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도 나랑 맞춰 볼래요?-16화 (16/110)

03.

성녀의 모습도 눈에 보이지 않자 불타오르던 경쟁심도 사그라드는 것만 같았다.

카일과 펠릭스를 사이에 두고, 카일 쪽에 기울였던 저울이 어느새 중간에 멈추어 그곳에서 자잘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역시 그 목걸이를 받지 말았어야 했어.’

목걸이 때문에 괜히 두 남자가 신경 쓰이기 시작한 게 문제였고, 리첼은 잘못한 선택을 한 것 같았다. 카일 사제를 택하지 말았어야 했다.

‘나 혼자만 바보 같은 짓 하는 것 같네.’

루이스 오라버니와 올리비아의 말에 휘둘렸다는 후회가 들었지만, 여전히 마음속엔 호기심이 후회의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라고, 카일의 무관심에 지친 리첼은 그를 만나러 갈 의욕이 나질 않았다.

“오늘은 신전 안 가?”

리첼이 평소와 달리 축 처진 채 방에만 있자, 레이나가 이상한 듯 물었다.

“어. 이젠 안 가려고.”

“포기하는 거야?”

“….”

포기라. 시작한 것도 없는데 포기라고 표현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레이나의 질문에 리첼은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신전을 가지 않자 카일 사제를 만날 일은 없었다. 그동안 그와의 만남은 억지로 밀어붙인 인위적인 만남일 뿐이었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동시에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운명의 상대는 정해진 것일까?’

비밀 클럽에 가지 않아도 리첼은 펠릭스와 우연한 만남이 잦았다.

그는 그녀를 보지 못한 듯 보였지만 리첼은 외출할 때마다 자주 펠릭스를 마주치곤 했다.

마차를 타고 가다가 지나가는 모습을 보거나, 상점에 물건을 사러 가면 멀리서 잠시 보거나, 심지어 무도회장을 가더라도 그의 모습이 보였다.

붉은 머리이기에 눈에 더 튀어서 그럴 수도 있었다.

“대체 왜….”

자주 마주치니 정이라도 들었던 걸까. 리첼의 마음이 미묘하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펠릭스가 다른 여인과 애정 행각을 벌이는 모습을 봤을 땐 그렇게나 거부감이 들더니, 그와 우연히 자주 마주친 이후론 그 거부감이 줄어들었다. 아니, 오히려 반가웠다.

우연이 겹치면 운명이라는데 이렇게 자주 마주치니 그와 난 운명일까?

‘운명.’ 그 단어 하나가 리첼의 마음을 흔들었다.

‘오늘도 마주치려나?’

외출할 때면 어느 순간부터 그녀의 시선은 펠릭스를 찾고 있었다.

그가 눈에 보이는 날은 어쩐지 보물찾기 놀이하던 중 보물을 발견한 기분이었고, 보이지 않는 날은 어쩐지 살짝 실망감이 들었다.

리첼은 펠릭스의 모습을 쫓는 자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를 향한 관심이 점차 높아지면서도 여전히 바람둥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어찌 알아. 바람둥이라도 네 매력에 빠져 너에게만 정착할지?

밀리아가 그녀에게 했던 말을 계속 떠올렸다.

‘밀리아 언니의 말이 맞을까?’

저 말을 들을 땐 그냥 웃고 넘겼으나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오히려 그녀의 말이 사실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루이스 오라버니는 변했다. 한 여인에게 푹 빠져 그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오라버니처럼 펠릭스 님도 변할 확률이 있지 않을까?’

리첼의 마음이 완전히 펠릭스를 향한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싫다’는 감정은 그녀의 마음속에서 희미해지고 있었다. 심지어 그와 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 * *

쇼핑도 할 겸, 기분도 풀 겸 리첼은 비아와 함께 광장에 나왔다.

오늘만은 마음을 비우고 아무런 생각 없는 하루를 보내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오늘도 그녀의 눈에 펠릭스의 모습이 보였다.

“그럼 오늘은 이걸로 하죠.”

그는 상점에서 누군가의 선물을 사고 있었다.

“혹시 애인을 위한 선물입니까?”

상점 직원이 상품을 포장하며 그에게 물었다. 리첼은 그의 대답이 궁금해 귀를 쫑긋 세웠다.

“하하하. 아닙니다.”

