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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나랑 맞춰 볼래요?-23화 (23/110)
  • 04.

    “이거 안 놔?”

    먼저 머리채를 잡은 건 성녀였다.

    놓으라고 몇 번의 경고를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리첼 역시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와 똑같이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지나가던 사제들이 두 사람의 싸움을 보더니 놀란 얼굴로 달려와 말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오고 나서야 리첼과 성녀는 서로의 머리채를 놓았다. 그리고 역시나 혼이 나는 건 성녀였다.

    “공녀님께 이렇게 함부로 대하다뇨! 오늘 하루 감금의 방 안에 있어야 할 겁니다.”

    사제의 으름장에도 여전히 씩씩거리며 리첼을 노려보던 성녀는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그 시선을 거두었다. 곧이어 그녀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다.

    “?”

    리첼은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아….’

    그러자 카일 사제가 싸늘한 시선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참았어야 했는데….’

    뒤늦게 후회를 했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아마도 지금 바로 레녹스가의 영애와 성녀가 머리채를 잡고 싸웠다고 소문이 날 터였다. 그리고 평소 성녀의 행동으로 보아 아마 남자 한 명을 사이에 두고 싸웠다고 말이 나올 것만 같았다.

    ‘이게 무슨 망신이람.’

    이렇게까지 누군가와 싸운 적이 없었기에 리첼의 귓가엔 몇몇 영애들의 비웃음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비아를 데려왔어야 했다. 그랬으면 머리채 싸움으로 끝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기사들만 데려오지 말고 비아도 같이 왔어야 했나.’

    아쉬움이 남아봤자 이미 끝난 일이었다.

    신전 밖을 나온 후 리첼은 그녀를 기다리는 마차를 향하지 않고 그냥 정처 없이 걸었다. 혼자 있고 싶었다.

    풀어져 내린 산발 머리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그녀를 미친 사람 보듯 힐끔힐끔 바라보고 있었지만 아무도 접근을 하지 않으니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울적한 기분이 나아질 때까지 혼자서 신전 앞의 나무에 앉아있었더니 어느새 날이 저물어 있었다.

    “공녀님. 이제 돌아가실 시간입니다.”

    뒤에서 리첼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프랭크와 기사들이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표정을 보니 시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는 그녀를 찾으러 왔다가 신전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들은 후 기분이 풀릴 때까지 기다린 모양이다.

    리첼은 말없이 일어나 기사를 따라 마차를 타러 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신전에서 걸어 나와 비틀거리는 남자가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이상하네. 신도들의 출입이 금지된 시간인데?

    너무나 수상했기에 남자에게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어라?

    보면 볼수록 더 이상했다. 망토를 쓰고 있어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남자는 입에서 핏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윽.”

    “제가 가서 도와드려도 될까요?”

    보다 못한 프랭크가 리첼에게 물었고, 고개를 끄덕이자 그와 기사 한 명이 남자를 도와주러 갔다.

    두 사람은 남자를 부축한 채 그들이 타고 갈 마차 안으로 데려왔다.

    숨을 헐떡이는 것을 보니 부상이 심각해 보였다.

    “괜찮으세요?”

    리첼이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정신이 혼미한 상태인 것 같았다.

    일단 상처 부위가 어디인지 확인하려고 얼굴을 가리고 있던 남자의 망토를 뒤로 내렸다.

    망토가 내려가자 땀에 흠뻑 젖은 흑발이 드러나며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고, 리첼은 남자의 얼굴을 보곤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는 카일 사제였다.

    ‘무슨 사정이라도 있는 걸까?’

    리첼은 일단 비밀리에 카일을 레녹스가로 데려왔다.

    “어머나 세상에. 아가씨 꼴이 왜 그래요? 설마 아가씨 피는 아니죠? 이 사람은 누구고?”

    비아의 비명에 리첼은 그제야 자신의 행색을 살펴보았다.

    성녀와 싸우느라 머리는 엉망이었고, 카일을 안았기에 드레스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내 피 아냐. 내 피였으면 기사들이 난리가 나지 않았겠니?”

    “그렇죠. 그런데 이분은 대체…?”

    망토로 얼굴을 가렸기에 비아는 카일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비밀로 해줘. 일단 내 방으로 데려가려고.”

    어떤 상황인지 모르기에 시종과 기사들, 비아에게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아가씨께서는 어디서 주무시려고 그러세요?”

    “밤새 무슨 일이 있으면 어떡해? 내가 옆에서 돌보려고 그래. 소파 있잖아.”

    밤새 간호가 필요했기에 명을 받은 프랭크는 리첼의 침대 위에 카일을 눕혔다.

    “소파는 불편할 텐데요?”

