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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나랑 맞춰 볼래요?-24화 (24/110)
  • 04.

    차갑지만 부드러운 입술과 옅은 숨결이 느껴지는 것 같아 리첼의 몸이 잠시 움찔거렸지만, 다행히 약이 그의 목을 타고 서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약의 기운이 온몸에 퍼지자 고통스러워하며 힘겹게 숨을 내쉬던 카일은 어느새 고른 숨을 쉬고 있었고, 이마에 생긴 주름도 서서히 펴졌다.

    그제야 마음이 편해진 리첼은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카일을 도왔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느껴지자 갑자기 힘이 풀렸고, 그녀의 상체는 그대로 침대에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힘이 빠질 것 같아 이대로 눈을 감고 자고 싶었건만 그럴 수 없었다. 리첼은 아직 피가 묻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부상이 심각한 상태니까 내일까지 정신을 차리진 못하겠지?’

    리첼은 그런 안일한 생각과 함께 몸을 씻은 후 슈미즈를 입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후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카일을 바라보았다.

    선이 고운 얼굴에 저도 모르게 그녀의 손이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보드라운 감촉이 느껴졌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질 줄 알았는데 이렇게 눈앞에 보이니 마음이 살짝 흔들리는 것도 같았다. 펠릭스에게 느꼈던 감정 비슷하게 카일에게도 끌리는 모양이다.

    ‘아마 몸의 이끌림이겠지?’

    찬찬히 남자의 얼굴을 쓰다듬던 리첼은 저도 모르게 잠이 들고 말았다.

    [똑똑]

    연속해서 들려오는 노크 소리로 인해 잠이 깬 리첼은 눈을 번쩍 떴다.

    상체를 일으킨 후 카일의 얼굴을 망토로 잽싸게 덮었다. 덮자마자 비아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세상에나. 그렇게 불편하게 주무셨어요? 방까지 내주시더니 지극정성이시네요.”

    허리가 뻐근하다고 느낀 리첼은 팔을 내뻗어 기지개를 켜며 부스스 일어났다.

    “무슨 일이야?”

    웬만한 일 아니면 아무도 방 안에 들어오지 말라고 명령한 상태였다. 그러니 아침 일찍부터 비아가 왔다는 건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걸 의미했다.

    “펠릭스 님께서 지금 아가씨를 찾아오셨어요.”

    “뭐?”

    갑작스러운 그의 방문에 리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침 일찍부터 왜?

    “곤히 주무시느라 모르셨나 봐요. 지금 낮이에요.”

    “아… 그래?”

    어제 늦게까지 잠을 자지 못했기에 늦잠을 잔 모양이었다. 준비하고 나가려는데 멀리서 펠릭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리….”

    응? 리첼은 황급히 방 밖으로 나가서 자신의 방문을 닫았다. 뒤에서 비아가 자신을 부르는 것 같았으나 지금은 그녀의 말을 들을 여유가 없었다.

    눈치 없는 하녀 하나가 그녀의 방으로 안내하는 바람에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를 맞이해야만 했다.

    리첼의 모습을 보자마자 펠릭스의 눈이 잠시 커지더니 그의 시선은 바닥을 향했다.

    “요새 연락이 없으셔서 걱정 많았습니다. 이렇게 불쑥 찾아오게 된 점 죄송합니다.”

    “아… 네….”

    ‘죄송하면 연락하고 찾아올 것이지.’

    속마음을 말하고 싶었으나 차마 내뱉지 못하고 속으로 삼켰다.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어요. 편지에 답이 없어서 요 며칠 새 불안했어요.”

    펠릭스에게 몇 번의 편지가 왔지만 답장하고픈 마음이 없어서 일단 보류한 상태였다.

    “그녀들은 제가 잘 정리했지요. 이제 다시 리첼 양을 찾아올 리 없을 거예요. 제 말을 믿어주셨으면 좋겠어요.”

    불안했다는 그 말이 사실이긴 했는지 펠릭스의 얼굴은 수척해 보였다. 살이 빠진 것 같기도 했다.

    “그러게요. 제가 미처 연락을 드리지 못했네요. 요새 정신없어서….”

    하지만 리첼의 지금 그에게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방 안에 카일이 있다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들키기 싫었다.

    “지금도 바쁜데 어떡하죠? 죄송하지만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면 안 될까요?”

    “제 말 좀 들어주세요. 제가 다 설명하겠어요. 그러니 내게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줘요. 이대로 돌아갈 수 없어요.”

