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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나랑 맞춰 볼래요?-19화 (19/110)
  • 03.

    황실 무도회장

    궁전 앞엔 황궁으로 들어가려는 귀족들의 마차가 줄지어 섰고, 레녹스가의 마차도 궁정에 들어가기 위해 멈춰서 대기했다.

    “황실 무도회는 정말 화려하고 멋있네요.”

    리첼을 따라온 비아가 마차 창문 사이로 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원래는 레이나와 함께 황실에서 초대한 무도회에 참석하지만 오늘은 그녀의 몸이 좋지 않아 대신 비아가 감시자 역으로 따라왔다.

    “따라왔으니 맛있는 거 많이 먹어. 귀한 음식들 많이 있으니까.”

    “네. 제가 눈치껏 빠져드릴게요. 펠릭스 님과 좋은 시간 보내세요.”

    비아의 말을 들은 리첼은 대답 없이 미소만 지었다.

    마차가 황실 현관 앞에서 멈춘 후, 화려한 반짝이 레이스가 달린 옅은 보라색 드레스를 입은 리첼이 마차에서 내렸다. 단정한 남색 연미복을 입은 펠릭스가 미리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손을 내밀자 그 손을 맞잡고 줄지어 늘어선 둥근 기둥 사이로 깔린 붉은 카펫 위로 걸어갔다.

    두 사람은 궁정 하인들의 안내를 받으며 홀로 향했고, 비아가 그 뒤를 따라갔다.

    “우와!”

    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뒤따라오던 비아의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높은 천장에 달린 화려한 샹들리에는 연회장 안을 더욱 화려하게 빛내주었고, 그 안에는 눈이 부실만큼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인들과 연미복 차림의 남성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미리 도착해 있던 레녹스 공작의 인사말과 함께 무도회가 시작되었다.

    궁정 악사들의 연주가 시작되자 그 많은 수의 사람들이 짝을 지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리첼의 첫 춤 상대는 펠릭스였다.

    왈츠 선율에 맞춰 한 손은 펠릭스의 어깨를, 다른 손은 그의 손을 잡은 후, 등을 꼿꼿이 세우고 턱을 치켜세운 채 가볍고 우아한 동작을 유지하며 춤을 추었다.

    “잘 추시는데요?”

    펠릭스가 리첼의 춤사위를 보며 칭찬했다.

    “고마워요. 펠릭스 님도 잘 추시네요.”

    펠릭스의 칭찬을 듣자 뿌듯했다. 아드리안과 춤을 추려고 피나는 연습을 한 결과가 이제야 빛을 보이는 것 같았다.

    첫 번째 춤이 끝나고 다른 남성이 같이 춤출 것을 제안하기 전에 누군가의 손이 리첼의 팔을 붙잡았다.

    붙잡힌 팔을 향해 돌아보니 밀리아가 방긋 웃고 있었다.

    “춤은 잠시 쉬고 잠깐 얘기 좀 하자.”

    “네.”

    밀리아에게 인사를 한 후 리첼은 그녀가 이끄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뭐야? 대체 어떻게 되고 있는 거야? 네 선택은 펠릭스 영식이야?”

    주변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 구석에서 발걸음을 멈춘 밀리아는 궁금하다는 듯 바로 물었다.

    “뭐. 일단은요.”

    “바람둥이는 싫다더니 갑자기 마음이 변하기라도 한 거야?”

    “황녀님 말씀대로 바람둥이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거든요.”

    리첼의 말을 듣자마자 밀리아의 눈이 커졌다.

    “그럼 펠릭스 영식에게 완전히 마음을 뺏긴 거야? 사제는 포기하고?”

    “아직은 아니에요. 지금은 그냥 펠릭스 님을 알아가는 중이에요.”

    말을 하면서도 쑥스러웠다. 리첼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일단 축하해. 뭐가 어찌 되었든 네게 좋은 일인 것 같긴 한데….”

    밀리아는 말을 하면서도 이상하다는 듯 말끝을 흐렸고 표정도 묘했다.

    “왜요?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그건 아닌데, 아드리안에 대한 짝사랑이 너무 길어서 그런가? 네 마음이 움직이는 속도가 너무 늦어. 아니면 그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거야?”

    “둘 다라고 생각해줘요.”

    확신이라…. 확실히 지금 리첼은 펠릭스에게 정열적인 사랑의 감정을 느끼진 않았다.

