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점점 격렬해지던 키스는 숨이 가빠질 때쯤 끝이 났고, 두 사람의 입술이 떨어졌다.
“이제는 키스 잘하시네요.”
고르지 못한 옅은 숨결을 내뱉으며 펠릭스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훌륭한 선생님에게 배웠거든요.”
그와 두 눈이 마주치자 리첼이 가쁜 숨을 내쉬며 입꼬리를 올렸다.
두 사람의 입술은 또다시 겹쳐졌다.
펠릭스의 혀 놀림에 녹을 듯한 감각을 느끼며 리첼의 정신은 점차 혼미해졌다.
오랫동안 격렬한 키스가 지속되자 다리에 힘이 풀리고 리첼의 몸이 비틀거리며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펠릭스의 팔이 그녀의 등을 감싸며 두 사람의 입술이 떨어졌다.
‘취기 때문에 다리에 힘이 풀렸나 봐.’
리첼이 똑바로 서 있으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난간을 붙잡으며 안으로 들어가려는 찰나에 펠릭스의 손이 그녀의 살결에 닿았다.
부드러운 옷 위로 조심스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나른하게 밀려드는 쾌락의 잔물결이 밀려왔다. 자극할수록 몸이 이상해지는 것을 느꼈다.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감각이었다.
그때였다.
“리첼 아가씨?”
문틈 사이로 리첼을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
그제야 리첼은 정신이 드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얼른 옷매무새를 다듬곤 비아가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아쉬운 마음에 뒤를 돌아보니 펠릭스가 한쪽 눈을 찡긋하며 다음에 또 만나자는 눈짓을 했다.
리첼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대신했다.
―보고 싶었어요.
펠릭스는 달콤한 말을 속삭인다.
그의 말 한마디에 리첼의 기분이 달라졌고, 그의 손길이 닿을수록 그녀의 몸은 달아올랐다.
펠릭스를 떠올리는 시간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그의 부드러운 미소가 생각날 때면 덩달아 리첼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아드리안을 짝사랑할 때 느꼈던 소유욕이나 독점욕까지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가 하는 손짓 하나하나가 그녀의 신경을 자극했다.
‘이런 게 끌린다고 하는 걸까?’
리첼의 마음속에선 아직 펠릭스와 거리감이 느껴지면서도 그녀의 몸은 자꾸 그에게 끌리는 것을 느꼈다.
* * *
“이건 어때?”
“리첼 님과 어울릴 것 같은데요?”
리첼은 비아와 함께 가게에서 나들이할 때 쓸 모자를 고르고 있었다.
평소엔 마담을 저택으로 불렀지만 광장 구경도 할 겸 이번에 새로 산 드레스와 어울릴만한 걸 고르기 위해서 외출했다.
“저기. 잠시만요.”
한참을 신나게 살펴보던 중 갑자기 붉은 드레스를 입은 눈매가 올라간 여인이 리첼에게 말을 걸었다.
“네? 무슨 일이시죠?”
여성의 키가 컸기에 리첼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당신! 며칠 전 펠릭스와 같이 축제 갔다 왔어요?”
“그… 그런데요. 왜?”
[쫘악]
뜬금없는 질문에 당황하던 그 순간 여성의 손이 리첼의 뺨을 때렸다. 갑자기 처음 보는 여인에게 뺨을 맞자 리첼의 고개가 돌아갔고 맞은 곳은 욱신거렸다.
“리첼 님!”
당황한 비아가 얼른 손수건을 꺼내 부어오른 리첼의 뺨에 감싸며 소리쳤다.
“우리 아가씨한테 갑자기 와서 왜 이러시는 건가요?”
“왜 너야? 네가 뭔데? 뭐가 특별한데 그래?”
여인은 비아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지껄였다.
“대체 무슨 말씀하시는 거예요?”
여인의 이상한 헛소리에 비아가 리첼을 대신해서 물었다.