    지금 이야기할 정신이 아니기에 리첼은 얼른 펠릭스를 보내고 싶었지만, 그는 자신을 거절하는 거라 오해하는 것 같았다.

    “일단 다음에 들을 테니 오늘은 이만 가주세요.”

    “제 진심을 들으신다면 생각이 달라지실 거예요. 그러니 제발 내 말부터 들어주세요.”

    하지만 펠릭스는 리첼이 자신의 말을 들어줄 때까지 돌아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때였다.

    “어맛!”

    리첼은 그제야 자신의 옷차림을 알아챘다. 슈미즈 차림으로 그를 맞이하고 있을 줄이야.

    “다음에 이야기해요. 다음에! 제가 서신을 보낼게요. 지금 제 옷차림을 보세요. 대화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잖아요.”

    복장이 부끄럽긴 했지만 그를 보낼 수 있는 핑계가 될 수 있어서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이 들기도 했다.

    “리첼 님의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마음이 듬뿍 담긴 서신 기대 하겠습니다.”

    리첼은 애써 억지 미소를 지었지만 당분간 펠릭스와 연락하고 싶지 않았다. 그와 사귀던 여성들이 항의한 사건이 여전히 마음에 걸렸다. 그 찜찜한 기분이 드는 한 그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아버지는 나를 위해 펠릭스 님이 다른 여인들을 정리했다고 생각하라지만 그 과정이 왜 이리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리첼은 자신의 방 창문에서 레녹스가를 떠나는 마차를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 * *

    창에서 내리쬐는 강한 햇빛에 눈부심을 느끼며 카일은 차츰 눈을 떴다.

    머리가 지끈거렸기에 한쪽 눈을 찡그리며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평소에 느껴지는 익숙한 공기가 아니었다.

    따뜻하고 차분한 공기에 어색함을 느끼며 주위를 둘러보자마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처음 본 낯선 공간에서 누워있었다니.

    그가 있는 곳은 한눈에 보아도 여인의 방이었다. 놀라운 눈으로 방 안 곳곳을 훑어보았다.

    “대체 여긴 어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건만 몸이 욱신거렸다.

    카일은 한쪽 이마를 찌푸리며 자신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그의 몸은 반나체 상태였고, 몸 곳곳엔 피가 묻어 있었다. 정신을 잃은 사이에 피를 토한 모양이었다.

    독을 마시고 약초를 구하려고 신전 밖을 나온 것까진 기억이 났는데 그 이후론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은 것 같긴 한데….’

    몸에 난 상처를 스스로 치료하려던 그때였다.

    방 안으로 누군가 들어왔다. 옷차림을 보아하니 저택에서 일하는 하녀 같았다.

    “어머! 일어나셨네요. 정말 다행이에요. 아가씨께서 얼마나 지극정성으로 돌봤는지 몰라요.”

    “…아가씨?”

    카일은 한 박자 늦게 하녀의 말을 따라 했다.

    누구냐고 묻기도 전에 익숙한 얼굴이 뒤따라 방으로 들어왔다.

    분홍 머리를 단정히 하나로 묶은 그녀의 얼굴을 보자 그는 저도 모르게 이마를 찌푸렸다.

    그토록 피하고 싶은 상대였는데 이런 식으로 만날 줄이야.

    “어머. 정말이네? 정신을 차린 걸 보니 몸이 많이 좋아졌나 봐요.”

    “…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만나기 껄끄러웠기에 카일은 애써 리첼의 눈길을 피하며 대답했다.

    “혹시 몰라 사제님께서 레녹스가에 있다는 사실을 비밀로 해두었어요. 어떤 사정인지 몰라서.”

    “…고맙습니다.”

    쓰러지는 모습을 목격했으니 궁금할 만도 했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배려차원에서 그가 레녹스가에 있다는 사실을 비밀로 해주었다는 것을 알자 카일은 일단 한시름 놨다.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말하기 곤란한 상황이었다.

    ‘아무것도 물어 보지 않다니….’

    카일의 입에선 저도 모르게 안도의 미소가 새어 나왔다.

    리첼이 엉뚱한 짓을 하는 것을 몇 번 봤기에 이번에도 이상한 행동을 하지 않을까 불안한 생각을 했지만, 그건 그의 기우였던 모양이다.

    그녀가 신전에서 저지른 일들만 떠올려도 피식 웃음이 나오긴 했다.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성녀에게 실제로 들이받을 영애가 있으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그 순간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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