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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227화 (227/228)
  • 던전 안의 살림꾼 외전 13화

    희나는 설명을 차마 다 읽지 못하고 시선을 내렸다. 낯 뜨거운 설명이 적나라하게 이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슬쩍 눈치를 보니 희나와 함께 끄…… 끈팬티를 만지작거리던 강진현도 아이템의 정체를 알게 된 듯했다.

    둘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입을 꾹 닫았다.

    “…….”

    “…….”

    몇 초, 아니, 몇 분의 시간이 흐른 후. 먼저 입을 연 쪽은 희나였다.

    “미, 민아 언니가 개방적이긴 하죠…….”

    어쩐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더라니!

    우민아가 보낸 ‘결혼 선물’이란 건 바로 속옷이었다! 그것도 아주 야한 속옷!

    요상야리꾸리한 기능까지 붙어 있는 A급 끈팬티 세트!

    희나는 달아오르는 얼굴에 파닥파닥 손부채질을 했다.

    “이런 건 줄 알았으면 진현 씨랑 같이 보자고 하는 게 아니었는데…….”

    웅얼거리자 잠시 말을 잃었던 강진현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혼자 봤으면 어떻게 하시려고!”

    “모, 몰라요! 그건 왜 물어봐요?”

    “궁금하니까요!”

    “민망해서 대답해 주기 싫어요!”

    희나는 후다닥 천 조각을 집어 선물 상자 안에 쑤셔 넣었다. 일단 눈앞에 안 보이니 벌렁거리던 심장이 좀 가라앉는 것 같았다.

    후하후하 천천히 숨을 고르고 있는데, 강진현이 슬쩍 희나의 손등 위에 제 손을 얹었다.

    “……그거, 어떻게 할 겁니까?”

    “어떻게 하긴요? 일단 이건 보류예요.”

    대답에 강진현이 눈알을 굴렸다.

    “하지만…….”

    “하지만?”

    “선물로 받은 것 아닙니까.”

    “그래서요?”

    “다시 돌려주기도 애매하고요.”

    “그건 그렇죠.”

    끈팬티를 다시 포장해서 우민아에게 돌려준다? 이 또한 굉장히 민망한 일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미간을 찌푸리자 강진현이 희나의 이마를 살살 만져 매끈하게 펴 주었다. 다정한 손길에 근심 걱정이 사르르 녹아 사라졌다.

    강진현은 희나의 뺨을 만지작거리다 입을 열었다.

    “제 생각엔…….”

    “진현 씨 생각엔?”

    “성의를 담아 선물해 준 것인데, 쓰지 않는 것도 미안한 일 아닐까요?”

    “예에?”

    희나는 잠깐 귀를 의심했다. 저렇게 온화하기 그지없는 눈빛과 낯빛으로 이런 파렴치한 소리를 한다고?

    “우민아 헌터의 성의잖습니까.”

    그런데…… 촉촉한 눈빛을 정통으로 맞으니, 도저히 ‘안 된다’라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한 번쯤 저런 일탈은 해 봐도 되지 않을까? 우, 우린 결혼할 건데.’

    마침내 이런 생각이 머리를 무럭무럭 지배할 무렵이었다.

    “야! 나 사진 좀 찍어 줘!”

    상념은 우당탕탕, 문을 열고 들어온 너울이 덕분에 뿅 하고 사라졌다.

    희나는 속옷이 든 상자를 뒤로 숨겼다.

    “갑자기 무슨 일인데 노크도 없이 들어와?”

    “아, 노크 깜빡했다.”

    귀여운 척하며 혀를 내미는 모습이 가증스러웠다. 이에 강진현은 차분한 표정으로 저벅저벅 걸어가 너울을 들어 던졌다.

    그래, 던졌다…….

    으아아!

    너울의 비명이 아련하게 멀어졌다. 희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 어어? 너울아?”

    “레전더리급 몬스터 보스입니다. 이 정도 높이에서 굴러떨어져선 안 죽습니다.”

    강진현이 2층 문을 쾅 닫으며 새침하게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희원 형님께서 악마를 분가시키기로 한 건 굉장히 잘 생각하신 일 같군요.”

    사심이 아주 가득했다.

    * * *

    “오늘 시간 내줘서 고마워요, 릴리.”

    “별말씀을요! 요즘은 딱히 하는 일 없이 지내고 있어서 희나가 만나자고 했을 때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라요.”

    릴리가 발랄하게 희나의 팔짱을 꼈다.

    “오늘처럼 중요한 날에 나를 불러 주다니! 감동이에요!”

    “내 주변에서 제일 센스 있는 사람이 바로 릴리거든요.”

    “걱정 마요! 내가 제일 예쁜 드레스 골라 줄 테니까!”

    릴리는 저만 믿으라며 가슴을 탕탕 쳤다. 그러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나저나 진현은 어디 있어요? 예비 신부는 여기 있는데, 예비 신랑은 없네?”

    “아. 진현 씨는 갑자기 일이 생겨서 늦어요.”

    “이젠 던전 브레이크도 없는데요?”

    “상급 헌터끼리 싸움이 붙었다나 봐요. 그거 저지하러 갔어요.”

    “아하. 쌈박질 말리러 갔구나.”

    “한 시간 정도 늦는다고 연락 왔어요. 느긋하게 둘러봐도 될 것 같아요.”

    그러자 릴리의 눈이 반짝, 빛났다.

    “오! 우리 빨리 드레스 골라서 진현을 놀래켜 주는 건 어때요?”

    “놀라게 해 준다고요? 그런데 드레스 디자인은 진현 씨도 확인해 보고 정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황급한 물음에 릴리가 고개를 휘휘 저으며 손가락을 세웠다.

    “결혼식은 신부의 날이라고요! 신부 마음에 들면 됐지, 뭘 더 바라요?”

