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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225화 (225/228)

던전 안의 살림꾼 외전 11화

되려 릴리를 챙기느라 평소보다 대화도 없었다.

고민하는 사이 달팽이가 쇽쇽 기어와서 끼어들었다.

「염ㅎㅂㅕㅇ24ㅅ1 밀차ㄱ관찰ㄹㄹㄹㄹㄹㄹ」

「심력소모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끄흐흫ㅎㅎㅎㅎㅎ」

「소ᅟᅩᆫ님ㅁ수고많을 다多」

정확히 말하면 그냥 달팽이가 아닌 ‘만취한 달팽’이였다.

“오색아, 넌 또 언제 술 마셨어?”

「따ㄹㄹㄹ꾺ㄱㅋㅎㅋㅋㅋㅋㅋzzzzzzzzz」

「LiFe iS SSSSSSOOOOOO BeAUTifuL」

「LOL」

「사랑이~~~~~~~~~~~~~~나를~~~~~떠ㅓㅓㅓᄂᆞᅟᅡᆯ땔 때~~~~~」

아니! 분명히 오색이에게는 금주령을 내렸는데, 대체 누가?

눈을 부릅뜨고 테이블을 살피니 너울이가 샥 고개를 돌렸다.

“너구나! 이너울!”

“아니이……. 그게에…….”

악마는 뻔뻔하게도 귀여운 척하면서 상황을 모면하려고 했다.

희나는 그런 너울에게 오색이를 안겨 주었다.

“오색이 술 깰 때까지 네가 책임져.”

오색이는 너울이의 품 안에서 마음껏 주정 부렸다.

「꾸에ㅔ에ㅔㅔ에에ㅔ에엑ㄲㄲㄲㄲ」

“으악! 이 달팽이 왜 이래!”

「웅;;ㅇ;ㅔㅓ허ㅓㅓㅔㅔ」

“일 저지른 건 너니까, 책임도 네가 져야지. 저기 찬장에 꿀 있으니까 꿀물 타서 먹이든지 해.”

“억울해! 아동 학대야!”

“이럴 때만 아동인 척하지 마.”

희나는 매정하게 너울과 술 취한 달팽이를 저 멀리 보내 버렸다.

“그래서…… 우리가 무슨 얘길 하고 있었더라?”

큼큼, 목을 가다듬으며 주제로 다시 돌아오자 릴리가 키득키득 웃었다.

“달팽이가 맞는 말 했네요.”

“오색이가 무슨 말을 했는데?”

“다정한 둘의 모습이 보기 좋다고요.”

“흠.”

“희나야 원래 다정하지만…… 말 없고 무뚝뚝한 진현이가 희나에겐 그렇게 다정하게 굴 줄이야, 대체 누가 알았겠어요?”

희나네 집 사람들과 청룡 길드 사람들 모두 잘 아는 사실이었다. 사실 너무 잘 알아서 문제였다.

“아까 한이한테도 들었어요. 희나와 진현 커플은 사내에서도 아주 유명하다면서요?”

희나의 귓바퀴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유한이가 그런 얘기도 해 줬어요?”

“네. 둘의 이야기를 잔뜩 해 줬지요.”

정확히 말하면 염병 첨병이 아주 꼴불견이라는 뒷말이었지만, 릴리는 그런 중요하지 않은 정보는 깔끔하게 지워 냈다.

중요한 건 결론이었다.

“사랑 앞에선 천성 따위 아무 상관도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자기의 방식으로 애정을 보여 주면 되니까요.”

하지만 릴리의 남자 친구인 마이크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이러니까 어쩔 수 없어, 저러니까 그럴 수 없어, 변명하며 릴리에게 소홀히 굴었다.

그렇다고 같이 있을 때 애정을 듬뿍 주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되돌아보며 생각하니 언제나 쩔쩔맸던 건 릴리 자신이었지 마이크가 아니었다.

‘그에 비하면 희나 커플은…….’

릴리는 오늘 하루 보았던 장면들을 떠올렸다.

