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앗!
생각지도 못한 그의 등장에 놀란 리첼의 머릿속은 새하얘졌다. 마주칠 수도 있다는 막연한 기대만 했을 뿐 실제로 마주칠 거란 생각까진 하지 못해서였다.
“잠깐이라면 좋아요. 그렇죠, 아가씨?”
리첼이 너무 놀라 굳은 사이 비아가 대신 대답하며 그녀의 동의를 구했다.
리첼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펠릭스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우리 그동안 종종 마주쳤던 것 같은데? 저만의 착각이었나요?”
‘어라?’
그의 말에 리첼의 심장은 쿵쿵 뛰기 시작했다. 펠릭스도 그녀와 비슷한 느낌을 받은 것 같았다.
가끔 눈이 마주친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동안 혼자만의 착각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니….
떨리는 심장으로 펠릭스의 얼굴을 응시하자 눈처럼 하얀 피부, 연한 빛깔의 갈색 눈동자, 햇빛에 반짝이는 붉은 머리카락이 한눈에 들어왔다.
가끔 본 얼굴인데도 이상하게도 그는 전보다 더 멋있어 보였다.
“맞아요. 저도 몇 번 본 것 같아요, 그쵸? 아가씨.”
리첼이 대답이 없자 비아가 대신 대답했다. 비아도 그를 종종 봤던 모양이었다.
눈치 없는 그녀는 흥분하며 대답하다가 자신이 끼어들 분위기가 아닌 것 같은 예감이 들었는지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우연이 겹치면 운명이라는데. 그런 말 들어보셨나요?”
그 순간 자신의 생각이 밖으로 나온 것 같은 기분이 들자 리첼은 눈만 동그랗게 뜬 채 고개만 살며시 두 번 끄덕였다.
“아하하하하. 그렇게 놀란 눈으로 저를 바라볼 필요 없어요. 저도 당신에게 말을 거는 데 용기가 필요했거든요.”
‘클럽에서 이 여자 저 여자에게 말을 쉽게 거는 모습을 봤는데?’
리첼은 의아함을 느꼈다.
‘예전에 클럽에서 나를 무시하고 지나쳤다고 생각한 건 내 착각인가?’
분명히 지난번에 그녀를 무시했었기에 같은 사람인지 모르는 건가 싶기도 하고, 갑자기 변한 그의 태도에 당황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그의 달콤한 거짓말이 사실일 것만 같았다.
이미 그와 여러 번 마주쳐 경계심이 풀어진 상태에서 펠릭스의 말은 남자에 대한 면역이 없는 리첼의 가슴을 떨리게 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춤추듯 쿵쾅거리는 심장을 애써 무시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보이려 애썼다.
“그냥 당신과 한번 이야기해보고 싶었습니다. 자주 마주치면 정든다는 이야기도 있지 않나요?”
“그런가요….”
태연한 척하려고 했지만 펠릭스와 대화할수록 미쳐 날뛰고 있는 심장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리첼이 들어본 적 없는 달콤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다음에 저와 또 만나주시겠어요?”
한참을 얘기를 나누던 펠릭스가 떠나기 전 다음 만남을 제안했다. 거침없는 카리스마에 이끌려 리첼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그녀에게 이렇게 직접적으로 호감 표시를 한 건 처음이었기에 심장이 터질 듯 숨이 막혀오는 것만 같았다.
다정한 말, 다정한 목소리. 남자에 대한 면역이 없는 리첼이 견디기엔 치명적이었다.
만족스러운 답을 들었는지 펠릭스는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
“꺄아! 역시 바람둥이들은 작업 멘트가 상당해요. 운명이니 뭐니. 게다가 저 돌직구. 크하. 잘생긴 사람이 저런 말을 하니 멋지긴 하네요.”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비아가 말했다.
숨이 막힐 정도로 뜨거워지던 심장이 언제 그랬냐는 듯 비아의 말을 듣는 순간 순식간에 식어버렸다.
