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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나랑 맞춰 볼래요?-12화 (12/110)
  • 02.

    남자 사제들만 존재하는 신전에 예외로 머물 수 있는 여인은 성녀뿐이었기에 옷차림만 보아도 성녀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어머?”

    그제야 레녹스가 사람들을 발견했는지 성녀는 놀란 채 눈만 끔뻑거렸다.

    “레녹스 공작님과 영애님들이십니다. 먼저 인사하십시오.”

    “몰라뵈어서 죄송해요.”

    당황스러운 듯 성녀는 고개만 잠시 꾸벅거렸다.

    “아직 오신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교육이 부족합니다. 이분은 새로 오신 성녀, 힐다 님이십니다.”

    그녀의 태도가 못마땅한 듯 카일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대신 사과했다.

    얼마 전 새로운 성녀가 신전에 들어왔다고 듣긴 했었다.

    예전엔 성녀라는 존재가 큰 의미가 있을지 몰라도 지금은 상징만 남았기에 성녀는 성력을 지닌 평민 여성 중에 선출되었다.

    별 이득도 없고 조건이 까다롭기도 해서 귀족 여성들의 대부분이 성녀가 되는 걸 꺼려했기 때문이었다.

    성녀의 조건은 세 가지였다. 성력을 지녀야만 했고, 처녀여야 했으며, 젊은 여성이어야 했다. 이 중 하나라도 어긋날 경우 성녀의 자격은 박탈당했다.

    대신 성녀가 된다면 이후의 풍족한 삶은 보장되었기에 많은 평민 여성들이 지원을 했고 그중에 성력이 가장 뛰어난 사람이 뽑혔다.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한 상징이었기에 성녀는 가끔 악한 기운을 정화하는 일을 했고, 그 외엔 거의 기도를 하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다만 가끔 치유력을 가진 자는 치료도 하기도 했다.

    그러다 중년의 나이가 되면 다음 사람에게 성녀 직을 물려주고 풍족한 노후 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물러난 후엔 결혼도 가능했다.

    ‘아직 배워야 할 게 많아 보이는 성녀네.’

    성력은 높을지 몰라도 아직 예의가 부족한 성녀의 모습을 보며 리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순간이었다.

    카일에게서 느꼈던 눈빛이 성녀에게도 느껴졌다. 아니, 조금은 달랐다. 그녀의 시선은 노골적인 적대감이었다.

    순간 자신의 생각을 들켰나 뜨끔했으나 아니었다. 눈빛 속엔 우월감과 소유욕이 담겨있었다.

    성녀는 일부러 보란 듯이 카일 사제의 팔짱을 꼈다. 마치 자신의 남자라고 과시하는 것만 같았다.

    내 남자니 건들지 말라는 건가. 누구 마음대로!

    순진한 얼굴로 배시시 웃고 있는 성녀와 눈이 마주치자 리첼은 입가에 비소를 머금었다.

    ‘아무리 네 것이라고 우기고 싶어도 넌 절대 그 남자를 만족시킬 수 없어.’

    카일과 같이 잘 일은 없을 것 같지만 몸으로 그를 만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어서 그런지 리첼은 괜스레 승리자로서 우월감을 느꼈다.

    그리고 성녀의 눈빛 속에 경계심이 늘어날수록 그 자신감은 점점 더 커졌다.

    “저분 표정이 너무 무서워요.”

    그 순간 성녀가 검지로 리첼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리첼은 자신이 사악한 미소를 짓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작과 사제의 시선이 자신에게 몰리자, 리첼은 언제 그런 표정을 지었냐는 듯 최대한 순수한 미소를 지었다.

    “성녀님께선 예절을 몸에 좀 더 익혀야겠네요. 면전에 대고 삿대질을… 하시다뇨. 하하.”

    이를 꽉 물고 미소를 유지했다. ‘아차’ 싶었는지 성녀는 얼른 손가락을 내렸다.

    “정말 죄송합니다.”

    카일 사제가 또다시 성녀를 대신해서 사과했다.

    “어쩜 나보다 예의가 없을 수가 있어? 언니에게 삿대질이라니!”

    사제와 성녀의 모습이 사라진 후 리리스가 불만이라는 듯 투덜거렸다.

    “성녀님 이상한 것 같아. 누가 보면 자기 남자 뺏긴 얼굴이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성녀님은 그래선 안 되지!”

    레이나도 흥분하며 소리쳤다. 리첼이 느꼈던 감정을 레이나도 똑같이 느낀 모양이다.

    “언니도 저 영애들과의 전쟁에 참여할 셈이야?”

    씩씩거리던 레이나의 시선이 리첼을 향했고, 손가락은 옹기종기 모여있는 영애들을 향했다.

    “내가 왜?”

    예상치도 못한 질문에 놀랐지만 리첼은 티를 내지 않으려 격하게 부정했다.

    “아닌 척하긴. 보아하니 황녀님 통해서 사제님과 별도로 만남을 가진 것 같은데 뭘.”

    그러자 레이나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

    “아냐.”

    “저런 불여우 같은 사람한테 사제님을 뺏기기 전에 언니가 먼저 뺏어봐!”

    성녀의 행동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리첼이 계속 부정했으나 레이나가 자꾸만 카일 사제를 꼬시라고 부추겼다.

    성녀는 모를 것이다. 그녀의 행동이 리첼을 포함한 다른 영애들의 마음에 불을 지피는 행위라는 걸 말이다.

    “그럴까?”

    “어! 내가 도울 수 있으면 도와줄게.”

    레이나의 응원에 힘입어 리첼은 카일을 포기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다음날부터 리첼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수시로 신전에 들락날락했다. 무도회에서 자신이 비웃었던 여인들 중 하나가 되는 동시에 누가 먼저 사제 옷을 벗겨 만드느냐 그 눈치 싸움에 리첼이 참여하게 된 것이다.

    물론 그녀가 이렇게 행동할 수 있는 것도 다 그 목걸이 덕이긴 했다.

    목걸이 색이 변했기에 자신감이 생기기도 했고, 일단 다른 여인들보단 유리하다는 것을 알기에 용기를 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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