“네가 뭔데 정리하라 마라야?”
하지만 여인은 여전히 비아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제 할말만 했다. 리첼은 지금 자신에게 일어난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뭘 정리하라는 건가요? 게다가 난 당신을 처음 보는데, 오늘 처음 본 사람에게 이렇게 무례하게 행동해도 되나요?”
여인이 비아의 말에 대꾸하지 않자 리첼이 따지듯 그녀에게 직접 말했다.
“펠릭스 님이 왜 갑자기 나를 정리하려 해? 우리가 만난 시간이 얼만데!”
하지만 여인은 대답 대신 갑자기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펠릭스!’
펠릭스의 이름을 듣는 순간 리첼의 몸은 굳어버렸다.
설마 펠릭스 님과 사귀는 여인인가?
그 순간 리첼은 펠릭스, 그는 바람둥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어느 순간 달콤한 말에, 감미로운 유혹에 넘어갔기에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 순간적인 쾌감에 리첼 또한 다른 여인들과 마찬가지로 정신 차리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가 당신에게 뭐라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당신에 대해 전혀 들은 바 없어요. 자신이 누군지 밝히지 않고 이렇게 다짜고짜 무례하게 행동한 건 그냥 넘어가지 않겠어요. 전 리첼이에요. 리첼 레녹스.”
리첼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을 수 없었고, 펠릭스 대신 눈앞에 보이는 여인에게 대신 화풀이하듯 큰소리를 쳤다.
소개를 듣자마자 여인의 얼굴이 갑자기 하얗게 변했다.
“레… 레녹스라면 레녹스 공작가…?”
리첼은 여성을 똑바로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 이런. 내가 지금 무슨 짓을….”
“감정에 솔직한 건 알겠지만 내가 누군지 몰랐다고 함부로 대한 건 용납하지 않겠어요. 게다가 귀족끼리라도 상해죄를 저지른다면 경미한 처분은 아닐 텐데 왜 다짜고짜 날 때린 거죠?”
“무도회장에서 멀리서 당신과 같이 있는 모습을 보곤… 그리고 나와 다신 만나고 싶지 않다는 그의 말에 흥분해서 내가 잠시 정신을 잃었나 봐요.”
방금 전까지 때릴 때의 기세는 어디 갔는지 여인은 리첼과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안절부절못하며 대답했다.
대꾸할 가치가 없기에 리첼은 불쾌한 마음으로 비아와 상점을 나왔다.
여성에게 뺨을 맞은 건 이번이 마지막이었지만 그 뒤로 며칠 동안 리첼을 만나러 온 여성이 둘이 더 있었다.
“공녀님, 그는 한 여성이 독점할 수 있는 분이 아니에요. 그런데 왜 그분께 저를 정리하라고 하신 거죠?”
“전 그런 적 없어요. 왜 제가 했다고 다들 생각하시는 거죠?”
리첼은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 여성들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한 여인만을 위해 정리하고 싶다잖아요. 그런데 요새 자주 같이 있는 사람이 당신이더군요. 얼마 전 무도회장에서 같이 참석한 것도 알고 있어요.”
리첼은 말없이 그들의 결국 하소연을 듣곤 돌려보냈다.
‘이래서 바람둥이는 싫었는데…. 하마터면 깜빡 속을 뻔했어.’
그녀는 또다시 오라버니가 여성 문제에 휘말렸을 때와 비슷한 일을 겪고야 말았다.
펠릭스에게 왠지 모를 배신감이 느껴졌다. 그와 관련 있는 여인들 또한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다른 건 다 참아도 뺨을 맞은 건 참을 수 없었기에 항의 서신을 보냈다.
이후 뺨을 때린 여인과 그의 아버지가 사과하러 직접 레녹스가에 찾아왔으니 그녀를 용서했지만, 이 일로 인해 레녹스 공작도 리첼과 펠릭스 사이의 일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