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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나랑 맞춰 볼래요?-1화 (프롤로그) (1/110)
  • 프롤로그

    창 사이로 따사로운 햇살이 기분 좋게 침대 위로 스며들었다.

    따스한 빛을 느끼며 리첼은 힘겹게 눈을 뜨려 했다.

    하지만 눈꺼풀은 평소보다 무겁게 느껴졌고, 뜨거운 숨을 내쉴 때마다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았다.

    ―세상에. 갑자기 고열이라니… 얼른 약 드시고 푹 주무셔요.

    그 순간 비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열이 아직 내리지 않았는지 여전히 오한과 현기증이 느껴졌다. 침을 삼키려 했지만 목을 넘기는 것조차 버거웠다.

    리첼은 다시 눈을 감고 온몸의 힘을 뺐다. 그러자 고요한 방 안에서 그녀의 옅은 숨결 소리만이 들려왔다.

    몽롱한 의식 속에서 다시 잠에 취하려 했건만 그 순간 낯선 인기척이 느껴졌다.

    눈은 감았지만 검은 실루엣이 느껴지는 동시에 낯선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방에 누가 들어왔나?’

    자신을 바라보는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리첼은 눈을 뜰 수 없었다.

    손이라도 움직이려는 찰나에 누군가 그녀의 손을 들어 올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열기로 가득 찬 땀범벅이 된 몸과는 달리 상대방의 손은 제법 차가웠다.

    ‘아. 시원하다.’

    뜨거운 손을 식혀주는 것만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조금 더 그 손길이 닿길 바라던 그때였다. 손끝에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 리첼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움찔거렸으나 상대방은 개의치 않은 것 같았다.

    어느새 그녀의 손은 침대에 조심스레 놓였다.

    그 손길이 멀어져 아쉬워할 틈도 없이 이번엔 목덜미 근처에서 뜨거운 숨결과 감촉이 느껴졌다.

    ‘간지러워.’

    리첼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으며 손을 뻗었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그저 허공을 향해 힘없이 휘저을 뿐이었다.

    ‘꿈이라도 꾼 걸까.’

    그 뒤로 몇 번 손을 까딱거리던 리첼은 또다시 정신을 잃었다.

    또다시 리첼은 천천히 눈을 떴을 땐 꽤 많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눈을 연속해서 깜빡였더니 아까와는 달리 눈꺼풀이 가벼웠다. 괴롭히던 고열과 현기증이 사라진 것 같았다.

    리첼은 자신의 손가락을 살며시 움직였다. 역시나 손놀림이 가벼웠다. 한숨 푹 자고 나니 몸이 나아진 모양이다.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누군가 방에 들어왔다.

    “일어나셨어요? 몸은 괜찮… 에구머니나!”

    갈색 머리를 단정히 말아 올린 여인이 말을 하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리첼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리첼의 전속 하녀 비아였다.

    “왜? 갑자기 무슨 일인데 그래?”

    “모… 목덜미에….”

    비아가 말을 끝까지 하지 못하자 답답하다고 느낀 리첼은 거울을 꺼내 목 주변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

    오른쪽 목덜미 쪽에 붉은 장미 모양의 흔적이 새겨져 있었다.

    “이… 이게 뭐지? 자는 사이에 큰 벌레에게 물렸나? 아니면 누가 때리기라도?”

    목에 난 자국을 문지르며 약을 가져오라고 하자 비아가 큰 소리로 웃었다.

    “아하하하. 아가씨. 그렇게 큰 벌레가 있을 리가요. 순진하셔서 모르시는구나. 그거 키스 마크 같은데요?”

    “뭐? 그럴 리가!”

    비아의 말도 안 되는 소리에 기가 막힌 리첼은 헛웃음을 지었다.

    “제 말이 맞을 것 같은데요?”

    하지만 너무나 확고한 비아의 표정에 웃음을 멈췄다. 문득 자고 있던 사이에 느껴졌던 묘한 감각을 떠올렸다.

    다시 거울을 들어 확인해 보았다. 그러고 보니 잠결에 누군가의 숨결이 목덜미 근처에 닿았던 것 같기도 했다.

    “꿈이 아니었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자는 사이에 누가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

    “누가 내 방에 들어왔어?”

    리첼은 흔적이 남은 자신의 목을 손으로 감싸며 비아에게 물었다.

    “아가씨께서 아프다니깐 많은 분들이 병문안을 왔다 가셨어요. 엘시아 님, 아드리안 님, 레이나 님, 리리스 님, 펠릭스 님. 아 그러고 보니 카일 사제님께서 수업하시러 오긴 했는데, 아가씨 방에 들어왔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설마 나를 혼자 두고 하녀들은 다들 나가 있던 거야? 내 목에 이런 흔적이 남는지 보지도 못하고?”

    실눈으로 바라보자 비아가 그 시선을 피했다.

    “죄송해요. 저는 아가씨 지인분들이 오셨으니 당연히 자리를 비켜드렸죠. 진짜 아무런 기억이 없으세요?”

    누군가 왔었다는 느낌만 들었을 뿐 상대방 얼굴을 직접 보지 못했기에 리첼은 고개만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내 방에 들어온 사람이 누구야?”

    분명 마지막으로 온 사람이 범인일 터였다. 그렇지 않다면 그다음에 방문한 사람이 목에 남은 흔적을 봤을 테니.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비아는 그녀의 방에 마지막으로 들어온 사람이 누군지 모르는 눈치였다.

    ‘대체 누구야?’

    자는 사이 이런 짓을 할 사람이 누굴지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믿을 수 없지만 그래도 누군가 했다고 가정한다면….

    어렴풋이 두 사람이 리첼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요즘 두 명의 남자의 태도가 심상치 않기 때문이었다.

    요새 그녀와 가깝게 지낸 사람은 바람둥이와 사제, 이 두 남자였다.

    둘 중에 이런 짓을 할 사람을 따지자면 바람둥이인 그 남자일 확률이 높았다. 평소 행실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요새 달콤한 말과 함께 리첼의 마음을 흔들고 있지만 그는 말도 없이 이런 짓을 한 적이 없었다.

    아무리 바람둥이라지만 그는 매너가 좋았다.

    그러니 정신을 잃은 사이에 그 남자가 키스 마크를 남긴다는 건 솔직히 믿기질 않았다.

    ‘그럼 대체 누구지?’

    하지만 계속 고민해 보고 고민해 봐도 키스 마크를 남길 만한 남자는 그 둘 말고는 없었다.

    ‘혹시 사제님이?’

    그 사람도 그럴 리 없었다. 성직자인데…. 애써 부인하려고 했지만 요새 그는 리첼에게 묘한 행동을 하긴 했다. 하지만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착각일 수도 있었다.

    ‘설마… 아니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사제님은 이런 행동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두 사람 다 아닐 거라고 부인하면서도 분명히 둘 중 한 명이 범인일 거라고 본능적인 직감이 계속 말하고 있었다.

    ‘내게 왜 이런 일이….’

    사실 리첼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 상상하지 못했다.

    오랜 짝사랑이자, 첫사랑을 마음속에서 떠나보낸 지 오래되지 않았기에 그 짧은 기간 내 두 남자와 얽히게 될 줄 꿈에도 몰랐다.

    이 모든 원인은 그래, 그 목걸이 때문이었다.

    리첼은 자신의 목에 걸려있는 투명한 보석이 박힌 목걸이를 손으로 살며시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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