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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나랑 맞춰 볼래요?-26화 (26/110)
  • 05.

    완전히 완치까지는 아니더라도 걸을 수 있을 때까지 카일은 레녹스가에 좀 더 머물기로 했고 그가 지낸 지 5일째 되는 날이었다.

    약의 효과가 좋았는지 그는 오늘이나 내일쯤 신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만큼 회복되었다.

    “이게 마지막 약이려나.”

    리첼은 약을 들고 자신의 방으로 갔다.

    카일이 그녀의 방에 머무는 동안 많이 친해지진 않았지만, 그럭저럭 얘기할 수 있는 관계가 되었다. 경계하는 벽이 조금은 무너진 정도로만 가까워진 것 같았다.

    하지만 냉랭한 시선도 받아본 리첼에겐 약간 허문 그 벽이 언제 다시 철벽으로 돌아설지 걱정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조금만 시간이 더 있었어도 그의 벽을 완전히 허물 수 있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았다.

    “회복약이에요.”

    리첼이 방문을 확 연 순간 카일은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

    분명히 상처 입고 쓰러졌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지금 그의 단단한 근육을 보자마자 어찌나 심장이 떨리던지.

    “엄마야!”

    리첼은 그만 약을 떨어뜨릴 뻔했다.

    다행히 약이 바닥에 떨어지진 않았지만 중심을 잡느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바람에 쟁반에 반 정도 흘렀고, 손가락에 약이 묻고 말았다.

    “죄송해요. 약 다시 가져올게요.”

    리첼이 다시 방 밖으로 나가려는데 카일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괜찮습니다. 몸이 거의 회복되어서 남은 양만 마셔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괜찮다는 말에 리첼은 약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손수건을 들고 손을 닦으려 했으나 카일이 먼저 그녀의 손을 낚아챘다.

    “?”

    곧이어 그의 입술이 리첼의 손에 닿았고 ‘츄릅’ 소리를 내며 카일은 그녀의 손에 있는 액체를 모두 빨아들였다.

    그의 타액이 손가락을 스치자 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리첼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

    카일의 혀가 닿는 순간 몸이 뻣뻣해지는 기분이었고, 온몸에 피가 통하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몸은 굳어지고 있었다.

    “대체 왜….”

    “이렇게 닦는 것이 더 빠릅니다.”

    카일은 리첼의 눈을 바라보며 혀끝으로 손가락을 부드럽게 핥았다.

    핥는 건 손가락인데 그의 시선이 그녀의 온몸을 핥는 것만 같았다.

    ‘착각이겠지….’

    그 모습이 어찌나 유혹적이던지 리첼은 몸이 떨렸지만 애써 아닌 척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와 닿아있는 손끝이 자꾸 움찔거리며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긴장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러자 카일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의 미소를 보자 리첼은 더욱 긴장했고, 제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고개를 흔들어도 제정신으로 돌아올 것 같지 않자 그녀는 눈을 감고 견뎌내려고 노력했다.

    그러자 부드럽게 콕콕 쪼아대는 짧은 입술의 감촉이 손끝에서 느껴졌고, 입술이 지나간 자리에는 그의 타액의 흔적이 남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놀란 마음에 저도 모르게 손끝을 떨며 리첼이 눈을 떴다.

    하지만 카일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의 수건을 꺼내 그녀의 손에 묻은 그의 타액을 닦아주고 있었다.

    ‘착각이었나?’

    아니, 착각일 리 없었다. 손가락에서 보드라운 입술의 감촉이 확실히 느껴졌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평한 사제의 모습에 리첼은 어리둥절한 채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손수건으로 닦을 거면 대체 왜 입술로 핥아준 거지?’

    그의 행동에 대해 의문이 생겼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는 카일의 모습을 보니 혼란스러웠다.

    그의 담담한 표정과 달리 혼자만 이상한 생각을 한 것 같아 그 순간 리첼은 부끄러웠고, 심장은 터질 것만 같았다.

    * * *

    ‘부끄러워서 신전에 어떻게 가겠어.’

    카일 사제는 신전으로 돌아갔고, 그를 다시 만나기 위해선 신전에 가야 했다.

