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도 나랑 맞춰 볼래요?-4화 (4/110)
  • 01.

    “오늘 참석했던 사람들 명단 좀 가져오라고 해.”

    모든 손님들이 돌아간 후 리첼은 비아를 불러 집사에게 참석자의 명단을 받아오라고 지시했다.

    “지금이요? 잠자리에 드실 시간인데요?”

    숙취를 해소하기 위한 꿀물을 내려놓은 비아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괜찮아. 아까 잠깐 잤더니 잠이 안 와서 그래.”

    그러자 몇 분 후에 집사가 직접 글씨가 빽빽이 적힌 종이 더미를 가져와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아가씨 생일 연회라 평소보다 특별히 많은 분들을 초대했습니다. 천천히 읽어보십시오.”

    제 할 일을 마친 집사는 그대로 방을 나갔다.

    가져온 명단을 보니 꽤 많은 사람이 그녀를 축하하기 위해 모인 듯했다. 족히 오백 명은 넘을 것이다.

    “아차. 평소보다 많이 초대했다는 사실을 깜빡했네.”

    리첼은 놀란 눈으로 일단 참석한 사람들의 명단을 살펴보려 했건만 그 많은 수의 남자들을 모두 확인하긴 어려웠다.

    ‘확인한다고 달라지나?’

    몇몇 이름만 확인하다가 포기한 채 그대로 대자로 침대에 누웠다. 다시 연회를 열어서 일일이 확인하지 않는 이상 누군지 찾기 힘들 것 같았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궁금증은 의외의 곳에서 해결되었다.

    일탈을 원하는, 친구 엘시아와 함께 하룻밤 편히 즐길 수 있는 곳을 찾아보다 리첼은 우연히 야밤의 연회라 불리는 비밀 클럽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다.

    아무나 함부로 갈 수 없는 곳이지만 레녹스 공작가의 영애였기에 그녀는 초대장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비밀 클럽에 참석했지만 썩 내키는 자리가 아니었기에 리첼은 구석에서 단 음식으로 쓰린 속을 달래야 했다.

    비밀리에 좋아하는 남자와 친한 친구를 제 손으로 연결해 줘야 했다. 생각할수록 속이 쓰린 건 어쩔 수 없었기에 케이크를 찍는 포크를 잡은 손에는 평소보다 힘이 많이 들어갔다.

    그 와중에 많은 사람들이 리첼의 앞을 오고 갔다. 말을 거는 남자도 있었지만 무시한 채 그녀는 계속 먹기만 했다.

    그러다 목 근처에 뜨뜻한 열기가 느껴지는 것을 느꼈다. 질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 오는 곳이기에 목걸이 색이 변할 남자가 존재할 거란 기대조차 없었지만 그저 갑갑한 마음에 리첼은 드레스 속에 숨겨 놓은 목걸이를 꺼내 보았다.

    “!”

    그러자 목걸이는 붉은색으로 변해 있었다.

    “뭐지?”

    예상치도 못한 일이 발생하자 리첼의 눈이 번쩍 뜨였다.

    목걸이 색이 변했다는 건 이 많은 사람 중에 그녀와 궁합이 잘 맞는 남자가 있다는 걸 의미했다.

    그 상대방이 누군지 궁금했기에 리첼은 다시 투명해진 목걸이를 넣지 않고 색이 변하는 남자를 찾으러 다녔다.

    “아름다운 여인이시여. 저와 춤 한 곡 어떠신가요?”

    막상 찾으려 하니 찾기 어려웠다. 대신 붉은 머리를 휘날리며 단정하지 않은 차림의 남자가 다가왔다. 술에 취했는지 남자는 약간 술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풀어헤친 셔츠 사이로 단단한 근육이 언뜻언뜻 보였고 가면 속엔 나른하고 몽롱한 옅은 갈색 눈동자가 그녀를 직시하고 있었다.

    보자마자 불쾌함이 확 밀려왔다. 취객은 상대할 생각이 없기에 리첼은 남자에게 손을 까닥거리며 거절의 의사표시를 보였다.

    저 남자는 절대 아니겠지.

    애써 남자를 외면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투명한 색으로 돌아왔던 목걸이가 다시 붉은 빛을 띠기 시작했다.

    “오오. 당신 외모만큼이나 아름다운 목걸이로군요. 색까지 변하다니 신기한데요? 아하하.”

    남자도 색이 변하는 걸 봤는지 리첼에게 수작을 걸었다. 누가 봐도 이 여자 저 여자 추근대는 바람둥이였다.

    색이 변해도 하필이면 오라버니 같은 사람과 결이 비슷한 남자라니!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믿을 수가 없어서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얼른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그때, 때마침 친구 엘시아가 잔을 깨트렸다. 그 핑계를 대며 리첼은 엘시아의 손을 잡고 비밀 클럽에서 벗어났다.