    강진현의 임무는 한 시간보다 더 길어졌고, 희나와 릴리는 마음껏 드레스를 고를 수 있었다.

    “이게 제일이에요!”

    “나도 이게 제일 마음에 들어요, 릴리.”

    고민에 고민을 거쳐 선택한 드레스는 바로 A라인의 오프 숄더 드레스 한 벌이었다. 비교적 발랄한 디자인이었지만, 드러난 목과 섬세한 레이스 덕분에 우아해 보이기도 했다.

    “진현 씨가 다른 게 더 마음에 든다고 해도 전 이 옷을 입고 식을 올려야겠어요.”

    ……이런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희나 마음에 쏙 들었다.

    그 소리에 릴리는 그럴 줄 알았다며 깔깔 웃었다.

    드레스에 이어 웨딩 슈즈를 고르고 있을 때였다.

    “미안합니다. 많이 늦었지요?”

    강진현은 바람 냄새와 함께 들어왔다. 희나는 신이 나 한쪽 손을 흔들며 그를 불렀다.

    “진현 씨! 저 드레스 골랐어요!”

    이거 보라며 치맛자락을 살짝 잡아 흔들었다. 그러자 강진현의 눈이 커다래졌다.

    “희, 희, 희, 희나 씨?”

    심지어 말을 세 번이나 더듬기까지 했다.

    강진현은 훌쩍 다가와 믿기지 않는다는 듯 희나의 손을 붙잡았다.

    “이건 정말…… 정말로…….”

    그러면서 말을 잇지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였다.

    덕분에 바로 맞은편에서 그의 얼굴을 보게 된 희나는 당황하여 사람들을 물렸다.

    “죄송한데 잠시만 나가 주실 수 있으세요? 잠깐 둘이 상의할 게 있어서요.”

    VVIP 손님의 요청이라 그런지 다들 재빨리 물러났다. 릴리도 희나를 향해 찡긋 윙크하며 자리를 피해 주었다.

    문까지 모두 닫힌 걸 확인한 후, 희나는 손을 들어 강진현을 눈가를 매만졌다. 손끝에 물기가 묻어났다.

    “진현 씨, 왜 울어요? 신나는 날인데.”

    강진현은 푹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갑자기, 실감이 되어서요.”

    “우리가 결혼한다는게요?”

    “예.”

    순순한 대답에 희나는 푸스스 웃었다.

    “우리가 교제한 지 햇수로는 곧 5년이 다 되어 가고, 동거한 지는 그보다 더 오래되었는데도요?”

    “하지만 결혼은 다르지 않습니까.”

    희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식만 올릴 뿐이지 결국 둘이 같은 집에서 같은 일을 하면서 지낼 텐데.’

    메리지 블루라도 겪는 걸까? 결혼을 앞둔 강진현은 유독 감성적이었다.

    하지만 그런 강진현이 싫지는 않았다. 되레 귀엽게만 느껴졌다.

    언제나 든든하고 멋지게만 보였던 이 남자가 결혼 하나에 이렇게 긴장한다니.

    희나는 사랑스러움을 참지 못하고 강진현의 양 뺨을 잡아 끌어 내렸다.

    그대로 쪽, 하고 가볍게 뽀뽀하자 이내 입술이 다시금 맞부딪쳐 왔다.

    눈을 감은 채 강진현의 목에 팔을 걸었다. 그러자 허리를 감싼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얼마나 함께 숨을 나눴을까, 축축한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강진현은 아쉽다는 듯, 몇 번 더 입술을 지분거리다 한숨처럼 입을 열었다.

    “언젠가 희나 씨에게 가족처럼 소중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는 이마를 맞대며 작게 설명했다.

    “진현 씨는 언제나 제게 소중했어요.”

    “희나 씨의 애정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이제 정말 희나 씨와 진짜 가족이 된다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

    ‘진짜 가족’을 발음하는 강진현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떨렸다.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꾸릴 수 있으리라곤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는데, 언제나 삶은 잿빛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제게 이런 기회가 주어지다니요.”

    벅차오르는 감정이 느껴졌다. 그의 심장이 쿵, 쿵, 뛰고 있었다.

    행복은 전염성이 있다고 하던데, 그 말은 사실이었다. 맞닿은 가슴에서부터 기쁨이 피어올랐다.

    ‘이보다 더 행복해질 수는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희나는 고개를 들어 올려 강진현과 눈을 맞췄다. 그의 새카만 눈동자에 비친 제 모습이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

    * * *

    ‘태릉 토끼 던전’은 한때 이색 데이트 코스로 유명했다.

    그리고 대평화의 시대가 찾아온 지금은, ‘태릉 토끼 웨딩 홀’로 다시금 태어나 돈을 쓸어 담고 있었다.

    아름답게 펼쳐진 푸른 들판,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들꽃들, 그리고 사시사철 맑고 화창한 날씨까지!

    아름다운 경관도 경관이었지만,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사시사철 맑고 화창한 날씨’였다.

    이 말인즉슨, 계절과 날씨의 영향을 받지 않고 언제나 푸르른 신록의 신부가 될 수 있다는 의미.

    거기다 던전이라는 특수성까지 더해지니, 태릉 토끼 웨딩 홀의 인기는 그야말로 하늘로 치솟았다.

    그리고 희나 또한 태릉 토끼 웨딩 홀에서 식을 올릴 예정이었다.

    희나는 초원 한켠에 예쁘게 꾸며 둔 신부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희나는 씩씩하게 손님을 맞이했고, 손님들은 모두 새신부의 화사한 모습에 환호하며 제각각 축하 인사를 던지고 갔다.

    하지만 몹시 의연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희나는 엄청나게 긴장해 있었다.

    던전 안의 살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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