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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나랑 맞춰 볼래요?-8화 (8/110)
  • 02.

    찰나의 순간에 보였던 놀란 눈빛과는 다른 무덤덤한 목소리였다.

    ‘색이 변하다니?’

    리첼은 깜짝 놀라 고개를 숙여 자신의 가슴 쪽을 바라보았다.

    목걸이는 짙은 붉은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상황에 그녀는 얼른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에 다른 사제들도 있었지만, 목걸이 색이 변할 정도의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다.

    ‘이럴 수가 있나? 색이 변하는 남자가 또 있다고?’

    분명 평생 한 명 나타날까 말까라고 들었기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다치신 곳 없어 보이니 전 그럼 이만.”

    리첼이 계속 멍하니 있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사제는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인사를 하곤 그대로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내가 지금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걸까?’

    뒤를 돌아 멀어지는 사제의 뒷모습을 보며 리첼은 목걸이를 손으로 감쌌다. 따스한 열기가 느껴졌다.

    열이 느껴졌다는 건 분명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이 꿈이나 환상은 아니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대체 뭐지?”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실연의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목걸이 색이 변하는 남자가 둘이나 나타나다니.

    ‘말도 안 돼!’

    누군가 자신을 놀리는 것만 같았다.

    리첼은 일단 원래 목적대로 신전으로 들어가 기도를 하며 흥분한 마음을 진정시키고자 했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스스로를 어르고 달래며 복잡한 머릿속을 모두 비워내고자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앗! 사제라고?

    기도를 드리던 중 문득 뭔가 이상하다는 걸 떠올렸기 때문이다. 색이 변한 상대는 아직 견습이라곤 하지만 사제라는 사실을 말이다.

    기도를 멈춘 후 황급히 눈을 떴다.

    바람둥이 남자가 싫어서 달려왔건만, 신에게 그의 순결을 바치려는 남자, 그가 바로 그녀의 상대라고?

    “아하하.”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리첼은 피식 실소를 흘렸다. 그리곤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다른 신도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첫사랑을 잊기 위해 새로운 사랑을 찾고 싶었다. 그래서 이왕이면 궁합도 맞는 남자를 찾고자 했는데 결과가 이게 뭐람.

    계속 웃음을 흘리며 리첼은 신전을 나왔다. 이 이상 이곳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저택에 돌아온 후 정원에 있는 흔들의자에 앉아 몸을 흔들거리며 리첼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 명은 바람둥이. 한 명은 성직자가 될 견습 사제라….”

    평생 한 명 만날까 말까 한 존재를 두 명이나 마주치면 ‘운이 좋다’라고 표현해야 하건만, 리첼의 기분은 우울해졌다.

    신에게 모든 걸 바친 성직자를 꿈꾸는 자와 자신의 몸을 마구잡이로 사용하는 자라니. 궁합이 맞으면 뭐하나. 실속이 없는데.

    “그래. 두 사람 다 포기하자.”

    리첼은 차라리 애써 올라오는 자신의 호기심을 마음속으로 꾹꾹 눌러버리는 것을 택하기로 했다.

    “그래. 그러면 돼.”

    그녀는 사랑, 성에 관한 모든 걸 내려놓기로 마음먹었다.

    이제 필요 없어졌으니 목걸이를 아버지에게 돌려주기 위해 리첼은 서재를 향해 걸어갔다.

    “다음에 레이나가 철이 들면 그때 주라고 하지 뭐.”

    서재로 걸어가는데 그녀와 같은 분홍 머리에, 같은 보랏빛 눈동자를 가진 남자가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남자는 리첼의 오라버니 루이스였다.

    오라비의 얼굴을 보자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지금 그녀에게 일어난 일 모두 그의 바람기 때문에 생긴 것만 같았다.

    루이스가 한 여자만을 사랑했다면 아버지가 목걸이를 구해오지 않았을 거고, 그렇다면 지금 같은 우울함이 없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리첼은 저도 모르게 루이스를 힐끔 노려보았다.