펠릭스는 부정했지만 리첼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라곤 하지만 누가 봐도 여성을 위한 브로치였다.

‘누구에게 주려는 걸까?’

애인은 아니라지만 여성용 브로치를 산 이유가 궁금해진 그녀는 몰래 그의 뒤를 따라갔다.

여성을 만나러 갈 거란 예상과 달리 펠릭스는 의외의 장소를 향했다. 신전이었다.

리첼도 신전 앞에 마차를 세운 후 계속 그를 따라가려 했다.

방해할까 봐 비아를 마차 안에 대기시키려 했건만 그녀는 악착같이 뒤따라오려 했기에 어쩔 수 없이 함께 가야만 했다.

“쯧! 사랑하던 여인을 잃고 나서 힘들어하더니 여전히 잊지 못해 찾아오네요.”

“이젠 잊을 때가 되지 않겠어요?”

“잊지 못하니 한 여인에게 정착하지 못한 채로 이 여자 저 여자 가벼이 만나고 다닌다죠? 안타까워요.”

펠릭스를 미행하다 보니 의외의 말들이 귓가에 들려왔다.

그래서 리첼은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귀부인들의 말에 귀를 쫑긋 세웠다.

원래 사랑하는 여인이 따로 있었으나 죽었고, 신전에 죽은 이를 추모하러 자주 온다는 이야기였다.

‘지난번에 내가 이곳에서 그를 목격한 것도 사랑하던 여인을 추모하러 왔을 때였나? 오늘 산 브로치도 설마….’

리첼은 지난번 보았던 진지한 표정의 펠릭스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머! 의외네요. 소문인 줄 알았는데 사실이었네요.”

비아도 귀부인들의 말을 엿들었는지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

“너도 들은 적 있어?”

소문이라는 말을 듣고 놀란 리첼이 그녀에게 물었다.

“사실 저도 언뜻 듣긴 했어요. 바람둥이라고 소문난 메리오너스 가문의 장남이 사실은 순정남이라나 뭐라나. 죽은 여인을 잊기 위해 방황한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사실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아가씨께선 어떻게 알고 따라왔어요? 아가씨도 궁금했어요?”

“…그래.”

태연한 척 하려했지만 오히려 대답이 한 박자 늦게 나와버렸다.

“하긴 궁금하면 뭐든 알아내야 직성이 풀리는 아가씨 입장에서는 이제 마음이 한결 편해지셨겠어요.”

갑자기 남자를 쫓아왔으니 이상하다고 여길 비아에게 뭐라고 핑계를 댈까 고민했지만, 그 고민이 저절로 사라지자 리첼은 일단은 한숨 돌렸다.

‘바람둥이인 척하는 순정남이였다니….’

의심이 풀어지니 경계심이 풀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이젠 망설임 따윈 사라졌고 펠릭스와 직접 대화해 보고 싶다는 마음의 확신이 생겼다. 이대로 마주치는 것만으론 만족하기 싫어졌다.

* * *

‘어디를 가면 또다시 그를 만날 수 있을까?’

만날 생각이 없을 땐 자주 마주치던 펠릭스도 막상 만나고 싶다고 결심한 순간 리첼의 시야에서 보이지 않았다.

비밀 클럽이라도 가봐야 하나 했지만 요새 그가 그곳에 출몰하지 않는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펠릭스와 우연히 마주치려면 결국 그와 마주쳤던 그동안의 동선을 되짚어봐야 했다. 그중 한 곳에선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민하던 리첼은 자주 마주쳤던 상점 옆 카페에 앉아 그를 기다리기로 했다.

“여기 정말 유명해서 와보고 싶었어요.”

다행히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비아는 신난 듯 메뉴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종종 그녀와 카페를 들렸기에 펠릭스를 찾는 리첼의 시선을 느끼지 못한 듯 보였다.

“먹고 싶은 거 다 시켜.”

“신난다. 좋아요. 이렇게 같이 디저트 먹으러 올 때가 전 제일 신나요. 이히히.”

열심히 이것저것 고르는 비아를 흐뭇한 미소로 보는 사이 누군가 그들의 테이블에 자연스레 다가왔다. 그 순간 살짝 붉은 빛이 감돌았다.

미소를 짓던 리첼과 비아는 웃음을 멈춘 후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갑자기 앞에 서 있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 앉아도 될까요?”

그들 앞에 서 있는 남자는 펠릭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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