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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224화 (224/228)
  • 던전 안의 살림꾼 외전 10화

    희나와 강진현의 눈싸움을 중재한 건 릴리였다.

    “내가 생각해도 사실 같은데요. 희나는 보기 드물게 좋은 사람 맞아요.”

    “릴리까지 나를 놀릴 셈이에요?”

    “생명의 은인한테 이런 칭찬도 못 하는 거예요?”

    희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네. 대한민국에선 불법이에요.”

    이에 릴리는 무엇이 그리 웃긴지, 한참 동안 배를 잡고 웃었다.

    한담을 나누고 있는데, 누군가 사무실을 노크했다.

    “누구세요?”

    “나야.”

    이렇게 싹퉁머리 없는 대꾸를 할 사람은 청룡 길드에 한 사람뿐이었다.

    “……유한이구나. 들어와.”

    “야, 어제 너네 오빠가 준 샘플로 실험해 봤는데……!”

    다짜고짜 실험 결과를 설명하려던 유한이의 눈이 커다래졌다.

    “예쁘다…….”

    입이 헤 벌어진 게, 아주 볼만했다.

    희나는 유한이의 눈앞에 손을 휘휘 저었다. 동공이 풀려서 움직이질 않았다.

    “정신 차려. 릴리가 예쁘긴 한데, 누굴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 건 예의가 아니야.”

    “이름이 릴리……구나. 이름도 꽃이네. 예쁘다.”

    “저기, 내 목소리 들리니?”

    “릴리는 백합……. 백합의 꽃말은 순결과 순수…….”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유한이는 희나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했다.

    “이 사람은 누구예요?”

    호기심을 느낀 릴리가 다가와 묻고서야 유한이는 정신을 차렸다.

    “저, 저는 유한이라고 합니다. 성은 유, 이름은 한이요!”

    “이름이 한이라고요? 하니, 허니, 굉장히 달콤하게 들리는 이름이네요.”

    릴리의 말장난에 유한이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옆에서 푹 찌르면 그대로 터져 나갈 것 같았다.

    그 추태를 보다 못한 희나가 유한이의 옆구리를 쳤다.

    “얘는 우리 길드의 연금술사예요. 성격이 좀 고집불통이긴 하지만, 실력은 꽤 괜찮아요.”

    그러자 릴리의 눈이 반짝였다.

    “연금술사요? 그럼 과학에도 꽤 일가견이 있겠네요?”

    “그, 그럼요! 연금술은 기본적으로 과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니까요!”

    “어렸을 때 꿈이 과학자였거든요. 화학이랑 생물학도 좋아했고요. 혹시 실험실 보러 가도 돼요?”

    희나는 솔직히 유한이가 ‘안 된다’라고 할 줄 알았다.

    그는 성격 파탄자 아니랄까 봐 누가 자기 연구실에 들어와 물건을 만지는 걸 아주 질색했다.

    하지만…….

    “그럼요! 내 실험실은 언제나 오픈되어 있어요! 지금 보러 갈래요?”

    유한이는 릴리에게 단단히 빠진 듯했다.

    “좋아요! 희나, 한이의 실험실에 다녀와도 될까요?”

    “아, 안 될 건 없죠.”

    “야호! 신난다! 그럼 당장 가요, 실험실 투어!”

    릴리는 희나의 허락을 받자마자 호들갑스럽게 기뻐하며 유한이를 따라나섰다.

    “……따라갔어야 했나?”

    희나는 사라진 두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며 뺨을 긁적였다.

    강진현은 희나의 손을 잡아 의자에 앉혔다.

    “별일은 없을 겁니다.”

    “맞아요. 성격이 별로긴 하지만 나쁜 애는 아니니까요.”

    거기다 릴리에게 완전히 빠져 버린 눈치니, 릴리에게 무례한 짓을 저지르진 않으리라.

    * * *

    릴리는 두 시간 동안이나 유한이의 실험실을 구경하다 왔다.

    그 더럽고 복잡한 실험실에 볼 게 뭐가 그렇게 많았냐고 물었더니 릴리는 방긋 웃었다.

    “실험 세팅이나 순서, 재료들 얘길 듣다 보니 시간이 순식간에 갔어요.”

    “그, 그렇구나.”