    하지만 리첼은 신전에 갈 수 없었다. 성녀와 머리채 잡고 싸운 일이 사교계에 이미 소문이 났기 때문이었다.

    기껏 사제와 친해진 것 같았는데 아까웠다.

    얼굴을 비추며 더욱 친분을 쌓을 수 있는 기회였지만 순간의 감정에 못 이긴 과거 행동이 현재 그녀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이대로 철면피를 깔고 신전에 갈까?’

    신전에 몇 번이나 가려고 망설였지만, 리첼에겐 아직 신전에 갈 용기까진 있지 않았다. 소문이 잠잠해질 무렵에야 겨우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떻게 해야 그를 만날 수 있을까?’

    리첼은 카일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내려 했지만 마땅한 핑곗거리가 없었다.

    ‘이대로 몇 개월을 더 기다려야 하나?’

    계속 고민했지만 별 다른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인생은 예측할 수 없다고 했던가. 리첼의 귀에 듣고도 믿을 수 없는 소식이 들렸다.

    “카일 사제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응? 신전에 가지 않는 이상 만날 수 없는 남자가 여길 왔다고?”

    “네.”

    의아한 듯 표정을 짓고 있는 사이에 비아가 그녀의 손을 잡고 1층으로 내려갔다.

    문 앞에 서서 집사와 이야기를 나누던 카일이 리첼의 얼굴을 발견하자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레녹스 공작님의 명에 따라 앞으로 3일에 한 번씩 공녀님들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곧이어 집사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갑자기요?”

    “네. 궁금한 점이 있다면 공작님께 직접 여쭤보십시오. 지금 서재에 계실 겁니다.”

    집사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고, 그 말을 듣자마자 리첼은 서재로 달려가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며 소리쳤다.

    “대체 무슨 꿍꿍이가 있으실까요, 아버지?”

    “무슨 소리를 하는 게냐?”

    다짜고짜 문을 열어젖혔지만 레녹스 공작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짜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체하는 건지 그의 표정만 봐선 알 수 없었다.

    “사제님께서 신학을 가르치러 온다고요? 이렇게 갑자기요?”

    카일과 만날 기회가 늘어나니 좋긴 하면서도, 의도하진 않았지만 항상 리첼이 하려는 것을 방해하려는 것 같은 공작의 행동을 생각하면 찜찜하기도 했다.

    그녀의 계획을 꼭 망가뜨릴 것 같은 그런 불길한 예감이라고나 할까나.

    “리리스도 이제 신학을 배워야 하지 않겠느냐? 그래서 불렀단다. 카일 사제님은 아직 견습이긴 하지만 기본적인 사항은 습득했으니 가르치는데 부족하진 않을 게야. 내 추천으로 사제가 되었으니 이 정도 부탁은 내가 할 수 있는 것 아니냐? 대체 나를 뭘 의심하는 게냐? 섭섭하게.”

    레녹스 공작은 토라지듯 말했다. 그의 표정을 보니 리첼은 자신이 너무 과하게 생각한 것 같기도 했다.

    “알았어요. 레이나와 리리스가 졸지 않도록 잘 감시하면서 수업 잘 들을게요.”

    의심을 완전히 푼 건 아니지만 일단 아버지의 말에 수긍하며 서재에서 나오려 했다.

    “난 운명의 상대가 존재한다고 믿는단다. 그러니 네 마음이 이끌리는 대로 행동하려무나. 이것 하나만 명심하면 좋을 것이다. 나는 네 행복을 위해 행동할 뿐이라는 걸 말이다.”

    그런데 레녹스 공작이 갑자기 뜬금없는 말을 했다. 리첼은 고개를 돌려, 가는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혹시 목걸이가 카일에게도 반응한 것을 알기라도 한 걸까?’

    하지만 아버지가 알 리가 없었다. 그 사실을 아는 건 밀리아와 올리비아뿐이었다.

    두 사람 다 누군가에게 말할 사람들은 아니었다.

    ‘아니면 밀리아 언니의 목소리가 워낙 커서 엿듣기라도 한 건가…?’

    리첼은 공작을 의심하려다가 자신이 지레짐작한 거라 생각하며, 아무 말 없이 미소만 짓고 있는 공작을 뒤로하고 서재를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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