    “어차피 소파가 커서 나 혼자 자기엔 불편하지 않을 거야.”

    리첼은 방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금부터 내 방에 비아 너 말고 다른 하녀들은 들어오지 못하게 해. 아, 그리고 주치의도 불러줘.”

    “네. 그러죠.”

    비아가 몇 가지 물어보고 싶다는 눈빛을 내비쳤으나 리첼이 아무 말 없자 그녀는 마지못해 대답하며 방을 나갔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불만스러워 보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침대 위에 누워있는 카일의 모습을 보자 리첼의 마음은 불안해져만 갔다. 혹시라도 큰 부상이라서 깨어나지 못할까 봐 그녀는 주치의가 올 때까지 발을 동동거렸다.

    잠시 후 주치의가 허겁지겁 달려왔고, 카일을 진찰하기 시작했다.

    “어디를 다쳤기에 이렇게 피를 많이 흘렸나요?”

    “몸에 상처가 없는 걸 보니 외상이 아니라 내상을 입은 것 같습니다. 독을 드신 것 같습니다.”

    “독이라고요?”

    “네. 이대로 두었다간 목숨이 위태로울 것 같습니다.”

    “낫게 할 방법은 있나요?”

    “해독제를 만들어 올려보내겠습니다. 약 먹고 나면 괜찮아지실 겁니다.”

    약 먹으면 나을 수 있다는 주치의의 말을 듣고 나서야 리첼은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진료를 마친 후 그녀는 모두를 내보냈다. 모두가 나간 것을 확인하자마자 카일이 쓰고 있던 망토를 벗겼다.

    그러자 여전히 땀에 젖은 흑발과 함께 곱상한 외모가 드러났다.

    “으윽….”

    그는 고통스러운 듯 옅은 신음소리를 냈고, 눈썹 사이에 주름이 잡혀있었으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흐르는 땀을 손수건으로 천천히 닦아 주며 검지로 이마 주름을 어루만졌지만 펴지진 않았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자 리첼은 잽싸게 망토로 다시 얼굴을 가렸다.

    곧이어 비아가 약을 들고 방에 들어왔다.

    “해독제 가져왔어요. 마시고 나면 좋아지실 거라고 하네요. 그런데 대체 누구길래 자꾸 얼굴을 가려요?”

    알리고 싶지 않은 사람이니 가렸건만 눈치 없는 비아가 자꾸만 물었다. 리첼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에 알려줄게. 오늘은 일단 모른 척해줘.”

    “네….”

    비아는 아쉬운 듯 입을 삐죽 내밀곤 쟁반을 들고 방 밖으로 나갔다.

    문이 완전히 닫힌 후에야 리첼은 다시 망토를 벗겼다.

    그 순간 갑자기 카일이 기침을 하기 시작했고, 입에선 피가 흘러나왔다.

    리첼은 그가 흘린 피와 턱으로 흘러내린 핏자국을 천천히 닦아주었다.

    “안 되겠어. 얼른 약을 먹여야겠어.”

    남자의 머리를 들어 자신의 무릎에 받친 후 그의 턱을 잡아 입을 살짝 벌려 입안에 액체로 된 약을 넣으려 했다. 하지만 넣어준 약을 삼키지 못하는지 약이 자꾸 옆으로 줄줄 샜다.

    흘러내린 약을 수건으로 찬찬히 닦은 후 다시 약을 먹이려 했지만 그는 그조차도 넘기지 못했다.

    “이를 어쩌지? 얼른 먹여야 할 텐데.”

    약을 먹일 수 없자 리첼은 잠시 고민을 했다.

    방법이 하나 있긴 했다. 입에서 입으로….

    상상만으로도 얼굴이 달궈질 것 같지만 지금은 부끄러워할 때가 아니었다.

    ‘아마도 그에겐 첫 키스겠지? 아니야. 이건 키스가 아니라 약을 먹이는 것뿐이야.’

    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리첼은 결심이 서자, 자신의 입안에 약을 넣은 후 잠시 눈을 감았다.

    ‘이건 제 뜻이 아닙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한 길일뿐입니다. 잠시 신의 사자가 되려는 자를 꼬시려고 생각한 적도 있으나 지금은 아니에요. 불순한 의도 따윈 없습니다. 그러니 부디 제게 아무런 죄를 묻지 마세요. 제발요!’

    정적이 흐르는 방 안에서 마음속 기도를 마친 후 카일의 입을 잡고 살짝 벌렸다.

    ‘본의 아니게 입술을 빼앗아서 미안해요. 사제님!’

    그에게 사과하는 동시에 리첼은 자신의 입술을 그의 입술 위에 지그시 포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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