    유한이의 지긋지긋한 입담(?)에 당해 본 적 있는 희나로서는 전혀 공감 안 가는 말이었지만.

    “그나저나 뭐 먹고 싶은 거 없어요?”

    “희나가 해 주는 건 다 맛있는걸요! 메뉴는 전적으로 맡길게요!”

    희나는 릴리, 강진현과 함께 마트를 누비고 있었다.

    외국 마트를 구경해 보고 싶다는 릴리의 청에 겸사겸사 장도 봐서 저녁 대접을 할 생각이었다.

    “희나, 과자 사도 돼요?”

    “얼마든지 넣어요.”

    “아니에요. 스낵은 너무 많이 먹으면 몸에 안 좋으니까 적당히 골라야죠.”

    릴리는 마트 진열대를 찬찬히 구경하다, 과자 봉지 몇 개를 신중히 집었다.

    “이거랑, 이거랑, 이거, 이거, 이거 사야지.”

    ……적당히 고른 것치고는 양이 조금 많긴 했지만, 어쨌든 괜찮았다.

    릴리를 데리고 마트 이곳저곳을 구경하는 동안, 강진현은 옆에서 카트를 밀었다.

    그는 대부분 조용히 있었지만, 가끔 희나를 불러 세우기도 했다.

    예를 들자면…….

    “희나 씨, 오늘 소불고깃감 40퍼센트 할인이랍니다.”

    “정말요? 와, 그러네. 하마터면 놓칠 뻔했네요.”

    ……이런 경우거나.

    “희나 씨, 찾고 있는 물건 여기 있습니다.”

    “고마워요! 진현 씨 없었으면 한참 헤맬 뻔했네요!”

    ……이런 경우였다.

    강진현이 S급 헌터의 초월적인 감각을 이용하여 마트 곳곳을 스캔하며 다니고 있는 덕이었다.

    장 보는 두 사람은 손발이 척척 맞았다.

    강진현의 감각과 기동성, 그리고 희나의 날카로운 안목이 더해지면 무엇 하나 두려울 게 없었다!

    릴리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스민 듯 자연스러웠고, 안정감 있었다.

    고작 마트 구경일 뿐,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건만 둘 사이에는 행복이 은은하게 감돌았다.

    릴리는 그 장면을 멍하니 넋 놓고 바라보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곤 희나를 따라갔다.

    “희나, 같이 가요! 여기서 미아 되기는 싫어요!”

    “빨리 와요, 릴리. 혹시 매운 건 잘 먹어요?”

    “음. 핫 소스 정도는 먹는데…….”

    * * *

    “다 됐어요. 식사할까요, 우리?”

    오래간만의 진수성찬이었다.

    릴리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와! 이걸 희나 혼자 다 만든 거라고요? 그것도 한 시간 만에?”

    “그럼요! 물론 옆에서 진현 씨가 도와줘서 이만큼 빨리 할 수 있었던 거지만요.”

    “완벽한 파트너네요.”

    “그렇죠?”

    희나와 강진현, 희원, 릴리는 한데 모여 식사를 시작했다.

    남매는 사교성이 좋았고, 릴리는 말할 데 없이 발랄했으므로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다.

    식사는 저녁 늦게까지 이어졌다.

    아니, 이쯤 되면 식사라기보다는 신나는 파티에 가까웠다.

    각자 음료수를 홀짝홀짝 마시며 신나게 웃고 떠들었으니까.

    릴리가 깔깔 웃으며 희나와 강진현을 손가락질했다.

    “아! 그렇지 않아도 그 얘기 하려고 했어요. 둘이 같이 요리하는데, 손발이 한 몸처럼 척척 맞던데요? 자주 같이하나 봐요?”

    “아. 요리요? 음, 최근 들어 같이 자주 하긴 해요.”

    희나는 얼굴을 붉혔다.

    “진현 씨가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요리를 좀 배웠거든요. 좋은 셰프 선생님한테 배워서 그런지 한식도 곧잘 따라 해요.”

    결론은 자기 애인 다정하고 잘났다는 자랑이었다.

    커플의 염병에 익숙한 희원과 오색, 바둑이는 모른 척 각자의 음료수를 마시거나 음식을 먹었다.

    하지만 릴리는 아니었다.

    “진현은 굉장히 무뚝뚝해 보이는데, 희나에게는 한없이 다정한 남자네요.”

