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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나랑 맞춰 볼래요?-22화 (22/110)
  • 04.

    숨이 막힐 듯 갑갑한 마음을 풀고자 리첼은 오랜만에 신전을 찾았다. 솔레아 신의 대답을 원하는 건 아니었지만 기도를 하며 마음을 진정시키고 싶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기도실로 향하던 리첼에게 누군가 인사를 건넸다. 곁눈질로 상대방을 확인하자 인사를 건넨 이는 카일이었다.

    ‘웬일로 먼저 반갑다는 인사를 건네지?’

    낯선 사제의 태도에 어색함을 느낀 리첼은 대답 없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예전엔 그의 얼굴도 겸사겸사 보러 온 적도 있었지만 지금 그 얼굴을 보는 게 마냥 반갑진 않았다.

    “한동안 자주 오시더니 요새 얼굴 보기 힘드십니다.”

    인사로 끝낼 줄 알았는데 카일은 리첼에게 상냥하게 말까지 걸었다.

    ‘무슨 꿍꿍이야?’

    가끔 냉랭한 시선으로 바라볼 땐 언제고…. 상냥한 미소를 띠고 있는 카일 사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요새 바빴어요.”

    그래서 리첼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인사만 하고 기도실로 가려는데 어느새 사제 옆엔 성녀가 다가와 그에게 팔짱을 꼈다.

    리첼은 성녀를 힐끔 바라보았다. 여전히 승리에 찬 눈빛이었다. 오늘만은 그들을 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고개만 까딱거리고 가려는데, 갑자기 카일이 성녀가 잡고 있던 자신의 팔을 확 빼버렸다.

    “!”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놀란 리첼은 그냥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성녀도 당황스러워하긴 마찬가지였다.

    “이젠 이런 행동은 조심하라고 말씀드렸잖습니까?”

    그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성녀는 자신에게 단호한 사제를 불만스럽게 바라보다가 그 시선을 리첼에게로 옮겼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에휴.”

    여기서도 똑같은 피곤함을 느끼기 싫은 리첼은 그들에게 인사를 하며 기도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뒤에서 누군가 성큼성큼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고 이내 그녀의 어깨에 묵직한 감각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니 성녀가 리첼의 어깨를 잡고 있었다.

    “무슨 할 말이라도?”

    리첼은 억지 미소를 지으려 애를 썼지만, 입에선 싸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화하기 싫은데 성녀가 자꾸 그녀를 건드리는 것 같은 불쾌감이 느껴졌다.

    “당신이 그를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금까지 쌓였을 성욕을 당신이 풀어줄 수 있을 것 같냐는 말이에요!”

    이게 대체 무슨….

    리첼은 갑자기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성녀가 다짜고짜 와서 따지는 것도 황당한데, 그녀의 입에서 차마 나올 수 없는 말이 나오다니.

    “….”

    너무 기가 막혀서 말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당신 말고도 여러 영애들이 그의 주변을 껄떡거리는데, 다들 헛수고에요. 그는 내 남자예요. 건드리지 말라고요! 우리는 운명처럼 이어진 사이에요. 아시겠어요?”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다짜고짜 와서 말도 안 되는 말을 들으니 화가 났다.

    ‘뭐지? 난 가만히 있었는데 왜 나한테?’

    도저히 참을 수 없었고, 참다못한 리첼이 소리쳤다.

    “성녀라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죠? 누구보다 순결해야 하는 사람 아닌가요?”

    지금 이 자리에서 성녀와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가 황당했다.

    그녀는 카일을 만날 구실을 만들기 위해 성녀가 된 것을 고백한 셈이었지만 그걸 왜 하필 지금 자신의 앞에서 하는 건지 리첼은 이해할 수 없었다.

    “난 누구보다 그에 대해 잘 알고 있어요. 그는 나 말고는 아무도 감당할 수 없는 남자예요. 그러니 일찌감치 포기하세요!”

    하지만 성녀는 여전히 헛소리를 지껄였고, 그 말이 자꾸만 리첼의 신경을 건드렸다.

    “당신은 감당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

    그러자 성녀는 대답 없이 미소만 지었다. 꺼림칙한 느낌을 주는 여유였다.

    ‘신전에선 내가 모르는 세계가 펼쳐지고 있다는 건가. 그걸 왜 나한테 따지는데?’

    리첼은 화가 나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아무리 멋대로여도 이렇게까지 제멋대로인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이런 모멸감 따윈 참을 이유가 없었다.

    가뜩이나 기분이 우울해서 왔건만. 심란한 마음에 자꾸만 불을 지피는 성녀의 행동을 리첼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결국 제 분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다가가 성녀의 멱살을 잡았다.

    “당신이 뭔데 내가 이렇게 심한 모욕을 주나요? 지난번 혼쭐이 덜 난 모양이군요!”

    적당히 넘어갔어도 되었다. 하지만 이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괜한 분풀이일 수도 있었다. 그래도 뺨이라도 때리고 싶은 거 참고 점잖게 멱살을 잡은 것이었다.

    “한 번만 더 시건방지게 행동하면 멱살로 끝나지 않을 거예요. 내가 레녹스 가문 사람이라고 들먹이긴 싫지만 지난번에 알았을 텐데요? 나를 함부로 건들면 안 된다는 걸 말이에요. 성녀라고 대접해 줄 때 얌전히 대우나 받고 있어요. 기어 올라오지 말고!”

    리첼은 성녀를 향해 으름장을 놓았다.

    그녀에게 그동안 하고 싶었지만 마음속에 꾹꾹 눌러 담았던 말을 밖으로 속사포로 내뱉어 버렸다.

    성녀는 리첼이 돌진할 거란 예상은 하지 못했는지 눈만 동그랗게 뜬 채 바라보았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자마자 노려보기 시작했다.

    이윽고 두 사람 사이에 싸늘한 눈빛 교환은 곧 서로의 머리채를 잡는 싸움으로 번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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