    * * *

    “붉은 머리를 가진 귀족이 얼마나 있지?”

    “많진 않습니다.”

    “혹시 그중에 여자관계로 소문이 좋지 않은 남자가 있나 알아봤으면 좋겠는데.”

    “알아 오겠습니다.”

    저택에 돌아온 후 리첼은 집사에게 붉은 머리의 남자에 대한 알아오라며 조사를 시켰다. 바로 다음 날 집사는 조사한 내용을 내밀었다.

    “말씀하신 분 중에 해당하는 사람은 한 분이었습니다.”

    “수고했어.”

    ‘진짜 바람둥이가 맞았던 걸까?’

    리첼은 그의 얼굴이 그려진 그림을 확인했다.

    가면을 벗고 있었지만 그의 모습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어제 마주쳤던 갈색 눈동자가 같은 사람이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펠릭스 메리오너스.

    “메리오너스 자작가의 영식이라. 메리오너스 자작가? 어디서 들어봤는데?”

    리첼은 흔들리는 의자에 앉아 손끝을 까딱거렸다. 의자는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어디서 들어봤는지 생각이 나질 않자, 리첼은 그 남자의 신상을 다시 살펴보았다.

    ‘혹시 어제 초대받은 사람 중 한 명인가?’

    그녀는 참석객 명단을 다시 확인해 보았다.

    “이게 무슨!”

    초대한 명단에 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역시나 그때 그녀의 목걸이의 색을 변화시킨 남자는 저 메리오너스 가문의 영식이 맞는 것 같았다.

    ‘그 잠깐 사이 휴식 공간으로 들어왔던 걸까?’

    레녹스 공작이 생일 파티에 많은 남자들을 부른 건 리첼의 결혼 상대 후보를 찾기 위해서였다.

    이왕이면 목걸이가 변하는 남자를 찾길 바라는 공작의 마음이 반영된 것이다.

    펠릭스도 메리오너스 자작가의 장남이라 그 역시 초대받고 생일 파티에 왔던 모양이다.

    ‘몸의 궁합이 뭐가 중요하다고!’

    리첼은 자리에서 일어나 걸고 있는 목걸이를 뺀 후 그대로 벽에 집어 던졌다.

    차라리 깨져서 사용하지 못하면 속이라도 편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어찌나 단단한지 보석은 깨지긴커녕 흠집조차 생기지 않았다.

    “아하하.”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그녀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에서 아버지가 목걸이를 줬건만 그 상대가 짝사랑하던 아드리안이 아닌 바람둥이라고 소문 난 남자라니….

    게다가 바람둥이란 소문은 사실이었다. 두 눈으로 그가 여성들이게 추파를 던지는 것을 목격했으니 말이다.

    “젠장.”

    리첼의 입에서는 험한 소리가 나왔다.

    ‘하필이면 루이스 오라버니 같은 남자라니!’

    오라비 루이스가 여러 여인들과 엮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를 두고 두 여인이 레녹스가로 달려와 머리채를 잡고 싸웠던 걸 본 적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당장 공자님을 불러줘요. 둘 중 누굴 택할지 고르란 말이에요!

    루이스가 양다리 걸치다 걸리자 숨어버렸고, 머리채 잡고 싸운 여성이 아닌 또 다른 여성 두 명이 레녹스가를 찾아와 그를 내놓으라고 난리를 친 적도 있었다.

    잘못은 루이스가 먼저 했으니 리첼은 여인들에게 행패를 부린다고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난 포기 못 해요!

    ―나도 마찬가지예요!

    미래의 공작부인이라는 자리가 탐났는지 아니면 오라비가 매력적이라 그런 건지 양쪽 다 루이스를 포기하려 하지 않았고, 리첼은 그들을 정리하느라 꽤 애를 먹었었다.

    그래서 바람둥이란 정말 끔찍하게 싫었다. 그런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괜찮으십니까?”

    집사가 눈치를 보며 물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그녀의 표정에 놀랐는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아. 별일 아니야.”

    ‘그래. 별일 아니야. 궁합 그런 것이 뭐가 중요하다고.’

    리첼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한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그건 바로 아드리안과 엘시아의 관계였다.

    목걸이가 그들의 궁합이 맞다고 알려줬고, 두 사람이 서로에게 끌리고 있다는 걸 리첼도 느끼고 있었다.

    ‘말도 안 돼. 그냥 우연의 일치겠지.’

    계속 부정하고 싶었지만 달라진 엘시아의 눈빛을 보고 나니 궁합이 뭔지 궁금하기도 했다.

    ‘나도 모르게 몸에서 끌리는 건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