‘그래. 그는 바람둥이였지….’
바람둥이들이 괜히 바람둥이가 아니었다. 리첼은 여성들이 그들에게 알면서도 속아 넘어가는 이유를 알 것만도 같았다.
그 만남을 시작으로 리첼은 종종 펠릭스와 시간을 보냈다.
그가 먼저 시간을 정해 서신을 보내오면 그녀가 수락하는 때에 만나곤 했다.
“당신은 다른 여인들과 뭔가가 달라요. 어딘가 끌린다고 하죠. 당신을 향한 내 마음, 믿어줄래요?”
바람둥이라 소문이 자자한 만큼 펠릭스는 감미로운 말을 속삭였다.
“진심인가요?”
“물론이죠. 지금부터 제게 여인은 당신 한 분이라는 걸 신께 맹세하라고 한다면 전 지금 당장 할 수 있어요.”
‘펠릭스도 오라버니처럼 한곳에 정착할 수 있는 남자인가?’
리첼은 점점 그의 말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음이 떨렸다가도 그의 행실을 생각하면 마음이 갑자기 식기도 했다.
펠릭스가 좋아질 것 같다가도 싫어질 것 같기도 하면서 리첼의 마음은 하루에 수시로 바뀌었다.
하지만 자꾸 오락가락하면서도 펠릭스에게 점점 더 몸이 끌리고 있다는 걸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카일, 펠릭스 두 사람 사이를 오가던 리첼의 저울은 어느새 펠릭스에게 조금 가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와 같이 있으면 저도 모르게 그와 닿고 싶다는 생각까지 종종 하게 되었다.
‘몸의 궁합이 잘 맞는다는 건 사실이었던가.’
물론 닿고 싶다는 마음은 생각으로만 머물렀고, 아쉬운 마음에 혼자 손끝만 까딱거리기는 걸로 끝나곤 했다.
‘혹시 펠릭스도 나와 같은 마음일까?’
점점 펠릭스와 만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그도 리첼의 몸에 끌리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 * *
“같이 축제에 가볼래요? 우리 둘이서만.”
어느 날 펠릭스가 리첼에게 둘이서 축제를 보러 갈 것을 제안했다.
‘둘이서…라니….’
항상 기사와 비아를 데리고 다녔기에 그들 없이 혼자서 어딜 다녀본 적이 없었다.
“아뇨. 그건 힘들 것 같아요.”
유혹에 빠질 뻔했으나, 리첼은 일단 한 걸음 물러났다. 아직은 펠릭스와 단둘이서 무언가를 하기에는 어색했기도 했고 그에 대한 경계도 완전히 허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제가 못 미더우면 리첼 양의 비명이 들릴 정도의 거리에 기사들을 대기시키는 건 어때요?”
거절당하자 고민하던 펠릭스가 다른 제안을 제시했다.
“그… 정도는 괘, 괜찮을 것 같아요.”
살짝 망설였지만 리첼은 그 정도는 받아들여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축제 현장에 도착해 마차에서 내리니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펠릭스가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평소보다 가벼운 복장을 한 그의 모습을 보니 색달라 보였다.
“제가 안내할게요. 따라오세요.”
리첼은 펠릭스를 따라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평소 비아와 오긴 했는데 그녀와 올 때와 펠릭스와 올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비아는 편하기에 그녀와 함께 걸으면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옷이 흐트러져도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하지만 펠릭스와 있을 땐 하나하나가 신경 쓰이다 보니 감각도 평소보다 예민해져 있었다. 조금 더 예쁘게 보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러나 워낙에 많은 사람들 사이를 지나다녀야 하기에 옷매무새를 다듬을 수 없었다. 펠릭스와 손을 잡고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그의 손은 길고 매끄러웠다. 뿌리칠 수도 있었지만 리첼은 그러지 않았다.
부드럽고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고, 그 느낌이 싫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