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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220화 (220/228)

던전 안의 살림꾼 외전 6화

반짝이는 은빛 링, 그리고 빛을 뿜어내는 작은 꽃처럼 섬세하게 세공된 다이아몬드.

초콜릿 공 안에서 나오리라고는 상상해 본 적도 없는 물건이었다.

‘반지!’

희나의 시선이 지진 난 것처럼 거침없이 흔들렸다.

상대의 눈동자가 진도 9.0으로 떨리거나 말거나, 강진현은 차분히 다음 할 일을 이어 했다.

그는 희나의 발치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 결국 꿇려 버렸어.’

멍하니 아까 그를 힘들게 말렸던 게 허사가 되었다는 생각을 하는 사이.

“희나 씨.”

강진현은 유독 낮아진 목소리로 희나의 이름을 불렀다.

무엇인가 엄청나게 중요한 이야기를 꺼낼 것 같은 어조였다. 희나는 그 분위기에 압도되어 얼결에 대답했다.

“네, 네에?”

“우선, 그간 저와 교제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희나는 휘휘 손사래 쳤다. 안타깝게도 오늘이 무슨 날인지, 여전히 희나의 뇌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였다.

“아뇨, 아뇨. 고맙다니요. 서로 좋아해서 사귀는 건데요.”

“희나 씨가 지난 1년간 보여 준 한결같은 애정에 어떻게 보답할 수 있을지, 많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헉. 이, 1년…….”

그제야 희나는 1년 전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이쯤…… 미국에서…… 진현 씨한테 키스하고…… 오늘부터 1일 하기로 했던가?’

원체 경황없을 때라 날짜를 따로 기억하지는 못했는데, 꼭 이쯤이었던 듯하다. 정식으로 교제하기로 한 게.

그리고 희나는 오늘의 두 번째 깨달음을 얻었다.

‘왜 갑자기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하나 했는데! 우리 기념일이었구나!’

방금까지 1주년 데이트를 신나게 즐긴 사람치곤 다소 파렴치한 깨달음이었다.

‘나는, 나는, 나는! 대체! 으아악!’

자책감에 빠져들기 시작할 무렵, 강진현이 희나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품 안에서 반지를 꺼냈다. 희나의 링이었다. 참고로 강진현의 것은 아이스크림 위에 있다.

반지가 등장했으니, 나올 말은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저와 결혼을 전제로 사귀어 주시겠습니까?”

아악! 희나는 강렬한 죄책감을 느끼며 강진현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의 두 눈은 사랑과 희망, 장밋빛 미래, 아무튼 몹시나 아름다운 것들을 품고 흑요석처럼 검게 반짝였다.

그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눈앞이 번쩍했다. 죄책감이 이마를 딱 하고 때렸기 때문이다.

희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무릎 꿇은 강진현 앞에 덩달아 무릎을 꿇었다.

쿵! 무릎 부서지는 소리가 난 것 같긴 했지만…… 일단 중요한 건 그런 사소한 아픔 따위가 아니었다.

“희, 희나 씨? 무릎이…….”

“미안해요, 진현 씨!”

“예?”

“사실 저,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모르고 있었어요. 제가 너무 무심했어요. 아, 정말! 제가 평생 오늘을 사죄하면서 살겠습니다!”

숨도 안 쉬고 사과와 반성, 앞으로의 계획을 읊었다.

‘으윽. 어떻게 해! 화내면 어쩌지?’

희나는 눈을 꼭 감고 강진현이 내릴 처분을 기다렸다.

“…….”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강진현은 묵묵부답.

희나는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꼭 감았던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데…….

‘헉.’

그대로 강진현과 눈이 딱 마주칠 것이 무어란 말인가!

희나는 조심스럽게 눈알을 굴렸다.

“……왜 웃고 있어요?”

“좋아서요.”

“왜 좋아요? 중요한 기념일을 까먹었는데.”

“그 대신 희나 씨가 저와 평생 함께 살아 주겠다고 대답해 주었는데요, 뭘. 저로서는 굉장히 이득 본 셈이죠.”

