는 하녀가 말하는 걸 들었는데요, 펠릭스 님께서 실제로 다른 여인들은 정리했대요. 아가씨를 위해서 그런 거 아닐까요?”

비아는 마음이 흔들릴만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말만 들으면 펠릭스의 마음이 진심일 것만 같았다.

“그런가?”

리첼의 마음이 살짝 흔들리는 것도 같았다. 정리가 끝났다는 건 자신에게 항의하러 오는 여인들이 이젠 없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녀에게 마음이 없는 카일보다는 마음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펠릭스가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하던 찰나에 눈앞에 꽃다발이 갑자기 나타났다.

고개를 들자 꽃을 사온 펠릭스가 리첼의 앞에 꽃다발을 내밀고 있었다. 붉은 장미로 채워진 꽃다발이었다.

“어머! 멋진 꽃이네요.”

아무것도 모르는 비아가 아름다운 꽃을 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하지만 리첼은 그가 왜 하필 장미꽃을 택했는지 알 것 같았다.

‘치사해.’

분명 의도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날 술에 취해 그와 입 맞추었던 그때 그에게서 났던 향과 같았다. 장미 향이 코끝을 자극하자 그날 일이 떠올랐다. 동시에 그때 느꼈던 달콤한 감각이 떠오르자 몸이 살짝 떨렸다.

저도 모르게 얼굴이 점차 붉어지는 것을 느끼자 리첼은 얼른 자신의 얼굴을 꽃다발 뒤로 숨겼다.

펠릭스는 자신에게서 장미 향이 나는 것을 분명히 아는 것 같았다.

그러니 고민하는 그녀의 마음을 흔들기 위해서 자신의 향을 선물한 것이다.

어쩌지?

펠릭스를 만나고 나니 리첼의 마음은 더욱 혼란스러웠다.

그녀에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펠릭스를 보자니 그에게 끌리는 건 맞는데, 눈앞에 카일의 모습을 보면 또 카일에게도 끌리는 것 같기도 했다.

가장 큰 문제는 리첼 본인이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리첼도 그런 스스로가 답답했다. 한 명에게만 뛰면 좋으련만. 심장은 그녀가 의도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주질 않고 두 남자를 향해 혼자서 날뛰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몸 안에서 심장만 다른 세상에 사는 것만 같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