희나와 강진현은 잘 맞는 퍼즐 같았다. 상대를 끊임없이 신경 쓰고, 서로를 배려했다. 심지어 이 과정은 마치 숨 쉬듯 자연스러웠다.

‘그래. 연애는 혼자 하는 게 아니야. 둘이 같이 하는 거지.’

릴리의 한숨에 희나가 조심스럽게 어깨를 도닥였다.

“릴리, 마음이 안 좋아 보여요.”

“파브 말이 맞는다는 걸 인정하려니 속이 뒤틀려서 그래요.”

말로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더 낫다고, 릴리는 오늘 하루 희나와 함께하며 마이크와의 관계에 대한 의문을 가졌다.

예전부터 마음에 걸렸던 부분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그리고 마침내 릴리는 인정했다.

‘마이크는 개새끼야.’

거기다 이렇게 쉽게 마음이 정리되는 걸 보니, 릴리도 마이크를 많이 좋아했던 건 아니었나 보다.

“파브 반대 때문에 괜히 오기 부리느라 아까운 놈한테 시간만 버렸네.”

릴리는 오빠 탓을 하며 투덜거렸다. 우애 좋은 남매다웠다.

“마음 정리는 잘됐나 보네요. 다행이에요.”

파비안에게 좋은 소식을 가져다주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는데, 릴리가 선포했다.

“반년 정도는 한국에 있을까 봐요.”

“예?”

“그놈 있는 미국으로는 한동안 돌아가고 싶지 않네요. 꼴도 보기 싫어서.”

릴리는 그러면서 씨익 웃었다.

“그리고 오늘 청룡 견학하며 떠올랐는데, 나는 예술 하는 남자보단 과학 좋아하는 귀여운 너드를 더 좋아하더라고요.”

릴리의 충격 발언에 희나의 입이 쩍 벌어졌다.

“예에에에?”

죽어라 매달렸던 연애를 한순간 정리한 것도 정리한 것이거니와, 순식간에 새 타깃을 찾아낸 건…… 그야말로 파비안 앳킨스의 동생다웠다.

“희나, 나 내일도 청룡 놀러 가려고요. 휴가는 안 내도 돼요. 내일은 한이가 청룡 보여 주기로 했거든요.”

“어, 언제요?”

“방금 정했어요.”

릴리가 휴대전화 화면을 보여 주었다.

릴리는 희나와 대화하는 사이 남자 친구를 정리하고, 다른 사람과 또 문자하는 엄청난 멀티태스킹 중이었다.

무엇보다 희나를 놀라게 한 건 바로…….

“……대체 유한이랑 번호 교환은 언제 한 거예요?”

“오늘요. 헤어지기 전에 얼굴이 새빨개져서 물어보던데요?”

“그걸 받아 줬어요?”

“안 될 건 없잖아요. 귀엽기도 하고.”

“귀, 귀엽…….”

희나는 ‘귀엽다’는 단어와 ‘유한이’의 유사점을 찾아내려다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말도 안 돼. 릴리랑 유한이라고? 마이크 그 개새ㄲ……보다는 낫지만! 유한이라고?’

싹퉁 바가지 유한이라니! 희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왜 그래요, 희나?”

“갑자기 할 일이 생각나서요!”

“급한 일인가 보네요. 갑자기 식은땀까지 흘리고.”

“맞아요. 급한 일이니까, 잠깐 다녀올게요!”

“다녀와요!”

릴리는 손을 붕붕 흔들었다.

희나가 자신을 배신하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릴리는 모를 것이다.

사흘 후, 도착한 파비안이 청룡 길드에서 유한이의 멱살을 잡아 흔들게 될 것이라고는…….

그리고 희나도, 파비안도 몰랐다.

릴리와 유한이의 연애가 상상 이상으로 길어지게 될 것이라고는…….

외전 4. 던전 안의 새신부

희나가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열었다.

“우리, 식은 언제 올릴까요?”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상대는 전혀 그렇게 반응할 수 없었다.

“예? 시, 식이라뇨?”

“결혼식이요.”

“결……혼식?”