강진현은 ‘평생 사죄하면서 살겠다’는 희나의 반성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아주 만족한 듯했다. 마치 배부른 사자 같았다.

희나는 방금 발언으로 인해 강진현에게 평생 코를 꿰여 버린 것도 모르고, 계속 눈치를 살폈다.

“정말로 괜찮아요? 화 안 났어요?”

“괜찮습니다. 이벤트 받은 희나 씨도 즐거웠고, 이벤트를 한 저도 즐거웠으니까요. 아주 만족스러운 결과 아닙니까?”

“하지만…….”

“혹시 제 이벤트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까?”

“아니요! 정말 좋았어요! 제가 준비한 게 없어서 미안할 뿐이지…….”

“준비한 게 없긴요. 희나 씨의 미래를 주었으니, 저는 차고도 남게 받았습니다.”

“그, 그런가?”

대체 언제 자기 미래를 강진현에게 주어 버렸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았지만, 일단 강진현이 좋다니 됐다.

“그러니,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강진현은 무릎 꿇은 희나를 일으켜 의자에 도로 앉혔다.

멍이 들었을지도 모른다며, 무릎에 힐링 포션을 살살 발라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그는 희나의 치마를 단정하게 정리해 주고는 또다시 반지를 내밀었다.

“그럼, 이제 정말로 끼워 드려도 될까요?”

희나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얼마든지요!”

그렇게 희나의 왼쪽 약지에 빛나는 실버 링 하나가 자리하게 되었다.

근사한 추억과 근사한 선물. 그야말로 완벽한 날이었다.

* * *

희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이, 참. 음식 할 때마다 반지를 빼놔야 하니 너무 불편하네.”

하지만 불편함을 이야기하는 혀와는 다르게, 입꼬리는 귓가까지 쭉 찢어진 채였다.

거기다 저…… 천연덕스러운 손가락 놀림이라니. 누가 봐도 과시하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저 요리하는 동안 반지 좀 잘 봐 주세요. 어휴. 너무 동그랗고 예뻐서 어디 굴러갈까 봐 걱정이 되네.”

그러면서 테이블 한가운데에 반지를 전시했다.

때문에, 사무실 방문객인 우민아와 연금술사 유한이는 어쩔 수 없이 반지를 관찰할 수밖에 없었다.

연금술사인 유한이는 금세 재료를 알아보았다.

“백금에 다이아몬드네.”

그러자 희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디자인이래. 너무 예쁘지?”

“그런데 알은 좀 작은 것 같다? 강진현 헌터 성격으로는 엄지손톱만 한 걸 달아 줄 줄 알았는데.”

“알이 크면 일할 때 불편하니까. 매일 끼고 있으려면 그 정도 크기가 딱이지. 휴. 진현 씨가 얼마나 사려 깊은지 몰라.”

희나는 열심히 요리하는 척하면서도 유한이의 말에 하나하나 대꾸해 주었다.

참고로 모든 대화의 결론은 ‘반지가 멋지고 그걸 준 강진현은 너무나 다정한 사람이다’였다.

유한이는 질린 낯으로 희나와 반지를 번갈아 보았다.

“……와. 이젠 정말 연애하는 걸 감출 생각이 전혀 없구나.”

“흥. 이미 다 알고 있다는데 굳이 감출 필요는 없지.”

희나는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요리했다. 세상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요즘 희나 버릇이 왼손 들고 호호 웃기라는 소문이 아주 파다해.”

우민아가 키득키득 웃으며 근황을 전했다.

“강진현이야 원체 티를 못 내서 안달이긴 했는데, 희나까지 저럴 줄이야.”

“와, 이래서 사내 연애를 막아 둔 회사가 많은 거구나. 꼴 보기 싫어서.”

유한이의 중얼거림에 우민아가 눈을 슬쩍 흘겼다.

“뭐야, 유한이 연금술사, 외로워?”

“제가 왜, 왜, 왜요?”