    “정말요! 진현 씨는 정말 마음이 깊어요.”

    희나의 목소리가 절로 높아졌다.

    강진현이 얼마나 멋진 남자인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할 수 있었다.

    자기 칭찬에 부끄러워하며 입을 막아 버렸던 희나와는 달리, 강진현은 희나의 찬사를 경청했다.

    “많이 부족합니다. 좋게 봐 주시는 희나 씨 마음이 넓은 거죠.”

    하지만 입매가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좋아서 찢어지기 직전인 모양이었다.

    커플의 다정한 행각에 릴리의 표정이 다소 어두워졌다.

    그리고 마침내 마음속에 숨겨 두었던 속내가 툭, 튀어나왔다.

    “……부러워요.”

    “뭐가요?”

    “둘 다 서로 아껴 주고 다정하게 대해 주는 것 말이에요.”

    “많이 좋아하니까 당연한 거죠.”

    희나는 이때다 싶어서 말을 꺼냈다.

    “그나저나 릴리도 남자 친구 있잖아요? 보고 싶겠어요.”

    “보고 싶기는 한데…… 아니, 이게 보고 싶은 게 맞긴 한가?”

    릴리는 우울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아까 SNS로 다이렉트 메시지가 왔어요.”

    “남자 친구한테요?”

    이런. 분명히 보고 싶다느니, 사랑한다느니 하는 입에 발린 말을 잔뜩 했을 게 뻔했다.

    ‘그래서야 없던 정도 살아날 텐데…….’

    속으로 혀를 차고 있을 때였다.

    “자길 두고 해외여행을 간 거냐며 서운해하더라고요.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는 경험은 중요한데, 비행기 타면서 자기 생각은 한 번도 안 했냐고…….”

    ……하지만 상대는 생각보다 더 상놈이었다.

    “아니, 뭐 그런 쌍……냥하지 못한 사람이 다 있담!”

    희나는 애써 상소리를 눌러 담았다. 그리고는 릴리의 손등을 붙잡아 토닥거렸다.

    “그 사람은 릴리가 왜 한국에 왔는지 알아요?”

    “그건 몰라요. 괜히 걱정시키고 싶진 않았거든요.”

    “그, 그렇군요.”

    사건의 전말을 다 들어도 그놈은 걱정은커녕 전혀 미안해하지 않을 거라는 데 희나는 전 재산을 걸 수 있었다.

    “뭐라고 더 하지는 않았어요? 예를 들어, 보고 싶다거나?”

    “그건 아니고…… SNS에 제가 태깅된 걸 봤나 봐요. 자길 놔누고 가선 다른 남자들이랑 어울려 논다며 은근히 저를 탓하지 뭐예요?”

    ‘아니, 의처증에 가스라이팅까지?’

    미친 전 남자 친구가 될 모든 조건을 갖춘 놈이었다.

    ‘릴리의 마음을 바꾸는 것보다 세상에서 슬쩍 삭제해 버리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몰라.’

    희나의 마음이 위험한 쪽으로 흘러가고 있을 즈음이었다.

    릴리가 폭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헤어지는 게 낫겠죠?”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희나가 눈을 커다랗게 뜨자 릴리가 픽 하고 웃었다.

    “나도 눈치는 있다고요. 희나도 내 남자 친구, 별로 마음에 안 들어 했잖아요?”

    “그게 그렇게 티 났어요?”

    “네. 방금은 죽여 버리고 싶다는 얼굴이었는데요.”

    “아, 정말 티 났구나.”

    얼굴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리자 무엇이 그리 웃긴지 릴리가 깔깔 웃었다.

    “나도 그 사람이 아주 다정한 사람이 아니란 것 정도는 알고 있어요. 천성이 좀 예민하니까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생각했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예민하게 태어났다고 제멋대로 굴 권리가 있는 건 아니다. 특히 그 상대가 연인이라면 더더욱!

    “그건 릴리가 너무 착하게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맞아요. 희나랑 진현을 보니까 알겠더라고요.”

    “……우리요?”

    희나는 의아해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였다.

    ‘사실 처음엔 그런 걸 의도하긴 했지만…….’

    중간에 강진현이 주접을 부린 것 외에는 딱히 한 일도 없었던 것 같은데.

    던전 안의 살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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