    “고민이 있어 보이는구나. 그 목걸이 때문이지?”

    하지만 그녀의 눈빛을 미처 알지 못하는 듯 그가 갑자기 말을 걸었고, 시선은 목걸이를 들고 있는 그녀의 손을 향하고 있었다.

    “그걸 어떻게…?”

    리첼은 고깝게 보던 시선을 거두고 놀라운 표정으로 루이스를 바라보았다.

    오라버니는 목걸이를 받아도 고민 따윈 없었을 것 같았는데 의외였다.

    “나도 그 목걸이를 받고 마음이 심란했지. 아버지가 일부러 나를 괴롭히는 줄 알았거든.”

    말을 하는 동안 눈빛엔 쓸쓸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도 리첼 만큼 혼란스러웠던 모양이다.

    “먼저 경험한 자로서 어떤가요?”

    “후회하진 않을 거야. 비로소 내 짝, 내 반쪽을 찾은 느낌?”

    루이스의 쓸쓸했던 눈빛은 어느새 뜨겁고 격렬한 눈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약혼녀 비비안 영애의 생각만으로도 눈빛이 저리 변하다니….

    달라진 눈빛을 보자 겨우 눌렀던 호기심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몸정이 그렇게나 부부생활에 큰 부분을 차지하나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난 그래. 내 삶의 활력소라고나 할까나?”

    루이스가 피식 웃었다.

    “진짜 다른 여인들과는 느낌이 다른가요?”

    리첼의 질문에 그는 재밌다는 듯 제 여동생을 바라보았다.

    “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네가 직접 경험해 봐. 궁금하면 여러 남자를 만나보며 비교해보면 알 거야.”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분명 놀리는 말은 아니었다.

    오라버니의 말이 사실일까. 몸정이 정말 중요할까.

    루이스의 확신에 찬 태도에 리첼의 마음은 다시 흔들렸다.

    마음속에선 이미 호기심이란 단어를 버렸건만….

    하지만 오라버니와 대화하면 할수록 안에서 짓눌렀던 호기심이 다시 번뜩이기 시작했다. 목걸이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을 들어갔다.

    서재로 향하던 발걸음은 멈춘 후 리첼은 다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 * *

    ‘두 사람 중 내 짝이 있을까. 아냐 둘 다 인연이 아닌 것 같으니 포기하자. 하지만 부부생활에서 중요하다고는 하잖아.’

    루이스와 대화 후 리첼은 계속 고민했다. 두 사람 다 무시하려고 하다가도 자꾸만 오라버니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어쩌지.

    오락가락하는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속 안이 꽉 막힌 기분이었다. 누군가와 상담하지 않으면 이 답답한 마음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리첼은 어릴 적 그녀를 돌봐주고 많은 것을 알려준 유모, 올리비아를 찾았다.

    이제는 8살인 동생 리리스를 돌보느라 얘기를 나눌 기회가 많진 않았지만 그녀 말고는 물어볼 적당한 사람이 없었다.

    [똑똑]

    “들어와.”

    “아가씨. 오랜만에 저를 부르셨네요.”

    문이 열리자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중년 여성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마의 주름이 그녀의 지난 세월을 알려주었고, 단정하게 올린 검은 머리는 깐깐하고 깔끔한 그녀의 성격을 보여주었다.

    “솔직하게 상담할 사람이 올리비아 당신밖에 없어서…. 와서 앉아.”

    리첼은 맞은편 소파에 앉을 것을 권했다. 그러자 올리비아는 조심스럽게 걸어와 리첼의 앞에 앉았다.

    “천천히 차 마시면서 이야기해요.”

    미리 준비해 놓은 차를 권하자 올리비아는 천천히 찻잔을 들고 향을 음미하며 물었다.

    “어떤 일 때문에 저를 부르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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