툭. 강진현은 들고 있던 포크를 떨어뜨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무기를 손에서 놓지 않는다는 청룡 길드의 S급 헌터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에구, 진현 씨 손에 힘 풀렸구나.”

희나는 떨어진 포크를 치우고 강진현의 손에 새 포크를 들려 주었다. 포크 끝에는 사과 한 조각이 야무지게 콕 찍혀 있었다.

“같이 산 지도 오래됐고, 슬슬 식 올려도 되지 않을까 해서요.”

벌써 희나가 스물아홉, 강진현이 서른하나였다.

희나가 스물다섯일 때 연애를 시작했으니, 이제 연애도 4년 차다.

스물아홉.

원체 늦은 결혼이 흔하다 보니, 어리게만 느껴지는 나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결혼하기 이른 나이는 아니지.’

만나는 사람과 진지한 미래를 생각해 볼 나이다.

“진현 씨, 결혼 되게 하고 싶어 했잖아요.”

희나는 넋 나간 강진현의 손을 맞잡았다. 왼쪽 약지에 낀 링이 반짝, 빛났다.

예전, 연애 1주년 기념으로 ‘결혼을 전제로 사귀어 달라’며 받은 반지였다.

얼마 전, 이 반지를 보며 생각했더랬다. 이제 슬슬 커플링을 결혼반지로 바꿔 낄 때가 된 게 아닐까? 하고.

“너무 갑작스러웠나요? 당장 하자는 건 아니고, 식 올리는 데 시간이 좀 걸리니까 미리 생각해 보자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둔 것을 차근차근 이야기하고 있는데, 갑자기 시야가 휙 높아졌다.

“꺅!”

강진현이 희나를 번쩍 들어 올린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희나를 들고는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눈앞이 어질어질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그는 희나를 내려 주었다.

“지, 진현 씨, 저 어지러워ㅇ……”

하지만 이번에도 말을 채 끝내지 못했다. 단단한 품이 희나를 푹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아주, 아주, 아주, 좋습니다!”

희나는 웃음 섞인 한숨을 내쉬며 그런 강진현을 마주 안아 주었다. 머리를 기댄 가슴 너머 심장이 쿵, 쿵, 쿵 뛰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강진현이 얼마나 기뻐하고 있는지, 얼마나 설레는지 알 수 있었다.

희나는 강진현의 심장 박동이 잦아들 때까지 그를 안아 주었다. 아주 오래오래.

* * *

강진현은 희나의 제안에 말할 것도 없이 대찬성했다.

당사자들의 마음이 딱 맞아떨어지니, 그 이후의 일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해결됐다.

양가 모두 14년 전 대규모 던전 브레이크 사태 때 부모님을 잃었으므로 상견례 자리는 조촐하게 마련했다.

강목현이 물잔을 내려놓으며 차분히 입을 열었다.

“동거도 곧 5년 찬데, 결혼 이야기는 대체 언제 나오나 했습니다.”

“맞아요. 청룡에서는 이미 둘이 결혼했는데 발표만 안 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면서요?”

“그렇습니다. 저에게까지 와서 둘 결혼식은 대체 올린 거냐며 묻는 헌터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하하, 인사팀장님도 밖에서 고생이 많으셨네요.”

“함께 지내는 이희원 씨만 할까요.”

희원과 강목현은 익숙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일로도 꾸준히 만나는 사이기도 했고, 희나의 초대 덕분에 사적으로도 자주 만나는 사이였다.

물론 강목현에게 희나의 ‘홈 스위트 홈’ 능력과 여타 자잘한 사건들(예를 들어 세상을 구했다거나 하는)을 오픈한 지도 꽤 됐다.

강진현의 가족인데, 이대로 감추고 살 수는 없었다.

“쌍둥이 던전 개간은 잘되어 가고 있습니까?”

강목현은 자연스레 희원의 근황을 물었다. 희원은 신나게 눈을 빛냈다.

“아, 그거 말이죠. 강 팀장님 덕분에 아주 깔끔하게 해결했습니다.”

던전 안의 살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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