    그러자 황녀의 손이 그녀의 정수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리첼, 네가 누굴 선택하더라도 행복했으면 좋겠어.”

    “말만 들어도 고마워요.”

    리첼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아. 그러고 보니….”

    문득 밀리아에게 빌려주곤 아직 받지 못한 자신의 물건이 생각났다.

    “제 목걸이를 가져간 지 일주일이 넘었는데 왜 아무런 소식이 없나요?”

    “어?”

    밀리아가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횡설수설했다.

    “조금만 더 빌려줘. 너도 지금 당장 필요한 건 아니잖아. 다음에 돌려줄게. 응? 어머나. 폐하께서 나를 부르네. 나 가봐야겠어.”

    그녀는 대답을 회피하며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궁금한 것만 물어보고 대답하기 어려운 건 괜한 핑계를 대며 쏙 빠지는 밀리아의 모습이 얄밉기도 하고 귀여워서 리첼은 웃음이 났다.

    “뭐가 그리 재밌길래 혼자 웃고 있나요?”

    어느새 펠릭스가 잔을 들고 다가왔다.

    “아. 황녀님과 잠깐 얘기를 나누었어요.”

    펠릭스가 그녀 앞으로 잔을 내밀었다.

    “한잔하실래요?”

    “네.”

    펠릭스는 잔을 받아들인 후 천천히 와인을 음미했다. 리첼은 춤 대신 그와의 대화를 택했고, 대화가 길어질수록 입안에 들어가는 와인의 양이 점점 늘어났다.

    “그렇게 마셔도 괜찮겠어요?”

    펠릭스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묻자 리첼은 그제야 취기가 올라오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괜찮아요.”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이 답답했으나 지금 즐거우니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나가서 바깥바람 좀 쐴래요?”

    “네.”

    취기가 돌며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낀 리첼은 고개를 끄덕였다.

    펠릭스가 그녀의 손을 잡자 손에선 얼굴만큼이나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올 것만 같았다.

    발코니로 나오니 차가운 저녁 공기가 뺨을 스쳤고, 잎들이 서로 부대껴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귀를 맴돌았다.

    리첼은 크게 심호흡을 하며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 했다.

    “!”

    발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뺨에 갑자기 펠릭스의 부드럽고도 따스한 손이 닿았다.

    너무 놀라 그를 바라보자 펠릭스는 수줍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밤공기 때문에 서늘해진 뺨에 따뜻한 열기가 느껴지자 상쾌한 기분을 느낀 리첼은 그의 나머지 손도 들어 자신의 뺨에 갖다 댔다.

    양 볼에서 펠릭스의 열기가 느껴지자 제정신이 돌아올 것도 같았다.

    “아하하.”

    리첼의 입에선 저도 모르게 웃음이 실실 새어 나왔다.

    “뭐가 그리 재미있나요?

    “그냥 다?”

    계속 얕은 웃음을 짓다가 멈췄다. 갑자기 펠릭스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아찔한 유혹을 하는 것만 같은 그의 시선은 몸 구석구석을 침투하는 것만 같았다.

    ‘발코니에 그와 나 둘만 있어서 잠시 착각했나?’

    정신이 몽롱했기에 착각했다고 느낀 리첼은 눈을 비볐다 다시 뜨며 그의 눈을 바라보려고 했다. 그 순간 펠릭스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 위를 바람이 스치듯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어?”

    예상치도 못한 접촉에 놀란 리첼이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펠릭스의 입술이 서서히 다가왔고, 그녀의 입술 위에서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펠릭스의 키스는 서로의 숨결을 음미하듯 부드러우면서도 따스했다. 그가 풍기는 장미 향에 흠뻑 취하며 리첼은 그의 키스에 응답했다.

    달콤한 감촉에 빠져들어 무의식적으로 살짝 입을 벌리자, 벌어지는 사이로 그의 혀가 들어왔다.

    그가 그녀의 입안 곳곳을 탐사할 수 있도록 리첼은 입 안을 침입하는 혀를 받아들였다.

    어느새 문틈 사이로 들리던 시끌벅적한 연회장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리첼은 그녀를 덮치는 감각만을 느꼈고, 귓가엔 타액이 맞닿은 질척거리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어느새 자연스레 펠릭스의 목을 감싸며 그와 더욱 밀착했다. 탄탄한 가슴과 맞닿자 그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고 그녀의 심장은 더욱 가파르게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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