“남 좋은 일 보고 배알 꼴려 하니까 그렇지.”

“아니 다른 커플 염병 보는 걸 조, 좋아해서 뭘 합니까?”

“어휴. 매일 골방에 틀어박혀만 있으니, 외로울 만도 하지.”

“그, 그, 그런 것 아니라니까요!”

“그렇게 앙칼지게 굴면 찾아오던 인연도 뒷걸음질 쳐서 나간다. 희나 봐 봐.”

우민아의 지적에 유한이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으흠흠~.”

두 각성자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거나 말거나, 희나는 행복했고 반지는 변함없이 반짝거렸다.

* * *

똑똑.

“들어오십시오.”

대답하자마자 문이 달칵 열렸다. 서류를 검토하던 강목현은, 자신을 찾아온 상대를 보고 놀란 눈빛을 했다.

“강 헌터, 무슨 일로?”

“일은 점심 먹고 하지 그래?”

강진현이 도시락 찬합을 흔들며 말했다. 예상치 못한 제안에 강목현은 얼떨떨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 준비는 순식간에 끝났다.

강목현은 수저를 집으며 입을 열었다.

“별일이야. 회사에서 너와 같이 도시락 까먹을 일이 생길 줄이야.”

“음. 사정이 많이 바뀌었으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세상이 안정화됐고, 던전은 재활성화되지 않는다.

자연히 일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고, 덕분에 길드 안팎으로 바빴던 강씨 형제는 함께 식사할 시간을 낼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지.’

강목현은 이 팀장, 희나를 떠올렸다.

희나를 만난 이후, 동생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다. 일밖에 모르던 메마른 삶에 한 줄기 여유가 찾아왔다고 해야 할까?

형의 눈빛을 느꼈을까, 강진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얼굴 다 봤으면 먹지 그래?”

강목현은 피식 웃으며 반찬을 집어 들었다. 달걀물을 입혀 부쳐 낸 동그란 분홍 햄이었다.

“옛날 생각나네. 이거, 어머니가 자주 해 주셨는데.”

“맞아. 그래서 준비한 메뉴야.”

의외의 대답에 강목현이 고개를 들었다.

“준비했다니?”

“내가 직접 싼 도시락이야.”

“네가 직접?”

“옆에서 희나 씨가 좀 도와주긴 했지만, 거의.”

강진현은 조금 머쓱한 듯 목 뒤를 문질렀다.

“희나 씨가, 형에게도 직접 한 음식을 대접하면 좋을 것 같다고 해서.”

“아.”

강목현은 그제야 길드에 파다한 소문을 떠올렸다. 강진현 헌터와 이희나 팀장이 드디어 커플링을 맞췄다더라, 하는 이야기였다.

그러고 보니 강진현의 왼손에 실버 링이 유독 도드라지게 빛나고 있었다.

“이벤트는 잘 끝난 모양이네.”

웃음기 어린 대꾸에 강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덕분에.”

“잘됐다니 다행이다.”

“맞아. 약혼 이벤트치고는 조금 조촐하긴 했지만, 희나 씨는 굉장히 만족했어.”

“……뭐?”

강목현은 씹던 햄을 뱉을 뻔했다.

“약혼이라고?”

“그래. 결혼을 전제로 사귀어 달라고 다시 고백했거든.”

“너무 빠, 빠른 것 아닌가?”

“희나 씨도 평생 나를 책임져 주겠다고 약속해 주셨고.”

약간의 기억 조작이 들어간 대답이었지만, 강목현으로서는 그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이 팀장이 의외로 대범한 면이 있었구나.”

“그런 면이 참 멋지지.”

“그, 그래.”

어느새 무뚝뚝한 동생의 얼굴은 달아올라 있었다. 누가 보아도 사랑에 빠진 남자의 모습이었다.

그런 동생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이라곤 하나뿐.

“행복해라.”

형의 축복에 강진현이 씨익 웃었다.

“이미 충분히 행복해.”

던전 안의 살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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